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0-2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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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펼치기] ‘82년생 김지영’에게 ‘92년생 김지훈’이 말한다
    작년 2018년 말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20대 여성들의 높은 지지도와 비교되는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는 무슨 의미일까? 20대 남성들의 가치관이랄까, 아니면 그들의 고민과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고맙게도 20대 남성들을 분석한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곧, ‘프레카리아트’, ‘밀레니얼 세대’, ‘90년대생’, ‘밀레니엄 대학생’이다. 이것을 분석하면 20대 남성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프레카리아트의 등장 먼저,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있는 노동자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àrio, 불안정한)’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노동자 계급)’를 합성한 것이다. 직역하면 ‘불안정한 노동 계급’이란 뜻이다. 직업이 불안정하고 저임금을 받고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뜻한다. 한국의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 처럼 유럽에도 1,000유로 세대(Generazione 1000 euro)가 있다. 기본생활만이 가능한 수준인 월 1,000유로 정도를 벌기도 힘든 유럽의 20-30대를 말한다. 역시 일본에도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가 있는데, ‘깨닫다, 득도하다’라는 뜻의 사토루(さとる)에서 나온 말로 일본의 오랜 경제 불황 속에서 성장하여 돈과 출세에 관심이 없는 일본의 20-30대를 말한다. 그리고 이들을 계급적으로 부를 때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프레카리아트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 시장이 유연해지면서 등장했다. 대개 일용직 등의 비정규직이나 파견직과 같은 간접노동 형태로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별다른 직업 경력이 없고 안정적인 고용 전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다수의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으로 인해 저임금에 시달리며, 사회보험 가입 등에서도 법적·실질적으로 배제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불안정성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며 일종의 계급으로 굳어지고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인싸(주류세력)들의 금수저-금수저의 계급 세습이 이들에게는 흙수저-흙수저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의 의미? 2.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과 ‘90년대생’이 온다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는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시대의 아픔 속에서 문화적으로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는다. 밀레니얼 세대를 좀 더 세분하여 90년대생들에 주목하여 보자.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 (웨일북, 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90년대생들의 의식은 기본적인 자아실현의 충족을 위해 힘쓰는 ‘유희 정신’에 기울어져 있다. 이념적 세계보다 연극적 세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이들도 앞선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과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유희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점은 이들의 세계를 다르게 만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어떤 세대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 책은 1982년생인 저자가 1990년대에 출생한 신입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접하며 받았던 충격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90년대생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특징을 ‘간단, 재미, 정직’으로 정리해 준다. 그리고 90년생들이 생각하는 회사생활의 한 일면을 이렇게 들려준다.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발전보다는 자신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사 눈치 안 보고 정시 출근과 퇴근을 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싫으면 관두는 것이 바로 이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임홍택의 말을 들어 보자. “과거 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90년대생들을 위한 조직 문화 개선 방안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충성도에 회사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90년대생은 어려서부터 이미 인터넷에 능숙해지고 20대부터 모바일 라이프를 즐겨온 ‘앱 네이티브’이다.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이들 90년대생들은 웹툰이나 온라인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생겨나는 신조어나 유머 소재들을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따라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이들에게는 허물어졌다. 증강현실(AR)게임을 소재로 한 tvN 주말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드라마로 진출한 90년대생들의 세계관이다. 또한 종이보다 모바일 화면이 더 익숙한 90년대생은 온라인 게시물이 조금만 길어도 읽기를 거부하고, 그나마도 충분히 궁금증이 일지 않으면 제목과 댓글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넘겨버린다. 따라서 이들은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가진 서사보다 맥락이 없고, 표현도 거칠고 어설픈 B급 감성에 열광한다. ‘참견(參見)’보다 ‘참여(參與)’에 긍정적인 세대인 것이다. 임홍택의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참여라는 말에는 긍정적이지만 참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참견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나 말 따위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함’이고, 참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와 어느 정도 관계있는 일이나 말 등에 직접 나서고자 한다.”많은 90년대생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고, 일터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며, 참여를 통해 인정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 그들은 회사가 평생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헌신의 대상을 회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로 삼는다. 안정을 추구하는 공무원을 선호하는 한편, 창업의 길을 꿈꾸기도 하며 언제든 이직과 퇴사를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을 위해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기 마련이고,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선택에 훈수를 두거나 참견을 하곤 한다. 그러나 임홍택은 기성세대의 ‘과거의 경험’이 더 이상 90년대생을 ‘판단할 근거’가 되지 못하는 세대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상사의 모습이 ‘꼰대’인 것이다. 여기서 꼰대는 ‘전형적인 한국사회의 기성세대들’을 말한다. 기성세대들인 꼰대들은 무조건 가르치려 들고, 젊은 사람들을 야망 없고 패기 없고 조직에 안 맞는 나약한 인간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자기 말만 늘어놓는다. “한 때는 내가~!” “옛날에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 꼰대들은 양면적이다. 90년대생이 보기에 꼰대들은 이렇다.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보고를 안 하면 야단을 치고,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고 말하면 그건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니 종잡을 수 없다. 꼰대들의 모임인 대한민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능력 최우선’이라 말해놓고는 뒤로 가서는 은근히 ‘서열’과 ‘계약조건’을 따진다. 3. 밀레니엄 대학생 걱정이다. 이제 서기 2000년에 태어난 이들이 올 3월 201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따라서 대학은 올해부터 21세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을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이라고 부른다. 조효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선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놀랍다. 우리 기성세대는 잊고 있었지만, 밀레니엄 시대는 ‘이명박근혜 시대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경쟁’과 ‘실적위주(성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전체의 공정함보다 작은(자신에게 해당되는) 공정성에 물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성은 또 있다. 조효제 교수의 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세월호와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권위에 대한 냉소,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였다.” 세월호를 통해 정치가 소용없다는 것을, 동시에 탄핵을 통해 소용없는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았던 세대가 바로 밀레니엄 세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흐름은 인권의 측면에서는 모순적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한 태도로 인해 ‘정유라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킨 세대가 곧,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미투 열풍’을 더해 성평등의 흐름으로 20대 여성보다 20대 남성들이 더 공정성에 민감해진 것이다. 한림대의 조형근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평범한 20대 남성들도 재벌과 대형 교회의 세습에 분노한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는 세상에 분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더 특권과 반칙에 반대한다. 이들의 보수화를 특권계급이나 노년 세대의 보수성과 동일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들이 양성평등 정책, 군 복무 가산점 폐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진보적 정책에 분노하는 이유는 ‘개인들 간의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빼앗는 반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에 분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학 서열화보다는 정확하지 않은 대학 서열에 분노하는 세대다. 부모의 경제력이 인생을 좌우하는 데 반대하는 만큼이나 성별이 인생을 좌우하는 변수가 되는 데 분노한다. 남자라고 우대받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데, 남자라서 역차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오직 점수로만!’이 이들의 슬로건이다. 경쟁은 계급, 성별, 인종 따위의 비개인적 요소와 무관하게 공정해야 하고, 그 결과와 책임 또한 개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자유주의 정의론의 전형적 사고방식이다.” 20대의 말을 들어보자. 바른미래당 청년대변인인 김현동 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20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정체성과 생각을 공유하는 세대이다. 과거 대한민국에는 그 세대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신이 또렷이 있었다. ‘나의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라는 새마을 정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정신, ‘나를 희생해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생각을 기반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 극복을 이루어낸 금모으기 운동 정신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저출산 위기, 다가온 통일 등 여러 가지 시대적 과제가 산적한 오늘날, 20대들은 뚜렷한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유교 사회주의’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정도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과거의 집단주의는 이제 해체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 따라서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란에서 20대의 대부분은 설사 이 팀이 남북 평화와 화해의 단초가 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한 선수를 엔트리에서 제외하는 것에 분노했던 것이다. 사실 남북 단일팀에서 60대 이상 강경보수의 분노는 ‘북’이라는 글자에 기인한 것이라면, 20대의 분노는 ‘단일팀’이라는 불공정에 의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김현동 대변인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성평등이 필요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남녀는 서로 다른 시각을 바탕으로 보고 있다. … 20대 남성에게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는 내가 비난할 대상일 뿐, 책임과 잘못을 분담해야 할 동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20대 남성에게 지난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책임을 분담하라는 요구는 불공정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살던 세상의 부조리는 ‘92년생 김지훈’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의 확립이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이 가능할까? 미시적 공정함은 거시적 측면에서는 불공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을까?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형식적 공정에 대한 집착을 실질적 공정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개별 원자적인 반차별 감수성을 인도적 성격의 반차별 의식으로 이끌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지고 있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20대, 혹은 90년대생, 밀레니엄 세대들은 ‘전지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니, 아예 체념 하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가령, 기후변화에 대해 숙명론적인 인식이 많고,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적 불평등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문제 역시 귀찮아한다. 더욱이 ‘연대’와 ‘공동체’라는 의식은 저 멀리 사라진지 옛날이다. 너무 거대한 문제이기에 그 문제에 압도당하거나, 아니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4. 희망의 인권과 새로운 혁명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가져다준다. 임홍택의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로, 이는 수요자인 기업에 유리한 시기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이 구직 활동을 진행하는 이 시간을 지나, 2000년대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입사를 하게 되는 시점에는 일본과 같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일자리보다 취업자가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90년대 출생자는 687만 명, 2000년대 출생자는 496만 명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구직자들의 눈치를 봐야 할 시기가 올 수 있다.”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들에게 ‘희망의 인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어보자. “앞으로 십년, 이십년 뒤엔 한반도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엔 이 땅의 모든 사람들―남북한 선주민과 이주자―을 아우르는 포괄적 인권이 우리 공동체의 본질적인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 일을 해낼 주인공들, 능동적 희망의 인권을 실천할 밀레니엄 신입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 지금 프랑스는 노란 조끼를 입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과 함께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 양산의 중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1848년 6월 파리에 정치세력으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탄생했다면 이제 2019년 프랑스의 노란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상은 ‘촛불 혁명’ 다음에 전체(까지는 힘들다면, 적어도 약자들)의 공정함을 위해 연대하며 공동체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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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0
  • 2019년, 모두에게 돼지꿈을!
