• 최종편집 2020-08-0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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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찬송가 311장은 <내 너를 위하여>입니다. <프랜시스 해버갈, Frances R. Havergal, 1836-1879>이 1858년에 작사했습니다. 해버갈 양은 당시 독일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휴양을 위해 여행을 하던 중, 뒤셀도르프에 있는 친구네 집에서 스턴버그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는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고발하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며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고발을 이기지 못한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해버갈 양이 본 그림의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해 이 일을 행하였거늘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그녀는 감동을 받아 메모를 했고, 그것을 근거로 찬송시를 썼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그러나 해버갈 양은 막상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던지 원고를 난로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이 약해서 몇 군데 그슬리기만 했는데, 얼마 후 그녀의 부친이 시를 완성하면 곡을 붙여 주겠다고 해서 시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불속에서 살아남은 찬송가라 하겠습니다.
 
불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 멸망의 불에 들어갈 존재였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서 구원하심으로 멸망의 불길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중 구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은혜 없이 구원 받은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은 늘 엇갈렸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과 가룟 유다의 마음이 엇갈림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십자가를 질 때가 다가옴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유다는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반대로 마음이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위대한 것은 그 엇갈림을 사랑으로 포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세상의 정의처럼, 혹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식의 탈리오의 법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는 식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네가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난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그게 사랑의 복음이 위대한 이유입니다. 복음은 엇갈림을 극복하는 힘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앞의 찬송가에 동의하면서도 일부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가를 계산하듯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받은 사랑만큼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물리치는 분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늘 대가를 계산합니다. 계산하는 사랑은 타락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보세요.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섭섭하게 해도 계속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이 오가는 가족이 귀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에도 대가를 계산하는 듯하여 마음이 쓸쓸합니다. 상대방의 배신으로 인한 엇갈림까지 포용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배울 때입니다. 그리고 먼저 가정 안에서부터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나아가서 주변에서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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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엇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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