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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바로알기]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문제 제기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은 6월 21일 복음병원 설립 7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70년의 역사!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6월 21일은 복음병원 설립일이 아니다. 설립일이 아닌데도 어떻게 이 날을 설립일로 계속 지키고 있을까? 이미 이와 관련된 글을 몇몇 언론에 기고했으나 일부 미비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추가로 확인된 새로운 자료들을 수정보완하여 다시 기고한다. 아시다시피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은 고신대학, 고려신학대원과 함께 고신교단의 중추기관이다. 이 ‘복음병원’(1961. 8. 7)의 전신은 ‘복음의원’(1951.12.23)이었고 그 복음의원의 전신은 ‘복음진료소’(1951. 1. 15)였다. 그렇다면 ‘복음진료소’는 누가 언제 설립했을까? 당연히 전영창 선생이 1951. 1.15일 차봉덕 의사를 초빙, 제 3영도교회 별관(창고)에서 설립했다. 미국서 모금해 준 5,000불(seed money)로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복지구호단체)와 '복음진료소'(의료기관)를 동시에 설립 개원했다. 그러나 연혁이나 각종 기록에는 전영창 대신 장기려 박사를 설립자로, 초대원장으로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도 장기려 박사를 복음병원 설립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장기려 본인은 복음병원은 자신이 설립하지 않았으며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이라고 몇 번이나 밝혔었다. 그런데도 고신이나 복음병원은 이 사실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 장기려 박사가 설립자가 되고 초대원장이 되면 정체성이나 병원 선전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잘못된 역사를 그냥 덮고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다 복음병원의 역사가 이같이 왜곡되었을까? 어쩌다 설립자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이 복음병원 역사에서 지워졌을까? 연구 동기 필자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교단의 목사인 것을 늘 자랑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신학은 좋은데 생활은 왜 부족한가라는 문제의식을 늘 가지고 목회현장에 있다가, 복지목회로 전환하여 섬기던 중 교단 내 사회복지 활성화를 위해 손종기, 김세중 목사와 함께 ‘고신전국사회복지협의회’(2012. 4.30)를 조직,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출범하였다. 고신전국사회복지협의회는 기존 교단총회 상설기구인 사회복지위원회 소속 전문위원들로 활동하면서 몇 차례 모임을 가지다가 교단 내 사회복지시설장 및 직원들, 담임목사들에 대한 기독교사회복지 전반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1회 고신기독교사회복지세미나'(2014. 4.28~29, 경주 코오롱호텔)를 개최했다. 이때 필자는 2년 동안 고신총회 사회복지위원회 전문위원장으로서 교단 내 사회복지 역사 및 현황에 대한 연구조사를 한 후 ‘고신교단의 사회복지역사 소고’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이때 조사연구한 결과 평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신은 결코 사회복지사역에 무관심했거나 소홀했던 교단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초창기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생활이 잘 조화된 교단이었다.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이약신 목사의 희망의집’, ‘조수옥 전도사의 인애원’, ‘전영창 선생의 복음진료소’(복음병원)...............그런데 여기에서 뭔가 이상했고, 막혔다. 이미 수많은 기록들에서 '전영창'이 지워지고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복음병원 연혁에서부터 각종 저서들, 기록들에서 복음병원은 장기려 박사가 설립했고 초대원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전영창 선생은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고신을 떠나야만 했을까? 본 고는 바로 이 불편한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기 간 조사연구 한 결과물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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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시사칼럼]진보적 보수와 보수적 진보 그리고 개혁보수신앙
    ‘기본소득’을 아시나요?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 혹은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뜨거운 개념입니다. 조짐은 사실 2012년 대선 당시 벌써 싹텄습니다. 한국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이라 할 수 있는 ‘노인기초연금’ 카드를 당시 진보 성향의 야당이 포퓰리즘 논쟁을 의식하여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보수 정당을 자처하던 집권 여당에서 전격적으로 수용하면서 파문이 일었습니다. 사회 복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와 같은 정치적 수렴(收斂)은 이미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1950년 노동당 정부의 게이츠켈 재무장관은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무상을 원칙으로 하던 복지서비스 일부를 유상으로 전환하는 등 정책 변환을 주도하면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이듬해 총선에서 참패하는데, 이어서 들어선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 버틀러는 놀랍게도 노동당의 개혁 기조를 그대로 받아 발전시키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둘의 이름을 합쳐서 ‘미스터 버츠켈’이라 불렀고 여기서 유래한 말이 ‘버츠켈리즘(Butskellism)’인데, 대처리즘이 등장하기까지 수십 년 동안 보수-진보의 타협과 합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는 양립불가능한 관계가 아닙니다. 