    1. 기해년, 모두가 돼지꿈을 꿀 수 있을까? 올해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이다. 己(기)가 황금색을 의미하기에 황금돼지띠의 해라고도 한다. 돼지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복(福)과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다. 인간 곁에서 살며 고기와 기름 등 귀중한 식량도 제공했다. 황금 역시 재물의 대명사여서, 기해년 2019년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걸게 만드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도 없고, 신앙적으로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난도 교수가 『트렌드코리아 2019』 (미래의창, 2018) 서문에서 밝히듯이, “한 집단이 공유하는 ‘마음의 버릇’은 소비에 큰 역할을 한다.” 서로서로 좋은 해라고 덕담을 나누고, 결혼을 서둘러 하고, 돼지해에 아이를 낳고, 이사를 하고 사업을 일으키면 결과적으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물론 기업들도 황금돼지에 컨셉을 맞춘 마케팅을 활용할 것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 센터 김난도 교수팀은 2019년의 트렌드로 ‘PIGGY DREAM’을 선정했다. 또한 2019년의 흐름을 “원자화, 세분화하는 소비자들이 시대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정체성과 자기 컨셉을 찾아가는 여정(9쪽)”으로 읽어내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극도로 개인화된 SNS를 기반으로 소통하고 1인가구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원자화하고 있다. 그 결과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소비하고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소비자가 되어 간다. 개성을 키우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부작용도 있다. 어릴 때부터 디지털 미디어에 의존해 소통해온 젊은 소비자들은 감정을 타인과 나누기 어려워하고 결국 감정대리인을 통해 자기 느낌을 표현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관계의 종착지인 가족관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가족 제도에서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던 자기 역할을 부정하고 개체로서의 정체성을 재모색하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 환경도 급변하고 있다. 취업은 어렵고 자영업은 고전하는 가운데 수많은 1인 사업자들이 SNS와 플랫폼을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과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환경문제 역시 심각해져 가고 있다. 이제는 친환경이 아니라, ‘必(필)환경’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동시에 정보기술(IT)의 발전은 이제 인공지능(AI)을 넘어 ‘데이터지능(Data Intelligence)’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충분한 데이터 없는 인공지능은 소프트웨어 없는 컴퓨터와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시적, 거시적 변화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며,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김난도 교수팀은 모든 것을 정체성의 문제로 본다.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변혁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마음의 방패(11쪽)’라고 한다. 곧, 개념(컨셉)의 연출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도 마찬가지지만, 교회도 살아남기 위해 마케팅을 넘어 컨셉팅이 필요한 것이다. 기해년 돼지의 해에 모두가 돼지꿈을 꿀 수 있을까? 2. 돼지꿈(PIGGY DREAM) 김난도 교수팀은 2019년 소비트렌트를 ‘돼지꿈(PIGGY DREAM)’의 첫글자로 10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교회와 목회자 관련으로), 1) Play the Concept(컨셉을 연출하라) 지금 시대는 가성비나 품질보다 컨셉(concept, 광고가 내세우는 주장이나 의견을 말하며,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킬만한 광고의 새로운 주장을 뜻한다)이 화두가 된 시대이다. 교회의 가성비나 목회자의 품질(인격)보다 소개된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라는 말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컨셉을 연출하는 ‘컨셉러(concepter)’가 되어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직관적인 미학’, ‘순간적인 느낌’, ‘가볍고 헐거운’ 컨셉에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목회자의 설교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콘텐츠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컨셉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스토리 중심의 서사보다 순간적인 자극과 호기심 유발에 더 익숙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부흥회의 시대가 돌아올 것임을 보여준다. 너무도 기계적이고 이성적인 시대에 좋은 찬양을 통한 감성적 접근과 순간적인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2019년의 첫 번째 트렌드 키워드가 그냥 ‘컨셉’이 아니라 ‘컨셉의 연출’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재미있거나 희귀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갬성(자기 연출에 푹 빠진 소비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단어로 ‘감성’이라는 단어를 굴려서 말하는 것)’터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컨셉이 될 수 있다. 이미지에 열광하고 변화무쌍함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기능이 아니라, 컨셉을 소비한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컨셉이 우선인, ‘기승전­컨셉’의 시대이다. 마케팅은 컨셉팅으로 진화한다. 설교는 기승전-컨셉으로 승부해야 한다. 2) Invite to the ‘Cell Market’(세포마켓) 유통이 세포 단위로 분화하고 있다. 수많은 1인 사업자들이 SNS를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한 정보와 상품을 팔고, 1인 크리에이터들은 자기만의 콘텐츠를 모바일 라이브로 방송한다. 이들은 기존의 대형 유통 기업이나 방송사들과 협업할 정도로 존재감이 커졌다. 이런 트렌드의 배경에는 세포마켓이 있다. 세포 단위의 시장이 만들어진다는 의미인데, 1인 미디어의 등장이 미디어 판을 뒤집었다면 이번에는 유통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 SNS를 기반으로 한 개별 크리에이터들은 이제 1인 미디어에서 ‘1인 마켓’으로 발전한다. 누구나 온라인에서 가게를 열고 물건과 서비스를 팔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거대 플랫폼과 각종 비대면 결제 서비스의 발달이 기폭제가 되면서 이른바 ‘셀슈머(판매자인 seller와 소비자인 consumer의 합성어인 sellsumer는 인터넷상에서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을 말한다)’의 등장을 촉진시키고 있다. 취업은 어렵고 자영업은 고전하는 상황에서 여러 직업을 수행하는 ‘N잡러(2개 이상 복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뜻하는 ‘job’, 사람을 뜻하는 ‘~러(er)’가 합쳐진 신조어)’가 소비자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다양한 SNS 채널을 통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포마켓은 불법 거래의 온상으로 지목되기도 하며, 콘텐츠의 선정성과 폭력성 문제로 유해 콘텐츠와의 차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대형 교회 목사들이 독점한 방송 설교를 듣는 이들이 SNS상의 팟케스트,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설교를 듣는 ‘말씀의 세포마켓’으로 나서고 있다. 3) Going New-tro(요즘옛날, 뉴트로) 최근 40대가 유년 시절에 신던 추억의 운동화가 10대들의 패션 ‘잇템(꼭 있어야 하거나, 갖고 싶어 하는 아이템)’이 되고, 촌스러워 보이는 빅로고 디자인의 티셔츠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출시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복고 음반과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디자인의 가전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복고의 열기가 뜨거운 것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의 그룹 ‘퀸’에 열광하는 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젊은이들을 보라! 사람들이 TV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1020 세대에게 과거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움’이다.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소비자들은 서울 익선동 한옥 마을 골목길을 찾고, 이미 자취를 감춘 LP판을 꺼내 들며, 추억의 전자오락실 게임에 열중하는 것이다. 사실 복고는 수시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트렌드이지만, 지금의 복고는 중장년층이 아닌 1020 세대를 공략하는 새로운 복고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것을 김난도 교수팀은 ‘돌아온 복고(Retro)’가 아니라, 새로운 복고, ‘뉴트로(new-tro)’라고 말한다. 레트로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지난날의 향수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과거를 모르는 1020 세대들에게 옛것에서 찾은 신선함으로 승부한다. 뉴트로 감성을 찾는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는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부흥회와 성경공부, 사경회가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것 그대로는 안 된다. 레트로가 아닌 뉴트로가 되어야 한다. 철저한 인문학적, 신학적 기반 위의 부흥회, 사경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Green Survival(필환경) 미국의 한 환경운동가는 4년 동안 버린 쓰레기를 1리터도 안 되는 작은 병에 담았다. 이제 목표는 아예 쓰레기 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 것이 ‘필(必)환경’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에 들어가는 환경 부담을 제로로 만드는 것. 이는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지구의 전 생명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즐겁고 유쾌한 ‘필환경’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소재 선정부터 제조 공정까지 친환경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된 의류 제품을 소비하는 ‘의식 있는 의류소비’인 ‘컨셔스 패션(Conscious Fashion)’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폐기물을 재사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가치를 더해 친환경 제품으로 리디자인(redesign)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친환경 소비자교육인 에코 페어런팅(Eco Parenting)이 필요할 것이다. 5) You Are My Proxy Emotion(감정대리인 내 감정을 부탁해) 자기 감정을 스스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많은 소비자들이 “나 화났다”는 감정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하고, 연애나 여행을 액자형 관찰예능 프로그램으로 대신 경험한다. ‘대신 욕해주는 페이지’에 들어가 차오른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으로 감정을 외주화(outsourcing) 해버린다. 최근 액자형 관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기를 키우고, 연애를 하고, 반려견을 입양하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한다. 사람들은 이제 즐거운 것만 보고 좋은 감정만 느끼려고 한다. 이러한 감정대리인을 찾는 유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감정대리인’을 통해 자기 감정을 대신 느끼는 사람들이다. 둘째, ‘감정대변인’에게 자기 감정을 대신 표현하도록 맡기는 사람들이다. 최근 액자형 관찰예능 프로그램을 즐기고 뉴스를 읽을 때도 기사보다 댓글을 먼저 읽으며 타인의 감정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감정관리인’이 자기 감정을 대신 맞춰주기를 희망한다. 감정 코칭이나 감성 큐레이션 서비스가 자신의 기분을 맞춤형으로 조절해주기를 바란다. 노동의 외주화를 넘어 ‘감정의 외주화’, 곧 ‘감정의 맥도날드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외주화도 가나안 성도들을 통해 펼쳐질 것인가? 6) Data Intelligence(데이터지능) “오늘 뭐 입을까? 내일 데이트 어디로 갈까? 점심은 뭘로 하지? 어디 입맛에 맞는 커피 없을까?” 이제 이에 대한 답은 엄마나 친구가 아니라, ‘데이터’가 알려준다. 의사결정의 패러다임이 인공지능(AI)에서 데이터 지능(DI)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데이터는 정보로, 정보는 지식으로, 지식은 지혜로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된 시대이다. 그러나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데이터 인텔리전스는 누가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정부가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거나 국민 개개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정치적 용도로 사용한다면 인권 침해는 물론이고 엄청난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또한 국경이 없는 온라인 데이터의 성격상, 그 수집 및 활용과 관련해 전 세계가 공동으로 법적, 제도적, 기술적 기반을 갖출 필요도 제기될 것이다. ‘데이터, 알고리즘, 인공지능’이 데이터 인텔리전스의 삼위일체이다. 교회는 이제 데이터지능을 통해 인류 역사상 종교성이 차지한 영성의 깊은 차원을 다시금 회복해야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종교와 교회, 신학의 역사라는 데이터, 이를 학문과 영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목회자의 능력(알고리즘),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성도들의 참된 신앙으로 이끌 지능인 신학적 인텔리전스가 필요하다. 7) Rebirth of Place(공간의 재탄생, 카멜레존) 최근 공간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 유통 공간이 카페로, 도서관으로, 책방으로, 강연장으로 전시회장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중이다. 현대의 소비 공간은 카멜레온이 주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색깔을 바꾸듯 변신한다는 면에서 카멜레존(Chamelezone)이라 부를 수 있다. 특정 공간이 협업, 체험, 재생, 개방, 공유 등을 통해 본래 가지고 있던 하나의 고유 기능을 넘어서 새로운 정체성의 공간으로 변신하는 트렌드를 말한다. 은행과 카페, 호텔과 도서관, 자동차 전시장과 레스토랑 등 공간의 협업이 즐거움을 준다. 주변환경에 따라 피부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공간의 화려한 변신이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카멜레존’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명소들이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 쇼핑몰은 물론이고 전시장과 공연장 등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온라인에 밀리는 오프라인에게 카멜레존은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 된 것이다. 교회에 카페가 생긴지는 좀 됐다. 이제 교회 건물은 도서관으로, 영화관으로, 동네 사랑방으로 바뀌어야 한다. 거룩한 성(聖)은 세속의 속(俗) 안에서 자리 잡는다. 교회는 산 속에 있는 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8) Emerging ‘Millennial Family(밀레니얼 가족)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이어 ‘밥 잘 사주는 예쁜 엄마’가 등장했다. 엄마가 변한 것이다. 밥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주고, 남는 시간은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엄마들을 말한다. ‘3신가전’이라는 말도 있다. 밀레니얼 가족의 밥 잘 사주는 엄마에게 꼭 필요한, ‘로봇청소기와 식기세척기 그리고 빨래건조기’ 3총사를 말한다. 이제 집안일은 3신가전에 맡기고 엄마들은 자신을 가꾸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밀레니얼 가족의 등장인 것이다. 사실 햇반을 비롯한 가정간편식의 주 구매층도 1인 가구에서 다인 가구로 빠르게 이동 중이다. 물론 이들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가족은 소중한 존재다. 가정이 중요한 것도 안다. 하지만 먼저 ‘나’가 있고 그리고 ‘가족’이 있다. 이들에게 집은 ‘적정 행복’의 장소일 뿐이다. 따라서 탈며느리, 탈시부모를 선언한다. 부부 사이엔 동반자적 의식을 지니면서도, 개인의 취미와 성취를 중시해 자기계발에 열심이다. 밀레니얼 세대에게 이제 가정은 절대적인 희생을 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대충 만족할 수 있는 ‘적정행복’의 장소로 변화되었다. 앞으로 교회도 충성을 다하는 신앙의 장소에서 적정행복의 장소로 변화될 것이다. 가급적 교회는 건물을 이웃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교인들은 한 주에 한번 예배를 드리고 친교하며, 나머지 시간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9) As Being Myself(그곳만이 내 세상, 나나랜드) 흔히 한국 소비자들은 타인지향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왔지만, 이제 자기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따라서 남의 눈길은 중요하지 않다. 나만의 시선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다. 라라랜드(로스앤젤레스의 별명이자,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를 의미)가 꿈꾸는 이들의 도시라면 ‘나나랜드’는 궁극의 자기애로 무장한 사람들의 땅이다. 나나랜더에게 타인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오로지 나의 기준이 모든 것의 중심이다. 탈 규범화에 익숙한 이들은 기존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관에 반기를 든다. 넉넉한 체형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최고의 모델로 등극하고, 40대 여성이 아이돌 팬으로 ‘입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곳, 바로 나나랜드다. 나나랜드를 찾고 있는 이들은 ‘다름’에 대한 수용력과 타인에 대한 인정과 이해 또한 높다. 자연스레 개개인의 다양성을 중요시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이나 획일적인 규범을 거부한다. 나나랜드는 진정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정착한 기회의 땅인 것이다. 교회가 이제 라라랜드에서 나나랜드로 변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라질 것이다. 10) Manner Maketh the Consumer(매너소비자) 최근 조사 결과, ‘노쇼(No-Show, 식당 등에서 예약하고 나타나지 않는 손님)’로 인한 사회적 피해비용이 연간 8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소비자의 악의적인 갑질에 고통 받는 근로자들도 너무 많은 것이다. 유교적 전통에 기반한 뿌리 깊은 위계질서 문화가 갑질, 혹은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 이익을 얻기 위해 부당한 민원을 제기하는 악성 소비자로, 한국에서만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비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처럼 소비자의 비매너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근로자들의 ‘감정노동 보호’ 논란도 심화되고 있다. 고객 만족을 위한 서비스 경쟁의 과열로, 기업이 근로자에게 고객에 대한 무조건적 맹종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근로자들은 심리적 부조화를 겪는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 Mask Syndrome, 숨겨진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건강에 큰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워라밸에 이어 근로자와 소비자 사이의 매너 균형을 도모하는 ‘워커밸(worker-customer-balance)’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세대 직원들의 이직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라랜드에 가고자하는 신세대 직원들은 더 이상 스마일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이다. 목사도 더 이상 감정노동에 혹사당하지 않아야 한다. 장로와 교인들이 사회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목사에게 푼다면 잘못된 것이다. 갑질하지 않는 목사와 장로, 매너 있는 성도가 교회를 새롭게 만들 것이다. 3. 돼지에 관하여 2019년 돼지의 해에 돼지가 재발견되고 있다. 고기 생산과 의학, 산업 연구는 많았지만 정작돼지란 동물 자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최근 동물행동학과 비교심리학 분야의 연구 성과는 우리가 몰랐던 돼지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돼지는 개나 어린아이와 비슷한 인지능력을 갖고 있으며 자의식이 있고 창조적 놀이를 즐기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과 다를 게 없다는 공감대가 퍼지고 있는 것이다. 기해년 돼지의 해에 타자의 아픔에 공감한 컨셉을 통해 나나랜드만이 아니라, ‘우리우리랜드’를 꿈꾸는 것도 한번쯤 괜찮지 않을까? ▲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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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7
  • [문화펼치기] ‘액괴’의 시대와 액체근대
    1. 액괴의 시대와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 요즘 딸아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 중 단연 으뜸인 것은 ‘액괴’이다. ‘액체괴물’의 줄임말이다. 액괴를 주무르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는가 보다. 액체는 형태가 없는 무정형의 물질이다. 물과 같은데, 쏟아지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이러한 부드러운 무정형의 물질을 갖고 노는데, 어른들의 세계는 지금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로 국가, 자본, 군사력, 경제력이라는 견고한 정형(solid)의 힘이 맞대결하고 있다. 현재 미-중 경제 대결이 유예되기는 했지만,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트럼프라는 기이한 인격의 소유자가 벌리는 일이 아닌, 그 이면의 다층적인 그룹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사IN>의 이종태 기자는 그 세력들을 이렇게 분석한다. “오래전부터 중국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를 주장해온 ‘보호무역파’, 관세 인상 자체엔 회의적이지만 중국의 무역 행위를 공정(fair)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유무역파’, 중국이 미국의 글로벌 패권과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는 ‘군부와 정보기관’, 중국산 수입품 때문에 일자리 보전에 위협을 느끼는 ‘노동조합’, 중국공산당의 여론 탄압과 불법적 인신 구속에 분노하는 ‘인권 및 환경운동 진영’까지 느슨한 ‘반중 연합’에 발을 걸쳤다.” 그럼 중국은 어떤가? 지금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그러나 중국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 인권 보장 등 미국이나 한국, 서구 유럽 등이 갖고 있는 민주적 가치가 없다. 특히 시진핑 시대 이후 중국은 ‘아시아 인프라 은행’,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고자하는 중국의 국가전략)’, ‘위안화 국제화’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미국을 꺾고 중국의 의지를 세계적 차원에서 관철시키고자 한다. 결국 미-중 대결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결이 아닌, ‘시장’ 자본주의인 미국과 ‘국가’ 자본주의인 중국의 자본의 힘 대결이라는 것이다. 이 대결에서 미국이 이기면 ‘팍스 아메리카’는 좀 더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중국이 버틴다면?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체제가 유지될 것이다. 혹, 이 전쟁에서 중국이 이긴다면 이제 ‘팍스 차이나’가 다가 올 것이다. 강한 것들의 전성시대가 날개를 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유동하는(liquid)’ 액체의 이미지를 통해 성찰한 사회학자가 있다. 현대성 이론의 대가인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그는 이론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수많은 주제들을 횡단하며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묻는다. 2. 액체근대, 그 유동성에 관한 우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삶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 불안, 자유, 빈곤, 도시, 공동체, 진보, 유토피아 등에 관해 살펴보며 근대를 “유동적 근대(liquid modern age)”로 호명한다. 쉽게 말하면 ‘액체 근대’라는 말이다. 근대성이 가진 특성이 액체성, 곧 유동성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우리가 겪는 불확실한 불안에 붙인 이름이며, 그 위협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식 불능성에 붙인 이름이며, 그것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력함에 붙인 이름’이라고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신비성을 액체근대라는 말로 제거해 버린 바우만은 『모두스 비벤디』(후마니타스, 2010)라는 책에서 액체근대의 5가지 특성을 잘 정리해 준다. 우선, 근대성이 ‘견고한(solid) 국면에서 ‘유동하는(liquid) 국면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나, 일상적인 일들과 용인될 만한 행동 양식이 반복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제도들과 같은 사회적 형태들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또한 그럴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여건으로 변해 버렸다. 둘째,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부터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권력과 정치가 한 쌍이 되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국민국가라는 한 가정을 공유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제 이들은 별거 상태로 이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셋째, 과거에는 개인이 실패하거나 불행해지면 공동체가 보호해 주는 국가 공인 장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이런 장치가 점점 일관되게 줄어들고 있다. 각자 도생의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넷째,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그리고 이처럼 파편화된 삶은 ‘종적인 사고방식(vertical orientation)’보다는 ‘횡적인 사고방식(lateral orientation)’을 조장한다. 사람들은 이제 각각의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다른 기회와 상이한 확률분포에 반응해야 하며, 그럴 때마다 다른 기술을 사용하고 자산을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오늘날 개인은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개인의 이해관계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선언되는 덕목은 규칙(여하튼 극히 드물고 종종 서로 모순적인)에 순응하는 태도(conformity)가 아니라, 그런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flexibility)이 되는 것이다. 인류가 고체처럼 견고한 사회를 지나 액체(유동적) 근대를 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자가 예측 가능한 사회였고, 공동체가 존속했던 시대였다면, 후자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이다. 전자의 사회에서 개인은 노동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노동 능력을 지니고 있는 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고체 사회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은 ‘노동’이었고, 설령 한 개인이 실직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노동능력을 상실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어 국가 또는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이 전 지구적으로 이동하는 유동적 근대 시대에 접어들어 상황은 변했다. 이제 한 개인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노동력이 아니라 소비력이며, 소비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개인들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차라리 없어야 하는 존재, 즉 ‘쓰레기’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3.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으로의 귀환? 위기의 때에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실패한 낙원으로 귀환하는 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나은가? 최근 출간된 유작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의 귀환』(아르테, 2018)에서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안이 없다며 아늑한 과거에만 머문다면 같이 공동묘지에 들어가는 일만 남을 뿐이다.” 어쩌면 ‘심리상담’과 ‘떡볶이’로 마음을 달래는 역사상 가장 우울한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또한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로 숨어드는 한 많은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에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진리 탐구자들에게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레트로토피아는 과거(레트로)와 유토피아의 합성어이다. ‘국경 없는 자본’, ‘영토 없는 통치’를 통해 지구화와 개인화를 실천하고 있는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한 조건 아래 놓이게 된 이들이, 분노와 절망에 내몰린 이들이, 유토피아에 대한 ‘이차 부정’으로 ‘이미 실패한 과거’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삼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사실 미래와 달리 과거의 기억은 친숙하다. 2016년 영국이 총선거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하겠다고 결정할 때, ‘브렉시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N. Farage)는 이렇게 외쳤다. “내 나라를 돌려 달라(My Country Back).” 2016년 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캠프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두 나라의 핵심은 “우리의 삶이 이렇게 망가지기 이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지구의 경찰국가 미국으로, 디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렇게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유는 그 속에 4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홉스로의 회귀’, ‘부족으로의 회귀’, ‘불평등으로의 회귀’, ‘자궁으로의 회귀’ 등이다. 먼저 ‘홉스로의 회귀’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으로 상징되는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주권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었다. 둘째 ‘부족으로의 회귀’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모순이 끝내 ‘나’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배제하는 ‘부족주의’를 다시금 부추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실 지금 들끓는 전쟁과 테러, 민족주의의 새로운 열풍은 이런 부족 회귀 현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셋째 ‘불평등으로의 회귀’는 ‘복지국가’ 정책의 실패 이후, 좌파의 복지, 평등을 비판하고, 급격히 확대되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며, 우파의 경제정책(경제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복귀를 내포한다. 마지막 ‘자궁으로의 회귀’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문화와 생활세계 속에서 갈수록 개인의 문제에만 침잠하는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들의 원천에는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에 내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트로토피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이다. 4. 기본소득과 초대교회 공동체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과거로 회귀하지 않고, 미래로 가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대화는 타인을 유효한 대화상대로 바라보고, 외국인, 이주자, 그리고 다양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존중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대화를 만남의 한 형태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공정하게 반응하는 포괄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합의와 동의를 구축하는 수단’을 창조하는 데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긴급히 동참시켜야 한다.” 그럼 대화만 하면 될까? 대화 이전에 대화가 가능할 전제 조건은 없을까? 바우만도 그것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유효한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고 대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이 부합되어야 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인정한 평등한 지위’의 보장, 곧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정한 경제모델이다.” 쉽게 말하면 경제적 균등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균등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우만은 ‘보편적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파국을 향하는 흐름을 뒤집으려는 투쟁에서 유례없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곧, ‘보편적 기본소득’에 담긴 철학은 과거 지구화·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끝내 실패해버린 ‘복지국가’의 기반을 뒤집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자, 이제 교회부터 시작해 보자. 교회의 모든 헌금을 ‘종교국(이름은 어떠하든 상관없다)’으로 모은다. 그리고 종교국은, 목회자의 사례는 가족 수에 비례해서 지급하고, 교회 운영비는 교회 규모에 맞추어 지급한다. 그 외 남는 모든 금액은 그 교회가 속한 마을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본 소득으로 쓴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할 것이다. 거짓말 말라고? 사도행전에 이미 시행되었고, 나와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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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2
  • [문화펼치기] ‘외로운 늑대’의 분노와 악의 발생사
    1. 영화 <암수살인>과 외로운 늑대 영화 <신과 함께>에서 저승사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배우 주지훈이 영화 <암수살인>(2018)에서 삭발투혼까지 감행하며 살인범의 연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신고도, 시체도, 수사도 없기 때문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을 암수살인이라고 하는데, 2010년 부산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영화의 첫 장면, 자갈치 한 식당에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 분)는 형사 김형민(김윤석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태오가 적어준 7개의 살인 리스트를 보고 직감적으로 사실임을 감지한 김형사는 “이거 못 믿으면 수사 못한다.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라고 말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사실 태오가 추가 살인한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이고, 김형사는 태오가 거짓말과 진실을 교묘하게 뒤섞으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수사를 포기 하지 않는다. 부족한 증거로, 또한 공소시효가 끝나버리면 18년 형을 살고 나와도 50세가 되어 또 다시 살인을 할 태오를 잡고자 김형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김형사는 증거와 증인으로 태오의 범죄를 밝히고 태오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지만, 융악하고 교활한 살인범 태오는 감옥에서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태오는 왜 그랬을까? 왜 사람을 죽이고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악의 화신으로 남았을까? 어릴 때 50세 남성을 죽였다는 첫 번째 태오의 자백 리스트에 답이 있다.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당하는 남매, 그리고 중 3때 그 아버지를 죽인 태오와 그것을 모른 채 하는 고 2인 누나. 아버지의 폭력은 아들에게 유전되어 마침내 어른이 된 태오는 아버지와 같이 폭력을 휘두른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애인을 살해하고, 이어지는 행인과의 조그마한 마찰에도 살인을 계속한다. 그리고 풀려나고자 김형사에게 자신의 범죄를 말하며 증거불충분으로 감형, 혹은 무죄를 선고받고자 한다. 사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 정서이지만,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행위는 통상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잇따르고 있다. 2012년 서울 여의도 흉기 난동사건, 2014년 울산 버스정류장 살인사건, 2016년 서울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올 2018년 10월에 발생한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부산 일가족 피살사건, 경남 거제의 폐지 줍는 여성을 젊은 청년이 살해한 사건 등은 분노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가해자 대부분은 대인관계가 원만치 않은 ‘외로운 늑대(lone wolf)’유형이라고 한다.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아둔 화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폭력과 살인의 발생사, 곧 죄라는 것이 그저 악한 행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육과 도덕적인 갱신(나아가 약물을 통한 치료와 뇌구조 변경까지)을 통해서 교양을 증진시키고, 사회전체를 잘 정비된 법률로 통제하며 관리한다면 될 것이다. 그러나 태오는 감옥에서 종교적으로는 반야심경을 암송하고, 교육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며, 역설적으로 법에 의해 무죄를 선고 받고자 한다. 법과 교육(종교까지)의 무용성을 잘 보여준다. 주변을 둘러보라. 지금 우리의 삶, 사회 환경, 그리고 국제 정치와 인류의 역사는 폭력과 이기심, 살인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죄는 마르지 않고 폭포수처럼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비약은 있겠지만 영화 <암수살인>은 기독교 시각으로 보면 악의 실체와 발생사, 곧 원죄에 관한 영화이다. 2. 악의 실체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문제를 네 가지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 도덕적, 심미적, 그리고 종말론적 관점이다. 먼저, 존재론적 관점에서 악은 비존재요,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라, 다만 존재와 선의 결핍 상태이다.” 곧, 악이란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자기완성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결핍)의 상태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다. 태오의 환경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Omnis natura bona est)”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좋았다는 것, 본래 악을 창조하지 않으신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기는 하나, 이러한 악의 존재론적 이해는 역사 안에서 체험한 악의 실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태오의 잔인성과 교활함은 단지 선의 결핍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안에서 체험하는 악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번째로 악의 도덕적 관점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선한 의지의 결핍, 즉 악한 의지(voluntas mala) 또는 ‘탐욕(cupiditas)’이다. 곧, 악의 문제를 인간의 내면성에서 찾아 악을 도덕적, 경험적으로 선한 의지의 결핍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로써의 악이 있다면 그것과 상관없는 자연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악은 인간의지의 왜곡이요, 자연악은 그 결과이다. 전자는 죄요, 후자는 죄에 대한 벌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은 죄이든지 혹은 죄에 대한 벌이든지 그 하나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역사관’이 나오게 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처럼 줄거리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 세계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여 ‘공간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인간 역사의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시간적 조화’를 이루어 나가면서 최후의 완성을 향해 진행해 나간다.” 따라서 공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 악의 문제는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이, 시간적인 조화의 측면에서는 네 번째 ‘종말론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세 번째 심미적인 접근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밑에서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위에서, 곧 창조자의 견지에서 전체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를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게 될 때 악으로 보였던 부분도 결국 전체적인 조화와 미에 공헌하는 요소들이 되고 만다.” 