일찍이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디즈데일리(1804-1881)는 노동계급의 선거권 확대 등 일련의 사회개혁정책들을 주도했기에 ‘진보적 보수주의자(progressive conservative)’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보수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어본다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러셀 커크는 보수주의 사상의 핵심 기둥으로 첫째, 초월적 질서 또는 자연법 체계가 사회와 인간의 양심을 지배한다는 믿음, 둘째, 다양성의 확산과 인간 존재의 신비에 느끼는 애정, 셋째, 문명화된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질서와 위계를 요구한다는 확신, 넷째, 자유와 재산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신념, 다섯째, 관습과 오래된 규범 및 일반화된 지혜를 향한 신뢰, 여섯째, 급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신중한 변화야말로 사회를 보존하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정서, 이렇게 여섯을 들었습니다(『보수의 정신』, 65-66). 하지만 전술한 사례들은 이러한 보수주의 터전 위에서도 얼마든지 진보적인 사고 내지 정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된 영국에서는 ‘보수적 진보주의자(conservative progressive)’가 나타난 적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니 블레어 전 총리입니다. 노동당 출신인 그는 전임자였던 보수당 정권 마거릿 대처의 노선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수용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블레처리즘(Blacherism)’이라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만, 거기에는 고질적인 영국병을 치료하고 안정 속에 성장이라는 중용과 포용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선한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경우 사전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의 진보를 여전히 주창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진보를 부르짖고는 있지만 사실은 보수적 진보주의의 길을 자신도 모르는 채 걷고 있는 지도 모르고, 좌파라 비판 받는 많은 경우도 역시 기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삼파(三波)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재난지원금, 출산지원대책, 공공의료에 관한 논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대상이나 지급 금액에 관해서만 의견이 갈릴 뿐, 그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릴 실익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신학(神學)에 입문하면 여러 가지 생경한 개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보수개혁신앙’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떻게 신앙이 보수이면서 동시에 개혁일 수가 있을까요? 보수적 개혁이거나 혹은 개혁적 보수가 아니라 보수와 개혁이 동등가치로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이나 과학이 아니라 신이나 신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지 않으며,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Abhandlung, 6, 7). 오늘날 특히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괴델 역시 “증명할 수 없지만 참인 명제가 존재하며, 따라서 진리는 명제를 초월한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incompleteness theorem, 1). 그리스도야말로 말(증명)할 수 없는 존재이며, 명제를 넘어선 진리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세상도 진보적 보수니 보수적 진보니 하는 판국에, 교회 안에서 보수니 진보니 편을 가르거나 교회가 세상과 등을 지고 진지한 대화가 아니라 무모한 독백만 일삼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나 세상이나 무슨 주의(主義)가 아니라 오직 주(主)만 드러나고 높아지기를, 폭풍 같은 현실을 잠잠하게 하실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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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독일이야기]정리와 질서의 나라
    독일인들이 즐겨하는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정리는 삶의 반이다.” (Ordnung ist das halbe Leben) 여기 오르드눙(Ordnung)이라는 말은 규칙, 질서, 정리정돈 등을 뜻하는 말이다. 독일에 살다보면 왜 이들이 이 말을 자주하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이 단어에서 나온 ‘오르드너’라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바인더인데, 대부분의 가정이 이것을 서너 개 갖고 여기에 영수증을 비롯해서 온갖 서류들을 차곡차곡 정돈해놓는다. 보통은 3공 링 바인더인데 그 구멍 간격이 전국적으로 꼭 같다. 애들용이나 어른용이나 모든 문구류의 규격이 꼭 같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정리하는 방식이 꼭 같아, 어려서부터 배운 정리하는 법을 평생 사용하게 된다. 사회의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 있고 반듯하고 이것이 그들에게는 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독일인들의 질서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 아마도 도로위일 것이다. 나 역시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운전을 했지만, 기본적인 교통법 이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다녔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이 교통법규들을 조목조목 잘 인지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경우는 사거리를 지날 때에 어느 도로가 우선인지 잘 알 수 없기에 조심해서 좌우를 살피게 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어느 도로나 우선순위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는 우선도로 표지판을 유의해야 하고,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우측도로에 우선권이 있다. 보통 우리 생각에는 직진도로나 큰 도로가 우선일 것 같은데 독일에서는 아무리 작은 도로라도 우측에서 나오는 차량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진다. 이런 규칙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자칫 사고를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교통규칙들을 잘 지키기에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있으면 상대방이 으레 서겠거니 생각하면서 좌우를 보지 않고 몰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 사거리에서 아무도 없다 해도 빨간 불이면 정차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보행자 역시 빨간불에서는 건너지 않는다.