놀라운 통찰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검정색(만약 이것을 악이라고 한다면!)’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는 것이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겐 악이 정말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만 아니라 당신이 창조한 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창조한 이 세계 밖에서 어떤 것이 침입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이 질서를 파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창조한 일부분이 다른 것들과 조화되지 않아서 악인 듯이 보여도 또 다른 것들과는 조화되어 좋게 되고 또한 그 자체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관점은 때로는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를 암시하듯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을 우주(공간의 차원)에 적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곧, 시간과 역사 안에서 행해지는 인간의 악도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로 인도되어 결국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에 대한 종말론적 접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전능하신 자는 그것 때문에 자기의 뜻을 성취해 나가시는데 고난을 느끼지 않으신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악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 밖에 있을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의식적, 무의식적 행동과 생각까지도 이용하여 자기의 뜻을 수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악용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신다.” 태오에게 면죄부를 주어 희생자의 울음이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리요강』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하나님은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보다는 악에서 선을 이루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셨다.”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서 역사의 미와 조화를 이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것이 『신국론』의 핵심이 된다. 이 세상에는 ‘신의 나라(Civitas Dei)’와 ‘세상나라(Civitas mundi)’가 서로 얽혀 있지만 결국 신의 나라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나라는 이 세상나라에 참여하여 세상나라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의 아름다움이 그 그림 속에 잘 표현된 그림자에 의하여 더 미화되는 것처럼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겐 이 우주의 미는 악을 행하는 죄인들에 의하여서도 더 증진된다.” 결국 『신국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종국에 가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악을 제어하시고 시간적이고 유한한 악으로부터 영원하고 무한한 선을 이룩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악의 문제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결이다. 태오가 자살함으로 악이 제어된 것인가? 아니면 무기징역을 선언함으로 정의는 구현된 것인가?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해자의 사체를 찾기 위해 낙동강 생태공원의 아름다운 갈대밭을 수첩을 들고 걸어다니는 김형사의 모습은 어쩐지 씁쓸하다. “오지희, 어디있노? 니!?” 3. 악의 발생사: 원죄 따라서 김형사의 씁쓸한 모습의 원인은 악의 발생사로 ‘원죄(原罪)’를 논할 때 이해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자신의 저작 『고백록』에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이 된 원죄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원죄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죄인인 아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자신의 성품을 유전시켰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아담과 동일시하기에, 아담과 인류의 관계는 유대관계(또는 연대관계)이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로 인류는 출생시 ‘죄의 총체(messa peccati)’에 가담한 실제적 죄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받는 ‘구속된 총체(messa redmata)’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의 보편성의 원인을 ‘육체의 유혹’으로 보지 않고, ‘의지의 전도(the pervision of will)’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치유의 방법도 ‘은총의 절대성’뿐이라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원죄는 단순한 죄책이 아니라 실제적인 죄이고, ‘모방(imitation)’이 아니라, 출산에 의해 생성되며, 원죄의 결과로 개인들에게는 무지, 육욕, 죽음이 초래되었다고 한다. 반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유아는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원죄는 아담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이러한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 곧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으로 제거될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자유란 선을 선택하고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결코 이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지는 포로가 될 것이므로 죄짓는 용도 외에는 쓸모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도우시는 조치로 해방되지 않는다면, 의를 행하는데도 쓸모가 없다.” 사실 죄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은 인간의 의지를 왜곡시켰고,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었으며 육체에 굴복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을 부어 주시어 믿음으로 무지를 정복하고, 사랑으로 자기중심을 대체하고, 소망을 통하여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영화로 시작했기에 영화로 결론을 내려 보자. 태오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했으며 왜곡된 의지로 진리에 눈멀고, 육체에 굴복당한 것이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구속된 총체’로 가기엔 선의 결핍이 너무 심했던 것인가? 아니면 멸망할 바벨론 성이었기 때문일까? 답은 태오가 김형사에게 그토록 사주기를 바랬던 변색안경(선글라스)에 있다. 실내에서는 그냥 도수 없는 안경이지만, 실외에서는 빛을 차단하는 선글라스가 되는, 그 안경 말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태오가 안경을 갖고 싶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해준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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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 [문화]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29:8-9) 1. 거짓말 천국 지금 세계는 탈세계화(후기-지구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국의 유럽연합탈퇴(Brexit)와 미국 트럼프 시대의 개막은 보호주의적 패권과 국민국가적 배타주의의 표상으로 소통과 교류와 연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시되고, 세계는 이제 끝없는 이기적 욕망의 지평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보호무역주의와 국가적으로는 대외고립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민자와 교역 상대국에 대한 적대의식을 감정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주체의 욕망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실과 사실은 폄하되고, 거짓과 사이비가 그 욕망의 헛된 전망을 정당화시킨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으며 독일언어학회도 ‘탈사실(postfaktisch)’을 2016년의 독일어로 뽑았다. 바야흐로 탈세계화 시대는 탈진실의 사회를 이끌며 ‘거짓의 시대’를 개막시킨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2018년 10월 5일 재판부는 횡령, 뇌물 등 16가지 혐의로 구속기소 된 이명박 전대통령(이하 MB)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130억 원을 선고했다. 정계 입문 이래 20년 이상 국민을 속여 온 MB의 대국민 사기극이 이제야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MB의 죄질이 박근혜 전대통령보다 더 나쁜 이유는 다스가 ‘법인화된 최순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신교 장로로서 거짓말을 하였고, 신앙으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는커녕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범행과 책임을 전가한 파렴치범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거짓(false, lying)을 ‘하나님보다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본다. 이러한 거짓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인 우상숭배, 복술, 주술과 관련해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속여 예언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렘 29:8-9). 구약성서는 거짓 고소와 거짓 증거에 대해 경계의 대상으로 여긴다. 신약성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짓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다. 십계명의 8계명도 이렇게 선포한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교회, 목회자, 개신교 단체에 이르기 까지 온 세상이 거짓말 천국이다. 2. 가짜뉴스(=허위정보) 가짜뉴스(fake news)는 2010년 중반에 등장했다. 최근 국내외 학계에서는 가짜뉴스라는 말 대신 ‘허위정보(disinformation)’로, 혹은 ‘거짓정보’로 용어를 변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가짜뉴스에서 풍기는 ‘그래도 언론적 행위’라는 이미지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허위정보’가 100% 가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이 함유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90%의 내용이 사실인 경우도 있다. 사실에 근거해야 일반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위정보’는 인과관계를 허위로 만들어내고 별개 사실들을 자의적으로 결합하여 결론을 비틀어 버린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에스더 기도 운동의 실체를 파헤친 <한겨레 신문> 탐사팀 김완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스더 기도운동은 동성애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고, 난민을 범죄와 연결지으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가짜뉴스들을 만들고 배포했습니다. 애초 탐사팀의 에스더에 대한 관심은 태극기 집회에 등장한 이스라엘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깃발을 추적하다 에스더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론 속에서 그들은 세상과 ‘영적 전쟁’을 벌일 ‘인터넷 사역자’를 모집해 ‘지저스 아미’(Jesus Army=하나님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기가 바로 비틀어진 사실, 가짜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의 군대’, ‘십자군’이 아니라, 십자가가 필요한 시대이다. 개신교 단체의 ‘거룩의 지나친 잉여’가 ‘폭력의 과도한 풍성함’을 낳은 것이다. 2017년 8월 빌리그레이엄 센터 사무총장인 에드 스테쳐는 ‘가짜뉴스 세상에서 진리의 사람 되기(Being people of Truth in a world of fake news)’란 글에서 ‘가짜뉴스 대응법 4가지’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첫째, 당신이 확인할 수 없는 것은 공유하지 말라. 둘째, 진실함(integrity)을 지키라. 셋째, 당신이 공유하는 것이 사람들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지 확인하라. 넷째, 만약 당신이 문제의 일부라면 사과하라.” 가짜뉴스, 곧 허위정보는 영혼을 좀먹은 사탄의 음성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실을 왜곡할까? 건전한 보수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3. 무너진 보수주의, 극우로 치닷다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김현준 연구원은 한국 개신교의 극우 이념을 조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보수주의는 반공주의와 근본주의를 그 핵심으로 하는데, 최근의 극우주의는 반공주의에 동성애 혐오, 여성혐오(반여성주의). 이슬람․이주민 혐오(인종주의)를 ‘가짜뉴스’로 추가하며, 혐오와 차별 주장을 공공성 담론으로 포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현준 연구원에 따르면 보수 우익 개신교의 역사는 이렇다. 1단계, 1970-80년대 ‘국가조찬기도회 정치’를 시작으로, 2단계, 1990년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광장정치’와 기독당을 거쳐, 3단계, 2000년대 기독당과 기독교 뉴라이트라는 ‘전문적 사회운동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 4단계로, 2010년 전후 에스더 기도운동이라는 혐오와 차별 기반의 전방위적 세력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보수와 극우 개신교의 발생사적 근원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라고 한다. 김현준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 기독교의 극우 이념 중심에는 ‘독실한 크리스천’ 이승만이 있다. 이승만은 오늘날 보수 우익 정치 세력 전체를 아우를 뿐만 아니라, 에스더 기도운동 네트워크 세력을 비롯한 이른바 ‘극우’ 세력이 재발견한 보수 이데올로기와 국가론적 비전의 기원이다.” 사실, 보수주의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북진통일’로 규정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독교적으로 세운 인물로 추종한다. 그러나 극우 민족주의 개신교인들은 좀 더 나아가 한국이 미국처럼 애초에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다고 생각하고 한민족이 ‘이스라엘’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임을 부각시킨다. (물론, 이것은 말세론자들의 144,000명만 구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극우 민족주의 개신교인들의 믿음, 나아가 에스더 기도운동이 대중에게 유발시키려는 정서는 (정치적 주도권과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통한 여론의 동원이다. 곧, ‘대중의 절망과 좌절-사회적 공포-증오와 공격’이 극우주의의 출현 과정인 것이다. 말세론이 위세를 떨쳤을 때는 ‘증오와 공격’ 대신 ‘포기와 무기력’이었는데, 최근의 극우주의는 공격성 레벨이 강화된 것이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혐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종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촛불 혁명 이후 대중은 절망하기 않고, 희망으로 나가고 있다. 따라서 ‘대중의 절망과 좌절’은 ‘보수주의의 절망과 좌절’로 교체해야 한다. 아무튼 김현준 연구원은 이렇게 말한다. “극우 기독교 세력은 오늘날 저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사회적 소수자’ 때문이라고 선동한다. 그들이 만든 가짜뉴스가 그 혐오와 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는 셈이다.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는 현실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한국 사회의 극우화를 재추동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세리, 죄인, 창녀, 병자들과 같은 사회적 소외자와 소수자를 찾으셨는데, 한기총과 기독당, 기독교 뉴라이트 운동, 에스더 기도운동도 사회적 소수자를 찾는다. 그러나 다른 점은 예수께서는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료하고자 찾으셨지만, 이들은(물론,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진영은 거짓뉴스와 결별하고 진솔한 신앙과 복음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을 짓밟고자 찾고 있다. 4. 보편적 해방과 대안적 사실 ‘탈진실’과 ‘탈사실’의 시대가 이끈 ‘거짓의 시대’는 ‘진실의 죽음’을 가져온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윤리 상대주의(Ethical Relativism)와 다원주의(Pluralism)가 여기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토대였던 진리를 해체하였고 개인의 개체화와 익명화는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켰으며 인터넷 기술이 열어놓은 매체환경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만의 대안 사실을 믿는 분할된 ‘마이크로 공론장’을 만들어냈다. 중요한 것은 거짓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의 신뢰성을 잠식하고 공론장을 왜곡하는 것은 결국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나아가 소통과 교류와 연대가 사라질 때 세계는 다시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진리의 상대성으로 말미암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에 칸트와 헤겔을 통해 대안을 탐구하고 있는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보편적 해방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관점에서 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 지제크에 의하면 진실의 죽음은 3가지 경로를 통해서 왔다고 한다. 첫째, 종교적․민족적 근본주의의 부상 둘째,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의 유산이 그것이다. 첫째 근본주의자들은 합리적인 토론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는 데 유리하기만 하다면 가차 없이 데이터를 조작한다. 극우 근본주의자들의 예는 앞서 언급했으니, 좌파에 대한 지제크의 말을 들어 보자.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좌파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약자에 대해 부정적인 뉴스가 나오면 이를 감추려 들거나 그런 뉴스를 내보내는 매체를 ‘이슬람 혐오적인 인종주의’라고 비난한다.” 둘째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로 공동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온갖 음모와 주장이 아무런 제약 없이 유통이 된다(무수한 단체 카톡에 떠도는 허위 정보를 보라). 셋째 해체주의와 상대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팩트, 사실이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의견의 자유’와 ‘사실의 자유’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지제크는 ‘대안적 사실’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지제크의 말을 들어보자. “이른바 ‘데이터’라는 것은 방대하고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이해의 지평에서 데이터에 접근하며, 어떤 데이터는 특권화하고 어떤 데이터는 누락된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역사는 선별된 데이터를 엮어 일관된 서사로 만든 ‘이야기’지, 실제 일어난 일을 사진처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지제크의 생각을 신학적으로 적용하면 이렇다. 성서를 보되, ‘보편적 해방’과 ‘대안적 사실’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다. 성서의 무수한 이야기들은 보편적 해방의 사건이며 그 사건의 진술은 대안적 사실인 것이다. 오늘 가짜 뉴스에 빠진 근본주의자들은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자신들만의 디지털 미디어를 통하여 ‘우리는 역사적 제약에서 한 발짝 벗어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상대주의의 인식론에 기반 하여 오히려 자신들만의 정당성을 위하여 거짓을 퍼뜨린다. 거기에는 보편적 해방도 없고 대안적 사실도 없다. 쉽게 이야기해보자.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는 세상! 생명이 생명답게 인정받는 세상! 그들에게는 그러한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생명 되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아주 간단한 보편적 해방의 관점이자, 이 불의한 세상에 대안적 사실이 된다. 일찌기 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이렇게 말했다. “사유는 세상의 속도보다 더 빨라야 한다.” 그렇다. 그래야만 세상 안에 팽배한 악의 세력들과 그나마 겨우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참된 신앙의 길은 ‘치열한 사유’와 ‘뜨거운 실천’에 있을 것이다.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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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5
  • [문화펼치기] ‘1984’에서 ‘멋진 신세계’로?
    1. 인터레그넘 시대의 불안 21세기 현재 세계화 시대를 가리켜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터레그넘(interregnum, 최고지도자 부재기간)의 시대라고 말한다. 성서의 역사 가운데는 출애굽(과 사사시대까지) 시대로 볼 수 있다. 로마법에서 사용된 일종의 권력 이양기를 뜻하는 용어로 ‘지금까지 통치하던 왕이 사망했는데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기간’을 의미한다. 애굽왕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왕(사사, 혹은 사울과 다윗 왕 등)이 나타나기 전까지 일종의 체제 변화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변화, 혹은 권력 이양기가 현재 세계화 시대에는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화는 영토, 국민, 주권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중심의 질서를 해체했다. 세계시장과 자본권력이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와 국민의 주권적 힘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인터레그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 혹은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은 묻지 않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죽어가는 것처럼 조장하는 현상, 부동산 과열문제, 교육 현장 붕괴 및 학벌 사회의 문제 등에 관해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불합리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국가의 제도는 물론, 국민의 주권적 힘은 이를 마냥 쳐다만 보는 기이한 현상에 놓여있다. 인터레그넘 시대에 사람들은 저 창밖으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불안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의 지적 유산을 계승한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은 『불안들』 (후마니타스, 2015)에서 세계화 시대, 혹은 후기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탈근대적 주체들의 불안을 분석하며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불안이란 주체가 사회적 기대와 관련해 겪는 내면의 동요이다.” 명확한 현실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가 광기에 빠져 (가짜 뉴스는 이 광기의 시작이다) 이상한 비상식을 권유할 때 주체는 탈근대(획일성이 사라진 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동요를 겪는다는 것이다. 사실 미디어는 끊임없이 위험들을 경고하고, 언론은 불안을 고조시켜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제약회사들은 온갖 항우울제를 팔아 번창하고, 기업들은 쇼핑으로 불안을 가라앉히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자본주의적 모더니티의 절정인 19세기의 파리를 “판타스마고리아의 수도”라고 불렀던 것의 귀환이다.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환영 또는 환상)는 카메라가 발견되기 전, 다양한 환영들을 볼 수 있는 기계인데, 벤야민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런 기계장치에서 현실의 사회적 과정을 분석하며 당대의 현실을 비판한다. 가령,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환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가에 주목하고, 환영 이미지를 생산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본 권력(과 결탁한 언론 권력)이 평범한 일상과 상식적 인간에게 판타스마고리아를 주입하여 구별짓는, 구별짓기의 발생사를 파헤치는 일이다. ▲ 1984의 빅브라더 2. 자본(언론) 권력의 구별짓기 네가지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새물결, 2005)에서 4가지 자본을 소개한다. 곧,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으로 나눈다. 사실 부르디외는 발터 벤야민과 유사하게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자본논리(경제자본)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물론 경제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힘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문화자본은 가정환경이나 가정교육을 통해 개인에게 내면화된 고급스런 취향 및 언어능력, 인지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위나 학벌이 여기에 해당 된다. 곧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둘째, 사회자본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상징자본, 곧 사회관계자본은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다. 곧, 서울대 출신이나 판사, 검사, 의사처럼 실제 가치보다 높이 평가되고 과도하게 명예, 위신을 누리게 해 주는 상징적인 힘(정당화 메커니즘)을 뜻한다. 물론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이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가 경제자본인 돈만으로 위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이 되며 상류계층이 하류계층과 자신을 구별하는 구별짓기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신흥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Habitus,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인간 행위를 상징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한다. 이러한 아비투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이다. 즉, 아비투스는 복잡한 교육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 특히 미적 취향을 공유할 수 없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미적 취향이 상류사회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 곧,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흥부자들은 겉으로는 상류계급의 미적취향을 끊임없이 흉내 내려고 노력한다.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하류계급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지금은 아니지만)골프나 고가의 외제 승용차, 핸드백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따라서 명품 차와 가방이 아니라, 종의 형체를 지니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구별짓기라는 것을! 그러나 오늘날 미디어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라, 미디어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따르라 한다. 상류층을 모방하도록 조장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열등감을 심어준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옷을 입은 것이다. ▲ 멋진 신세계 책 3. 『1984』와 『멋진 신세계』 미디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로 마샬 맥루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닐 포스트먼은『죽도록 즐기기』(굿인포메이션, 2009)에서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에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주도의 ‘쇼비즈니스 시대’는 인쇄매체 시대에 가능했던 이성적인 사회적 담론이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한 포스트먼은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 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닐 포스트먼은 조지 오웰보다는 앨더스 헉슬리가 옳다는 입장이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외부적 압박)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한다. ‘1984’에서 우리는 외부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정보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통제로 인해 문화가 감옥이 될까 두려워했다.” (영화 <1987>은 이런 맥락에서 『1984』와 통한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차고 넘쳐 나는 정보와 지천에 깔린 오락거리로 인해 사고능력이 저하된 수동적인 존재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굳이 서적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지나친 정보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 봐 두려워했다. 서구 민주사회가 춤추며 꿈길 속을 헤매다 스스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나란히 속박 당하게 되리라 확신했다. 모순에 무감각하고 기술이 주는 재미에 중독된 대중에게 아무 것도 감출 필요가 없음을 간파했다.” 사실 디스토피아(dystopia)는 유토피아(utopia)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기에, 디스토피아는 ‘어두운 미래 또는 현실’이 된다. 커지는 빈부격차와 취업난,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 해법이 보이지 않는 교육·부동산 문제 등을 배경으로 아이엠에프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문화 콘텐츠와 담론에서 디스토피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어려웠지만 앞날에 대해선 낙관적이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물론 고통스러웠지만)의 역동감 있는 문화 콘텐츠와 상반되는 문화적 흐름이다. 포스트먼에 의하면 디스토피아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체제 디스토피아, 인간 디스토피아, 문명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체제 디스토피아는 ‘개선이 거의 불가능한 억압적인 체제’와 관련된다. 국가와 거대자본은 물론이고, 실생활에서 고통을 느끼는 모든 분야가 그 대상이 된다. 인간 디스토피아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과 환멸로 인한 디스토피아이다. 미시적이나, 사회 발전과 문명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문명 디스토피아는 현대 문명의 비관적인 전망과 연관돼 있다. 기후변화,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 새 전염병, 외계인의 습격 등이 단골 소재가 된다. 지금 우리는 ‘체제 디스토피아’의 위기를 간신히 넘어 인간 디스토피아와 문명 디스토피아로 넘어가는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84(우리에겐 ‘1987’과 ‘촛불혁명’)을 넘어가지만 멋진 신세계가 이상하게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불행한 디스토피아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연민이 창밖으로 기어들어오는 불안의 뒤를 잇기에 아직 우리 인터레그넘 시대는 희망이 있다. 4. 연민, 구원의 세례 요한 정치 철학자인 시카고 대학 마사 누스바움 교수는 주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 십계명’을 작성한 바 있다. 1. 생명(life): 정상적인 수명까지 살 수 있을 것. 2. 신체적 건강(bodily health): 좋은 건강에는 적절한 영양 공급, 적절한 주거, 건강한 재생산 기능을 포함한다. 3. 육체적 완전성(bodily integrity): 자유로운 장소 이동, 주권자로서 취급될 신체적 경계선을 지킬 것, 즉 성적 학대,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가정 내 폭력, 성적 만족과 임신의 문제에서 선택권을 가지는 문제를 포함하여 폭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 것. 4. 감각, 상상력, 사상(senses, imagination and thought): 상상하고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는 감각 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길이고, 이 길은 적절한 교육에 의해서 길러지는 것이며, 결코 문자 위주의 기본적인 수학적, 과학적 훈련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5. 감정(emotions): 자기 자신의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질 것, 우리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것. 6.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 선 관념을 형성하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는 데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여할 수 있을 것(양심의 자유 포함). 7. 협력 관계(affiliation):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고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고 인정하며 여러 형태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참여할 것. 8. 자연적 환경(other species): 동물, 식물, 기타 자연 세계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 것. 9. 놀이(play): 웃고, 놀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것.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정치적으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정치적 선택에 효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물적·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 기회를 통해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을 것. 여기서 연민에 관해 중요한 인간의 기능적 능력은 4~7계명이 된다. 감각과 감정을 통하여 실천 이성으로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기능이자 연민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하게 누스바움은 연민이 발현되기 위한 조건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 상대방의 고통이 충분히 심각한 것이어야 한다. 둘째, 그 고통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유발된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고통이 나의 삶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야 한다. 넷째, 그 사건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연민의 발현을 방해하는 세 개의 병리학적 감정에 대해서도 누스바움은 “첫째, 수치심은 자신의 잘못된 감정에 빠져 그가 자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둘째, 질투는 타인의 성취에 눈멀어 타인의 상실과 슬픔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셋째, 혐오감은 우리와 그들을 임의적으로 갈라 그들을 증오하도록 만든다.”라고 말한다. ‘나의 삶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타인이 다른 타인에게 끼치는 충분히 심각한 고통’(가령, 이웃집에 강도가 들어 우리 집도 안전하지 못할 때)에 대해서 우리는 연민을 느끼지만, ‘수치심과 질투, 그리고 혐오감’(가령, 이웃집 사람에 대한 관계)은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민만 있고 공정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며 남을 돕지 않을 것이요, 공정하나 연민이 없으면 타인을 위할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정과 연민은 양립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연민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즉 이성과 공감이 함께 작용할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많은 이들이 연민을 상실하고, 판타스마고리아에 빠져 살고 있다. 연민의 구원 열차가 지금 ‘1984’를 넘어 판타스마고리아의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기적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다. 출애굽의 목적이 가나안이었다면, 가나안에서의 삶의 목적은 연민과 공정의 평등 공동체였다. 이것을 상실한 이스라엘은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고통을 받았다. 올바른 목적이 없을 때 그 고통은 이토록 심각하건만, 우리는 이 과도기 시대에, 인간과 문명 디스토피아 시대에 목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정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어린왕자도 이렇게 충고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똑같이 급행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지만 무얼 찾아가는지는 몰라. 그러니까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고 제자리만 빙빙 돌고 하는 거야.”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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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0
  • [문화] 당신들의? 우리들의! 대한민국