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에 사람들이 빨간불에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너가는 모습이 특이해보였다. 유럽인들 속에 팽배한 개인주의로 인해 이번 코로나 방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독일이 나름 선방하고 또 어떤 나라보다도 쓰레기 분리를 잘 실행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정리정돈을 중시하고 규칙과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반듯한 사회를 보통은 동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좀 차갑고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구나 법과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적응이 쉽지 않은 사회이다. 독일에 오랫동안 살다가 직장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된 한 교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독일생활에 익숙했던 그는 처음에는 파리의 무질서함이 너무나 적응이 안 되어 힘들었다. 특히 교통규칙이 독일처럼 엄격하지 않고 잘 안 지키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차를 갖고 나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이제는 프랑스의 자유로운(?) 삶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이 도리어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과거 독일을 생각해보니 숨이 막혀왔다. 그 법과 규칙에 꽉 매여 있는 갑갑한 사회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고, 이제 다시 돌아가라면 죽어도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리와 질서의 나라의 명암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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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성서연구]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요한복음 1장 13절)
    <냉수 마시고도 이 쑤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빈속을 냉수로 채웠는데도 남들 앞에서는 마치 고기라도 먹은 듯이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빈털터리 신세를 들키지 않으려는 심정이 측은하게 여겨집니다. 나쁘게 보면 위선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존심 때문이라면 어떨까요? 위선이라고 비난하기엔 좀 숙연해지지 않나요? 오래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 식당에서 노부부가 음식을 주문했는데, 아내가 먹는 동안 남편은 바라보기만 하더랍니다. 같이 먹지 않는 이유는 곧 밝혀졌습니다. 잠시 후 아내가 식사를 마친 다음에 남편이 아내의 틀니를 끼우고 식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습을 아내는 지켜보았겠지요. 가난해서 부부 모두가 틀니를 할 형편이 못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니, 틀니를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오랜 세월의 사랑이 두 사람의 치아 구조까지 닮게 했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부부의 틀니를 함께 사용하는 것을 지적하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부의 자존심은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키고 싶은 마지막 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삶을 버티게 해 주는 마지막 존엄성, 그것이 자존심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유는 천차만별입니다. 가난 때문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자인데도 비극에 빠지기도 합니다. 가난 때문에 삶을 포기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부자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만, 공통점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배후에는 버틸 수 있는 자존감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삶을 지탱하도록 해 주는 최소한의 자존심, 혹은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오늘 지구촌에서 사람답게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한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힘들어했었지요.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을 보면서 우리 형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깊이 절망하고 좌절한 이들이 많은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한 박탈감이 심합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위축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교세가 많이 줄었습니다. 부흥이란 흥분된 목표를 가슴에 품고 목회자가 된 많은 이들이 위축되어 가는 교회 현실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이런 우리를 버티게 해 주는 마지막 자존감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가장 근원적인 자존감의 이유를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13절은 놀랍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혈통이나, 육정으로, 사람의 뜻과 사람의 방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낳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를 죽일 수 없고, 세상이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흔들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외칠 것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다>란 외침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질병, 가난, 실패, 상처들이 우리를 흔들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상, 우리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낳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최후의 자존감을 붙잡고 어지러운 세상을 이겨나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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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서임중 칼럼]父子之情의 牧會