    1.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칩니까?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의원에 관해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원래 노회찬이라고 그럴 때 그게 노나라 노(魯) 자예요. 그 노나라가 공자 나라라고요. 그래서 노회찬을 항상 보면 공자같이 생겼다. 사람이 너그럽고 좀 품위가 있게 넓게 생겼잖아요. 참 공자 같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내가 항상 했고. 회(會) 자라는 게 항상 사람을 모은다 그런 의미겠거든요. 이문회우(以文會友)라든가 그런 우리 동양의 고전에도 그런 말들이 많지만. 사람을 주변으로 잘 모으고 그리고 그들을 아주 설득시키는 데 귀재고.” 노나라의 공자와 같이, 진보 정당의 원내 정당 진입을 위해 힘써 왔고, 그럼으로 약자들의 목소리가 법을 통해 제대로 대변되기를 힘썼던, 그렇게 사람들을 모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도올 선생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이 말이죠. 우리 시대의 예수라고 생각했어요.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라는 사람은 입 뻥긋 하면 다 비유였다 그러거든.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든가 겨자씨의 비유라든가 수없는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비유라든가 이 모든 그 수많은 비유를 쓰는 데 사실 달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를 못하고 그게 무슨 하늘의 무슨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데 예수가 그 비유의 달인이었다는 의미는 예수가 바로 ‘민중의 언어’를 쓸 줄 알았다는 거예요.” 촌철살인의 비유, 오늘날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면 울고 갈 비유들이 노회찬 의원의 입에서 나왔다. 가령, 문재인 정부의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에 노의원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정확한 얘기죠. 아니, 동네파출소가 생긴다고 하니까 그 동네 폭력배들이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 거죠.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2. 모기들의 대한민국, 번아웃 당하다!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사, 2014)에서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이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사라져가는 곳’이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유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라고 말한다(물론, 이것은 촛불혁명 이전의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촛불혁명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러한 모기들의 대한민국에서 인간들은 번아웃 당한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모든 에너지가 소모돼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쉽게 말해 완전한 소진을 의미한다. 대체로 능력을 인정받고 근면 성실한 사람일수록 일을 마다하지 않기에 번아웃에 빠질 확률이 크다. 이러한 번아웃은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문명의 질병’이다. 수익 갈증에 따른 고강도 생산체제, 늘어나는 노동시간, 갈수록 심화되는 무한 경쟁,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와 피로는 현대인을 방향 상실로 몰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번아웃은 인간과 노동이 맺고 있는 풍요로운 관계를 앗아가고, 그 자리에 의미 상실이라는 커다란 공백을 남겨 놓는다. 단순히 고된 노력에 대한 성취감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일에 대한 의미마저도 파괴하는 것이다. 사실 명예는 빼더라도 ‘권력과 황금’의 곁에 다가서기 위해, 이 과열 시스템에 동참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로와 추락으로 내몰리고 있다. 왕 모기들은 번아웃으로 노동자들을 탈진시키고, 더 나아가 해고시킨다. 아직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 100여명을 복직시키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거스리지 않고 싶은 기업의 논리이다. 시인 노혜경의 말처럼, “1997년 현대자동차가 시작한 구조조정이 2009년 쌍용차로 완결되었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을 실망시키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는 대통령은 몰아낼 수 있어도 노동자를 복직 시킬 수 는 없다. 인간의 노동 대신 기계와 금융이 지배하는 산업구조에서 사람이 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왕 모기들에게 뜯기는 대한민국이다. 다시 도올 선생의 외침을 들어보자.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이 노회찬의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했는데, 그게 원어로는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생각을 바꾸라는 건 뉘우치라는 게 아니라, 너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좀 돌려라. 시각을 개조해라. 왜? 네가 개조하면 바로 천국이, 누구에게든지 천국이 온다. ‘kingdom of God is at hand’ 가까이 있다는 말이죠. 그거는 생각을 바꿔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사회 진보를 위해서 대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최저임금 문제든 모든 걸 다 해결됩니다. 정권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절대적으로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지금 이 대기업들의 횡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기들이 생각을 바꿀까? 회개할까?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쉬울 것이다. 3. 자유로운 기술과 행위, 그리고 협력 임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산물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기술’에 관해 ‘봉사적 기술’과 ‘자유로운 기술’, 두 가지로 구분한다. 봉사적 기술은 ‘물질적 산물의 생산과 관계하며 욕구에 봉사하는 기술’이다. 기계론적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학습과 반복적 연마를 통해 숙련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술의 가치는 생산의 유용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가령 장인적 기술, 수공업적 기술, 기계적 기술 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자유로운 기술’은 ‘목적을 그 자신 속에 가지며 그리하여 그 자체로서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는 기술’이다. 곧,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기술을 뜻한다. 따라서 칸트는 “예술의 목적은 물질적 욕구에 대한 봉사도 아니고, 어떠한 철학적 종교적 관념에 대한 봉사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기술이 꽃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첼로를 사랑했던, 그리하여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연주할 줄 아는 세상을 꿈꾸었던 고(故) 노회찬 의원의 미학적 정치의 멋도 깃들어 있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미적 예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합목적적인 표상 방식이며, 비록 목적은 없다 해도 사회적 전달을 위한 심의능력들의 문화를 촉진시키며, 이러한 미적 대상(표상)의 합목적성은 자의적 규칙들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어, 마치 순수하게 자연의 산물인 듯 보여야 한다.” 예술은 자유로운 기술로서 과학적 인식의 법칙과도 무관하며 심지어 회화의 기하학적 법칙과 음악의 수학적 법칙으로부터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적 예술은 필연적으로 천재의 예술이다. 천재는 예술작품을 통해 미를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취미가 미를 판정하는 능력이라면 천재는 미를 산출하는 능력을 가진 이다. 예술작품은 ‘자유로운 기술’의 소산이기에 천재는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 없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한다. 봉사적 기술이 요구되고, 노동이 소외되고, 인간이 기계화되는 이때 노회찬이 그리던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을까? 구약성서의 노동 개념 두 가지인 아보다(aboda)와 멜라카(melaka)는 각각 ‘봉사’와 ‘보내심’에서 유래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신에 대한 봉사’와 ‘신적 위임으로 보내심’이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적인 노동관인 ‘자연의 질서, 숙명, 고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인간이 그의 노동으로 참여하는 동역의 의미인데, 이러한 동역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에 위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20)” 하와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노동과 공동체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은 공동체 내에서 자기 동일성의 실현이 된다. 결코 타자와의 관계에서 경쟁이 아닌 것이다. 자유로운 기술에 기반한 협동과 공동 참여라는 노동,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가 아닌 공존과 돌봄이라는 노동은 언제 가능할까? 독일의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7)에서 노동과 작업, 행위 3가지로 인간의 활동 유형을 나눈다. “‘노동(labor)’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행하는 육체의 동작이고, ‘작업(work)’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일의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바라며 수행하는 제작 활동이며, ‘행위(action)’는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해 하는 행동이다.” 예를 들면, 직장에 다니는 목적이 단지 봉급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노동일뿐이며, 그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면 작업이 된다. 그리고 출퇴근 시간에 짬을 내어 봉사활동을 하거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를 놓고 시위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은 ‘노동’조차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노동이 행위로 바뀌기 까지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걸까? 『협력하는 종: 경쟁하는 인간에서 협력하는 인간이 되기까지』(한국경제신문사, 2016)에서 새뮤얼 보울스&허버트 긴티스는 이렇게 말한다. “협력에 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많은 실험 및 증거들에 의해 지지받고 있는 설명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거나 또는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타인의 협력에 무임승차해 이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처벌함으로써 기뻐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도덕적인 의무로 여긴다. 무임승차자들은 때때로 죄의식을 느끼며, 타인들에 의해 제재를 받을 경우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묶어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라 부른다.” 진화생물학과 진화게임이론 연구 결과, 사람들이 이타적 협력을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적 선호’ 때문인데, 이것은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선호란 사람들이 비슷한 심성을 갖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기쁨이나, 협력에 대해 느끼는 도덕적 의무감, 또는 협력에 무임승차한 사람들의 죄의식이나 제재를 받을 경우 느끼게 되는 수치심 등의 감정을 뜻한다. 사회적 선호가 확산될 수 있는 이유는 제도를 만들고 학습된 행위를 문화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공교육은 무너졌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남자의 일생’은 이렇다. 세 살 때는 신동, 예닐곱 살 때는 천재, 초등생 때까지도 수재, 입시 한두 번 겪으면 범부, 사회 나오면 둔재! 교육환경이나 훈련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인지능력과 성취감이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데, 제대로 된 공교육이 무너진 대한민국은 아직도 학과 점수에 아이들을 길들이고 있다. 그 결과 무임승차자들은 죄의식이 없고, 당당하다. 따라서 자유로운 기술을 통하여 행위하는 인간들의 협력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우리들의 대한민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4.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리들의 대한민국 박노자의 대한민국은 이렇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지 않는 나라, 학생들이 교수를 만날 때 노르웨이처럼 동등한 인간으로서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나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원조를 제공하는 일이 덴마크처럼 지성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나라,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 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실존적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인… (다시) 좌파의 길이다.” 현실 사회주의를 다시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른바 비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대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는 것이다. 자본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닌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만 있다면 못 이룰 것도 없다. 따라서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참사가 계속 일어나도 아무런 투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일일 것이다.” 서론에 언급했던 노회찬 의원은 그 길을 가다 넘어졌다. 그의 유언은 이렇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에 동지 하나를 잃고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이 올려지건만, 그리 힘들지 않음은 그의 웃음과 해학이 예수의 그 마음에 닿기에, 예수의 부활처럼 그도 부활하리라 생각하여 오늘도 당당히 앞으로 걸어간다. 노회찬 의원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향하여! ▲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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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3
  • [문화]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환대의 신앙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9)'
    ▲ 예멘 난민 생활모습 1. 예멘 난민, 제주도에 오다! 지난 6월 한반도를 의미 있게 달구었던 것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것도 아니고, 2018지방선거의 놀라운 결과(부산의 경우, 지방 권력이 교체되었다)도 아니다. 나아가 러시아 월드컵의 열기(한국이 세계랭킹 1위 독일을 2:0으로 이겼다)도 아니다. 바로 제주도의 예멘 난민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제주도 예멘 난민 수용이 사회적 화두로 확산되는 가운데 한국 국민 절반가량(49%)이 난민 수용에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발표됐다. ‘찬성한다’는 응답은 39%,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1.9%로 집계됐다(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6월 20일 전국 성인 500명을 상대로 조사,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 자기 집 근처에 자국민 장애아 교육시설이 들어오는 것도 반대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종교가 다르다고 매국노로 취급하며, 성정체성이 다른 이들을 혐오하는 이 대한민국에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난민을 반대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최후까지 나그네 된 자를 돌봐야 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일진대, 이러한 배타성과 거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현지인 대상의 절호의 선교 기회이자, ‘정착 골든타임(숙소와 일자리를 마련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3~6개월 정도의 기간)’을 놓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을 텐데!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전환, 그 골든타임에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새로운 시대의 화두인 환대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환대에 대하여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환대에 대하여』는 1980년 소위 세계화의 바람과 함께 세계 경제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와 국가 경계가 허물어진 초국가적 자본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한 이주민과 난민, 이방인과 타자에 관한 유용한 지침서이다. 그리고 예멘 난민(은 물론, 앞으로도 다가올 이주민, 나아가 탈북자와 통일 이후의 인구 이동에 이르기까지)을 통해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를 주장하며 나름대로 타자에 관한 우리들의 행동을 제안한다. 데리다는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여 논의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끊임없는 물음이 되기 위해, 즉 불편한 존재가 되기 위해 이방인을 자처한다. 그리고 이방인은 ‘우리(혹은 주체)’와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들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이방인은 우리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고, 토박이 집단에 혼돈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 혹은 타자는 동일성 철학의 구조 안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이질성으로 이해된다. 동일성을 파괴하는 오염이며 불편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예멘 난민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이슬람, 강도, 강간, 가짜 난민, 테러리스트 등)들은 바로 이러한 배타적 동일성 철학을 그 근저에 둔 배제와 혐오의 속삭임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러한 이방인에 관한 환대(hospitality)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먼저, 칸트(I. Kant)로 대표되는 ‘조건적 환대(초대의 환대, 선별적 환대)’인데, 칸트는 환대를 적대시 당하지 않을 권리, 보호를 요청할 권리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전제 위에서 논의 한다. 가령, 주권자는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환대의 권리를 수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대는 데리다가 보기에는 ‘조건적 환대’, ‘법에 근거한 환대’, 곧 ‘관용(tolerance)’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은 데리다에 의하면 권력자의 양보와 자비, 은혜 베풀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최강자의 논리’편에 서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데리다는 강자의 자비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관계를 만들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데리다는 관용을 극복할 윤리적 이념으로 ‘무조건적인 환대’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조건적 환대를 넘어, 두 번째 환대인 ‘무조건적인 환대(방문의 환대)’야말로 데리다에게 관용을 넘어선 진정한 환대이다. 이것은 조건 없이 방문자에게 문을 여는 것인데, 어쩌면 두려움을 동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손님으로서 주인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나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내 구역을, 나의 장소를 내어 놓아야 하는 일이 생길 때(지금 제주가 그렇다), 관용이 환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환대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실 신은 그 무조건적인 환대를 십자가 위에서 이루었다. 아들이 죽기까지 환대를 실천하셨던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환대의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칸트의 ‘조건적 환대’인 관용을 넘어서는 데리다의 ‘무조건적 환대(방문의 환대)’는 지극히 성서적이다. 따라서 종교적 환대라고 고쳐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적인 환대’는 이방인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굶주림이라는 단 한 가지 사실로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 가령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25-37)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3~46)”라는 예수의 말씀은 종교적 환대를 잘 보여준다. 3. 환대는 시적이다 그러나 아낌없이 주는 것은 환상이다. 따라서 환대는 환상이다. “환대는 시(詩)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데리다의 고민은 이를 잘 표현한다. 현실적인 환대가 아닌 이념의 환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무한한 윤리성’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데리다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그의 철학이 해체는 하나, 재구성은 독자의 몫으로 맡겨놓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이 종교(십자가 희생)로 넘어가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센 것일까? 그래서 데리다는 환대의 문제를 결국 ‘물음’에 관한 문제로 던져버린다. 그렇다면 환대는 어디까지인가? 데리다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가정 이야기를 인용한다. 두 천사가 롯의 집에 찾아오자, 소돔 남자들은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성관계)하리라(5절).”고 말한다. 그러자 롯은 두 딸을 음란한 소돔 남자들에게 내놓는다. 사사기 19장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한 노인이 자기 집에 찾아온 레위인 손님을 지키기 위해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찾아온 불량배들에게 내놓는다(24절). 그러자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삿 19:25-26절).”라고 한다. 밤새 강간당한 레위인의 첩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 장면의 의미를 더 이상 해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조건적 환대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환대의 법’을 만든 것은 가정의 폭군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놓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딸과 첩인 여성)을 내놓은 것은 환대의 이름으로 차별을 구현한 것이다. 따라서 환대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로 연결된다. 환대론 이후 『불량배들: 이성에 관한 두 편의 에세이』 (휴머니스트, 2003)에서 데리다가 파시즘적 국가 행태를 해체하려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데리다의 ‘불량 국가’ 담론은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미국의 일방적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 북한 등을 ‘불량 국가’로 규정했을 때, 노엄 촘스키 등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초법적 국제 테러 행위야 말로 ‘세계 최대의 유일한 불량 국가’라고 비판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데리다는 현존하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사실상 불량 국가이며 따라서 우리는 불량 국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리고 그들의 환대는 관용은커녕 차별을 곤고히 하는 악마의 속삭임인 것이다. 4.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와 용서의 한계 레비나스는 타자의 관점에서 내가 가질 수 없는 타자의 절대성에 대한 나의 순종적 태도를 이야기한다. 나의 자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절대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현실성이 부족하고 ‘피학적인 주체’를 말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이방인과 타자, 이주민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된다. 사실 레비나스는 ‘시간’이 아닌 ‘공간’을 사유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독특성을 지닌 유한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은 타자의 현존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잊혀졌던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이를 위해 레비나스는 ‘거주’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추스르고 휴식을 취하며 불안정을 유예하고 향유를 예비할 수 있는 곳’을 상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거주 공간에 환대를 통하여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이 바로 타자 윤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 내가 나에게 익숙하고 안락한 세계를 열고, 위험 부담이 있는 나그네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가 미래의 불안정을 덜기 위해 모아 놓은 노동의 산물과 향유의 대상을 나그네에게 내놓고 대접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레비나스는 ‘낯선 자가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자로 나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 낯선 자는 ‘무한자’이면서 가난한 자이다(역설적이게도!, 그리고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에 잘 나와 있다). 게다가, 사실 집 주인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거주지에서는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33~34).” 또한 레비나스는 ‘상처 입을 가능성(혹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vulnér-abilité)’을 ‘타자의 괴로움에 의해 상처받는 일, 타자의 비참함을 느끼는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정의한다. 사실 삶은 무수한 상처의 흔적들로 채워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의 자국들을 외면할 수 없다. 상처에 취약한 몸(을 지닌 인간)과 상처입기 쉬운 유기체(로서의 공동체), 그것이 곧 우리 삶의 흔적과 인간 존재의 관계성, 그 핵심이다. 그리고 그 흔적에 관한 해결책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초월’이며, 데리다가 물은 환상의 환대가 용서의 한계라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육화되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초월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용어는 아듀(adieu)이다. 어원적 의미로는 첫째, 타자와 만났을 때 하는 인사(축복) 둘째, 죽음을 포함해서 떠날 때 하는 인사(축복) 셋째, ‘신에게로 가다(à Dieu)’로 들 수 있다. 이 어원적 의미는 곧 ‘타자와 만남’, ‘존재의 타자로서 죽음에 직면’, ‘무한자에게로 초월’로 각각 상승(?)한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세 번째 의미인 신과의 만남은 오로지 첫 번째 의미인 타자와의 만남에 의존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곧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성은 나의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초월의 본질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따라서 내가 타자에 대해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다는 것과 내가 주체로 선다는 것, 마침내 내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는 이야기이다. 용서의 관점에서 보면, 용서의 한계는 초월의 이러한 의미를 깨달을 때 용서라는 말은 사라지고 타자에 대한 무제약적인 책임성만 남은 순수 종교의 형태를 요청한다. 지금 제주에는 예멘인의 모습으로, 당신의 집 앞에는 무엇인가(음식, 의복, 직장, 집 등)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보이는가? 바야흐로 환대의 신앙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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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6
  • [문화]디지털 시대 태초에 인간이 새로운 천지를 코딩으로 창조하시니라(코딩복음 1장 1절)
    “우주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물리법칙과 물리상수들로 코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체 역시 디지털 코드로 코딩 되어 있습니다.” (박준석,『세상을 만드는 글자, 코딩: 창의와 소통을 위한 코딩 인문학』동아시아, 2018) 1. 언어와 기호, 이미지의 세상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상 속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인식이 아니라, 희미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잘 보았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리고 이 희미한 환상 공간은 언어, 기호,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언어를 통해 상상하는 세계, 기호로 구성하는 세계, 이미지로 체험하는 세계 등. 실재의 현실은 ‘그때’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인식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주체(subject)’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이루어진 상징체계 아래로(sub) 던져진(jet) 존재, 즉 상징체계의 지배를 받는 (미셀 푸코 식으로 표현하면 사목권력 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와 같이, 군주의 지배를 받는) ‘신민(subject)’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체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서사(롤랑 바르트는 이를 ‘신화’라고 불렀지만)’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생산되는 신화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그 신화에 반응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가치는 그 신화들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징계를 벗어난 실재는 인식, 아니 표현 가능할까? 푸코적 ‘신민(subject)’을 벗어나 진정한 참된 ‘주체(subject)’는 가능할까? 아니 실재 현실을 제대로 이해는 할까?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1781)에서 인간이 지닌 이성을 비판했다. 우리 이성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우리 감각이 경험하는 것이 현상(phenomenon)일뿐, 물자체(Ding an sich)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도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상황들이 실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데카르트는 “악령이 나의 경험을 조작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한적이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이 감각하는 모든 것들은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과거로 가보자.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어떤가? 그는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자의 호접몽은 어떤가? 장자는 ‘꿈에 꾼 나비’를 통해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보았다. 영화 <매트릭스>(1999)는 초인공지능이 사람의 뇌에 디지털 데이터를 집어넣어서 사람들이 마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사람의 신체는 기계를 돌리기 위해 피를 제공하는 밧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보는 기호, 내가 경험하는 이미지는 진짜인가? 아니 무엇이 진짜인가? 아니 진짜는 진짜일까? 2. 코딩 창세기 코딩(coding)이란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컴퓨터에 내릴 명령을 말이 아니라 글자, 즉 코드(code)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컴퓨터는 1과 0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와 ‘컴퓨터의 언어’를 이어줄 언어가 필요한데, 이 중간 언어가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따라서 코딩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코딩의 핵심인 알고리즘(algorithm)이 필요한데, 알고리즘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순서 또는 절차를 말한다. 그 알고리즘을 컴퓨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코딩인 것이다. 인간의 단순 노동(계산)을 대신하는 컴퓨터, 그 컴퓨터에게 일을 주문하는 것이 바로 코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것이다. 코딩을 하는 것이다. 사실 코딩은 전 세계 아이들의 필수 교육과목이 되었다. 핀란드는 현재 4살부터 8살 아이들에게 무료 코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코딩전문학교도 생겼다. 영국에서는 2003년부터 코딩을 고등학교 이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있고, 2014년부터는 5살부터 16살까지 모든 아이들이 배워야할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미국, 중국, 일본도 중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코딩을 배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초등학교에서는 2019년부터 실과교과로 연간 17시간을 지정했고, 중학교에서는 2018년부터 연간 34시간이상 코딩을 배워야 한다. 아무튼 미래사회인 디지털 시대는 컴퓨터가 주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 언어인 코딩을 알지 못하면 미래 세상에서 소통을 할 수 없다. 서양의 고전어인 헬라어-라틴어가 옛날의 보편 언어였다면(그리고 영어가 오늘날 보편 언어인 것처럼) 미래의 보편어는 코딩이 될 것이다. 스마트폰은 물론 마트 계산대,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 인터넷쇼핑도 컴퓨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컴퓨터 사고력과 프로그래밍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사고력과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필수 수단이 될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코딩을 배워야 한다. 코딩은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코딩이 논리력과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양 과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비디오 게임을 사지만 말고 직접 만드세요. 휴대폰을 갖고 놀지만 말고 프로그램을 만드세요.”라고 말한다. 따라서 최근 강남 쪽 유치원 아이들이 라틴어와 코딩을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읽는 책 1페이지는 보통 25줄 정도가 들어간다. 하루 종일 집중해서 글을 쓸 때 30페이지를 쓴다고 가정하면 한 사람이 대략 750줄을 쓸 수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은 550만 줄의 글에 해당하는 글자가 살아 움직여 모니터 속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안드로이드 운영체계는 ‘1,200만 줄’, 윈도7은 ‘4,000만 줄’, 페이스북은 ‘6,200만 줄’, 놀라지 말라. 구글은 무려 ‘20억 줄’ 이상의 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코딩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기 스스로 구체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프로그래머들은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코딩할 수 있고 바로 제품으로 만들 수 있다. 프로그램은 미리(pro) 작성해둔 것(gram)으로, 컴퓨터가 읽도록 미리 작성해둔 글이 프로그램이다. 지금 디지털 시대 최초에 인간은 코딩을 통해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고 있다. 코딩 창세기가 개막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살아가는 현실이 코딩언어와 기호, 스크린의 이미지로 재생될 때 그것은 환상 공간인가? 실재 공간인가? 혹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3. 디지털의 영혼, 소스코드 소스코드(source code)는 원시코드라고도 한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 그 안에 들어가는 모든 동작의 코드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가령, 모든 제품에 설명서가 있듯, 디지털기기에 담긴 모든 내용을 컴퓨터 언어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 바로 소스코드이다. 소스코드는 소프트웨어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모든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공개될 경우 기업의 개발 기밀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이 소스코드를 보호하려고 한다(하지만 최근에는 오픈소스라 불리는 개방형 소프트웨어도 있다). 디지털 시대의 영혼은 바로 소스코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원자와 분자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와 분자를 알면 모든 물질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을 알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트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원자의 세계와 비트의 세계는 서로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비트 세계는 원자 세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인간이 작성한 코드도 결국 물리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코드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나 자기, 아니면 전파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비트의 세계는 이런 식으로 원자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코드는 전자회로 혹 전자들의 흐름을 제어하고, 나아가 원자들을 움직여 결국 프로그래머가 원했던 결과를 물리 세계에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크게 보면 ‘무생물’과 ‘생물’이 존재한다. 물, 바위, 지구, 별, 공기 같은 것들이 무생물이고, 박테리아, 꽃, 강아지, 사람과 같은 것들이 생물이다. 둘 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생명 현상, 곧 ‘생장, 생식, 진화, 자극 반응성’ 등 4가지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생물의 생명현상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다양성, 통일성, 연속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생물도 지능이 있는 생물과 지능이 없는 생물로 나눠진다. 