    ‘이치(理致)’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를 뜻한다. 동의어로는 ‘도리(道理)’ 또는 ‘법칙(法則)’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이치에 어긋나는 언행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들 하는데, 이는 곧 도리와 법칙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논어(論語) 제4편, 이인편(里仁篇) 제 13장에는 예의와 겸양으로 다스림의 이치를 ‘子曰 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何’라고 설명하고, 14장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과 그에 맞는 행동이치를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15장에서는 관계이치를 설명하는데 하나를 가지고 세상 이치를 꿰뚫는 것을 교훈한다. 오늘날과 같이 관계이치가 파괴되어가는 이 시대에 참으로 주목할 만한 교훈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이다. 공자가 증자에게 자신의 道는 ‘一以貫之’라고 했다. 공자가 나간 후 문하생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忠恕일 뿐이다”고 대답을 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관계이치를 공자는 이것이 자신의 道라고 일깨웠던 것이다. 공자의 도는 仁으로 일관한다. 공자의 仁의 기본 의미는 愛人,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애는 충서(忠恕)로써, 忠은 中+心 즉 마음의 중심으로 마음다운 마음이고, 恕는 如+心 즉 같은 마음으로 진정한 용서는 마음이 하나 됨이다. 이것이 진정한 愛人이요 仁이라고 갈파했다. 내 평생의 삶에도 기본 철학과 목회의 기본 이치가 있다. 첫째가 만남이고 둘째는 나눔이며 셋째가 관계이다. 만남의 내용에는 善緣과 惡緣이 있다. 그러기에 좋은 만남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여정에 있어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나눔은 축복이다. 있어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없거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어찌 축복이라 하겠는가. 그런데 나눌 수 있는 마음도 있고 요건까지 함께 갖추고 있다면 이 어찌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로 얽혀 살아간다. 그러나 그 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보다 지고한 관계는 없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목회 이치이다. 30여년의 목회를 마무리하고 은퇴를 하면서 포항중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후임 목사님은 내가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로 기도 중에 택하였고, 성도들의 만장일치로 청빙청원을 받아 위임목사로 奉職하고 있다. 돌아보니 벌써 7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원로목사로, 또 위임목사로 7년을 하루같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父子之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잠깐 어둠의 세력에 카오스 현상을 경험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聖域의 이치를 통해 비온 뒤 땅이 더욱 굳어지는 자연이치와 같이 교회는 더더욱 평행감축의 행진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담임목사님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선임과 행정을 맡은 두 분 부목사님들과 장로님, 권사님들과 함께였다. 이유는 나도 잊고 지나쳐버린 원로목사 생일을 기억하여 찾아온 것이다. 꽃다발과 케익에 금일봉까지 우리 내외 품에 안겨주며 축하하고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해마다 잊지 않고 챙겨주는 그 마음과 섬김 받는 내 마음이 忠과 恕로 어우러졌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여전히 그렇게 챙겨주시는 관계는 父子之情의 관계다. 공자가 증자에게 吾道 一以貫之를 일깨웠을 때 부차적 설명을 따로 하지는 않았음에도 증자는 문하생들에게 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공자의 가르침을 헤아려 설명했는데, 이는 말없이도 많은 것을 일깨우고 말없이도 많은 것을 깨닫는 忠恕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원로목사인 나와 후배 담임목사는 마음 중심으로 진정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복음의 삶을 연주하며 사역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의 이치인가 생각하며 감사한 중에 더욱 감사할 뿐이다. 은퇴를 하면서 후임 목사님에게 2가지 약속을 했다. 하나는, ‘원로목사’는 은퇴 후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사역 기간을 귀히 여겨 교회에서 예를 갖추어 우대하는 것일 뿐, 목회에서는 은퇴이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이 묻지 않는 한 절대로 목회와 연관하여 단 한마디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 뭐라 해도 원로목사와 담임목사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忠과 恕를 통한 진정한 愛의 관계로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여기의 忠은 마음다운 마음, 즉 거짓 없는 마음이며, 恕는 헤아리고 깨닫고 밝게 하는 이치로써 같은(如) 마음(心으)으로 지고한 관계이치를 뜻하는 것이며, 愛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보혈로 맺어지는 십자가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도록 나는 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하나님께서 나의 사역이 녹슬지 않고 닳아서 사용하지 못할 때까지 聖役으로 사용하시라고 축복하며 안수기도를 해 주셨던 故방지일 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지금도 나는 매주 전국 방방곡곡으로 다니며 말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렇게 전국을 다니며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이치가 忠恕(마음을 다한 하나됨의 관계)로 연주될 때는 교회가 평행감축을 노래하지만 그 관계가 怨誤(원망과 잘못된 관계)로 연주되면 교회는 카오스 현상을 벗어날 수 없고 벌판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나는 참으로 복에 복을 받은 사람이다. 