나무나 풀과 같은 식물에는 지능이 없지만, 바퀴벌레, 강아지, 원숭이, 사람 같은 동물에게는 지능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디지털식으로 말하자면 소스코드의 유무로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무생물과 생물은 원자와 분자가 일정한 형태로 뭉쳐져 있지만 그 안에 소스코드가 없는 것은 무생물, 소스코드가 있는 것을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스코드는 카피 앤 페이스트(복사하기 및 붙여넣기)가 가능하다. 다양성과 통일성, 연속성을 통해 생장하며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돌멩이는 복사해서 2개로 만들 수 없지만, 나무는 번식을 통해 2그루로 만들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능은 무엇을 할까? 창조한다.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능이 만들어내는 것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하드웨어, 반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이다. 하드웨어는 책상, 의자, 망치와 같은 것이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만들어 낸 것들은 모두 하드웨어였다. 이것들은 내부에 소스코드가 없기 때문에 복사가 불가능하다. 반(反)하드웨어는 컴퓨터, 스마트폰, 전자회로와 같은 것들이다. 내부에 소스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를 보면 하드웨어와 같이 생겼다. 이러한 기기들은 모두 소스코드가 없는 하드웨어와 소스코드가 있는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제품들인데, 하드웨어에 내장된 소프트웨어를 쉽게 지우거나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하드웨어와 한 몸으로 취급된다(이것을 펌웨어, 말 그대로 딱딱한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순수한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 애플리케이션(앱, 응용 소프트웨어)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사람이 소스코드를 작성해서(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다. 자, 다시 인간의 지능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인간은 자신의 지능으로 반하드웨어인 인공지능과 소프트웨어인 가상현실을 만들어냈다. 물론 가상현실은 당연히 코딩으로 만들어졌다.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데이터양을 물리적 현실이 제공하는 데이터양만큼 늘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가상현실과 실재 현실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구성되는 세계는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제 영혼은 자신의 안식처로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4. 디지털 소통: 코딩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 글의 서두에 인용한 책에서 박준석은 이렇게 말한다. “비트 세계는 점점 현실 세계를 닮아갈 것입니다. 코딩을 모른다는 것은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과학 지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초에 신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디지털 세상은 이제 인간이 코딩으로 천지를 창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다. 성경은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소통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코딩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과학 기술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박준석의 다음의 말은 코딩을 통한 새로운 소통을 잘 보여준다.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프로그래밍 언어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고 있습니다. 코딩은 언어를 구사하는 지능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대치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은 컴퓨터를 통해 세상에 유의미한 형태로 출력됩니다. 그리고 컴퓨터끼리는 서로 디지털 언어를 매개로 소통합니다. 결국 지능은 언어를 낳고 언어는 코딩을 낳고 코딩은 통신을 낳았습니다.” 코딩계시록 22장 21-22절의 말씀이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코딩이여 오시옵소서. 코딩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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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8
  • [문화]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디테일(detail)이 없으면 스케일(scale)이 없다.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는 현재의 상태로는 (한국 교회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 (성북교회 육순종 목사) 1. 희생 시스템 20세기 초, 덴마크의 육군대장 프리츠 홀름은 ‘전쟁절멸보장 법안’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각국에 이런 법률이 있다면 전쟁을 없앨 수 있다. 전쟁이 터지면 10시간 안에 다음 순번에 따라 최전선에 일개 병사로 파견한다. 첫째로 국가원수 둘째로 그의 친족 셋째는 총리, 국무위원, 각 부처 차관 넷째는 국회의원. 다만 전쟁에 반대한 의원은 제외. 다섯째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종교계 지도자들!” 홀름에 의하면 전쟁은 국가 권력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며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자들부터 희생되는 시스템을 만들면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는 신선한 착상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북미정상회담이 남았으나, 한반도에 평화의 물결은 뒤돌릴 수 없는 ‘하수(아모스 5:24)’와 같이 되었다. 비록 분열을 조장하고 평화체제에 배 아파하는 이(나라)들이 있지만 그들은 곧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튼 홀름의 ‘전쟁절멸보장 법안’은 원전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야스쿠니 문제』등의 저작을 통해 ‘국가와 희생’의 문제를 파헤쳐온 철학자이자 도쿄대 교수인 다카하시 데쓰야는『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돌베게, 2013)에서 홀름의 제안을 원전 사고에 적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원자로의 방사능 누출을 막을 ‘결사대’에 총리(한국의 대통령), 각료(장관), 주무 부처 차관과 간부, 전력회사 사장과 간부, 원전 추진 과학자·기술자, 원전을 인구 과소지에 떠넘기고 전력을 써온 도시 사람들 순으로 파견해야 한다.” 따라서 데쓰야는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개념으로 원자력 발전의 후쿠시마와 미일 안보체제를 상징하는 오키나와 섬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사실 ‘후쿠시마’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어난 중대사고와 그 영향에 관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이다. 데쓰야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은 추진되는 순간부터 희생을 상정하며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타자에게 모든 희생을 떠넘기는 국가적 희생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오키나와도 마찬가지이다. 주일 미군 전용시설 면적의 74%가 집중된 섬인 오키나와는 국가가 지속적인 희생을 전가함으로써 ‘본토’의 평화를 유지해 온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 두 지역 ‘희생 시스템’의 구조를 통해 일본 사회가 구성된 것은 아닌지, 과연 경제 성장과 안보 같은 공동체 전체 이익을 위해 누군가 희생하는 시스템이 정당한 것인지를 데쓰야 교수는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핵발전소와 ‘성주 사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휴전협정과 휴전선은 남북 모두의 희생 시스템, 그 견고한 틀이었다. 이것이 남북 두 정상의 만남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다운 제자도의 삶은 어떤 것일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이 말은 주후 4세기의 유명한 수도사 텔레마쿠스의 말이다. 그는 원래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수도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은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리하여 텔레마쿠스는 그 당시 세계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갔다. 때마침 로마에서는 어떤 장군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서 축전이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원형극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였지만,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경기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기이다. 로마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마쿠스도 사람들 틈바구니에 싸여서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검투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황제 앞에서 인사를 하고,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서히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텔레마쿠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면서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의 일종인 줄 알고서 그저 웃기만 했다. 경기장 측에서 늙은 수도사 복장을 한 어릿광대를 집어넣어 경기를 흥겹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는 두 검투사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았다.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시간이 지나며 주변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던 텔레마쿠스의 외침과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그 잔인한 경기를 종식시킨 것이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그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쓴 이 땅의 텔레마쿠스들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오늘 지하철과 역 앞, 이웃 종교의 사찰과 사당 앞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그들의 외침을 진정 외쳐야 할 곳은 평화적 만남을 방해하는 이 땅의 분단 세력들 앞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3. 제자도: 믿음의 외적 실천 자신이 잘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훈련시킬 수 없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총을 들면 그것은 흉기가 될 것이다. 『예수도: 몸으로 실천하는 진짜 제자도』(IVP, 2013)에서 예수님의 혁명적인 가르침을 삶으로 실험하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에 열정을 쏟아 온 저자 마크 스캔드렛은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기술을 익혀야 하듯이, 예수의 제자도는 영성의 훈련장인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연마되고 성숙되어 간다.”고 말한다. 달리기, 자전거 타기, 요리, 쓰레기 뒤지기, 커피 로스팅, 오랫동안 산책하기, 아내와 데이트, 아이들과 텔레비전과 영화 보기를 즐기는 스캔드렛은 개인 중심 실험, 그룹 실험, 장기 프로젝트, 1회성 실험, 4-6주간의 단기 실험, 6개월-1년 이상의 장기 실험을 어떻게 준비하고 실천하며 인도할 수 있는지를 실례를 통해 보여 준다. 예수의 제자도를 삶 속에 실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창의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변화는, ‘한 사람의 작은 실험과 순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단순히 고상한 교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우리 삶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역사 속에서 그분의 삶에 매혹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기로 선택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이 가신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제자도는 개인주의적이고 지식에 치우칠 때가 많다. 따라서 지금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가난, 폭력, 착취, 경제적 불의와 다툼이 넘쳐난다. 스캔드렛은 진정한 제자도란 ‘믿음의 내적인 여정을 외적인 실천으로 나타내는 삶’이라고 말한다. 사실 스캔드렛은 오래전부터 기독교의 가치를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 운동을 이끌어 왔다. 소유의 절반을 처분해 나누는 절반의 나눔 운동을 벌이고, 노동 착취와 인신매매에 바탕을 둔 불의한 경제 구조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치는 등(이를 ‘노예해방 프로젝트’로 명명한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급진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개발하고 가르쳐 왔다. 스캔드렛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소유의 극히 적은 부분만 나누어도 가난과 굶주림의 위기에 처한 전 세계 10억 인구를 살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돈과 소유에 관해 우리가 기존에 택해 왔던 방식들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러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스캔드렛은 “노예 해방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우리가 배운 놀라운 교훈 가운데 한 가지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실천할 때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었다. (…) ‘당신이 도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장이 당신을 선택한다.’ 변화는 프로젝트 자체를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팀으로 일하며 갈등을 통해 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일어난다.” ‘더디 가도 지속적이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진리를 보여준 것이다. 스캔드렛은 “우리는 그 운동에 헌신했던 수백 명과 더불어 우리 이웃들이 사는 지역에서 더디지만 지속적인 향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또한 자유로운 이웃 운동을 통해, 소그룹이 창조적으로 동역할 때 그 파급력이 얼마나 커지는지를 깨달았다. 하나님의 치유를 일으키는 대리인으로서 우리의 목적을 실천에 옮기자 공공의식이 촉발되었다.”고 매듭짓는다. 통일운동, 평화운동과 더불어 이제 ‘노예해방 프로젝트’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서두에 인용한 ‘디테일(detail)이 없으면 스케일(scale)이 없고’,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는 현재의 상태’로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테일과 각론은 한 사람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 미완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한 사람들의 연대가 될 것이다. 예수님 한분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12제자로, 나아가 초대교회로, 마침내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처럼! 4. 미완의 시대, 끝나지 않은 싸움 영국의 가장 뛰어난 역사가 중 한명이자, 평생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던 진보적 지식인인 에릭 홉스봄(E. Hobsbawm)은 자신의 자서전인『미완의 시대』(민음사, 2007)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종결된 꿈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든 다른 방식의 사회를 희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홉스봄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다룬『혁명의 시대』(1962), 유럽 자본주의의 성장을 다룬『자본의 시대』(1975),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식민지 전쟁을 다룬『제국의 시대』(1987) 3부작으로 19세기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며, ‘긴 19세기’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 역사가의 과업에 관해 ‘단순히 과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현재와 관련성을 제시하는 것’을 주장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에릭 홉스봄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곧, ‘위대한 위인들의 이야기’, ‘당연한 결과가 있다는 목적론적 인식’, 기후가 온난하고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당연히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지정학적인 논리’, 모든 것이 운과 불운의 결과일 뿐이라는 ‘카오스 이론’까지)을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을 넘나들면서도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통찰을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홉스봄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무기를 내려놓지 말자. 사회 불의에 여전히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남북정상회담만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오지는 않는다. 희생 시스템은 얼마나 견고한지! 촛불혁명에 참여한 깨어있는 시민들이 이 미완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도『생의 한 가운데』(문예출판사, 1998)에서 주인공 여류소설가 니나 부슈만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동일까, 겁에 질려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전부터 가치 있었고, 아마도 앞으로 영원히 가치 있을 것들을 위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인가?” 생의 모든 것을 껴안는 니나와 달리, 니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슈타인 박사는 고통을 피하고 안정을 지향하며 관조적인 삶을 살았다. 이것을 안타까워했던 니나의 말은 미완의 시대, 다시 뒤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주는 충고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선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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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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