시편 92:14~15절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의 축복 메시지인 말씀을 옷 입고 평행감축을 노래할 수 있음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父子之情의 관계이치가 忠恕로 연주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고희의 삶을 사는 오늘도 주야로 기도하는 것은 오로지 아비의 마음으로 아들 같은 담임목사님의 목회가 平幸感祝이기를 축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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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은혜의 말씀]일어나 걸어라(요 5:1-9)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오신 예수님은 양문을 지나 가까이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 못에는 한 번씩 밑바닥으로부터 물이 끓어오르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천사가 와서 물을 휘젓고 가는 것이라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끓어오를 때 제일 먼저 뛰어들면 무슨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못에는 전국에서 병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베데스다는 긍휼,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뜻과는 다르게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 수많은 병자들 틈에서 홀로 누워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며 고개 숙인 38년 된 한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능력의 말씀이 그에게 선포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8절)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자 성령의 능력이 그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병자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38년 된 병자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신음하는 우리들, 또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는 육체의 연약함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8년 된 병자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던 것처럼 나의 문제도 예수님 안에서 깨끗하게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38년 된 병자는 구원받을 만한 무슨 조건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편에서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찾아오셔서 값없이 구원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이요 사랑입니다. 은혜는 나는 아무 한 것이 없는데도 주님이 그저 값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둘째,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아픔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6절 보세요.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세상에는 38년 된 병자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우리 주님은 그 아픔을 다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다 아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 고백하면서 매달리면 됩니다. 주님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 셋째,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소망을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꼭 한 가지 물으신 게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이 질문을 던지시면서 소망의 불꽃이 사그라진 그에게 작은 불씨를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소망의 끈을 붙드는 것, 그것이 모든 치유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베데스다를 바라보지 마세요. 온전하신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시고, 능력의 주님 의지해서 기어코 일어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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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얻는 것과 잃는 것
    솔직해 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괜찮다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눈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어지러운 상황이 펼쳐져 있으면, 뒤돌아서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해결을 위한 빠른 열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솔직해 질 수 밖에 없는 경우에도 회피하고, 숨고, 외면하며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나와 종종 마주한다. 특히, 아이와 관련된 일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엄마, 은율이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보고 은율이 받아쓰기와 구구단을 가르치래”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기 전, 둘째가 학교에서 오더니 나에게 다급한 일을 전하듯 헐레벌떡 거리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둘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다급할 수 있는 일이다. 본인은 6-7살 때 한글을 다 알아서 1, 2학년 받아쓰기 할 때는 내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했고, 구구단도 설렁설렁 외우면서 끝냈는데 동생은 2학년 1학기가 끝나가도록 학습적인 부분이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으니 충분히 놀랄 만하다. “엄마가 은율이 봐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네. 알았어. 엄마가 신경쓸테니까 걱정하지마” 그래, 이쯤이면 슬슬 펑크가 날 만도 하다. 셋째 은율이는 온갖 핑계를 대며 학교 공부 봐주는 것을 미뤄왔다. “12월 생이기에 조금 늦어도 괜찮다. 위에 형과 누나가 있는데 알아서 어깨 너머로 배우겠지. 또릿또릿해서 자기 알아서 다 할거야” 이런 말들이 주 핑계였다. 그 어느 말에도 “엄마인 내가 너무 여유가 없어서 못 봐주고 있다”나, “셋째까지는 도저히 신경쓸 수가 없었다” 등 나 때문, 나 책임이란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순간, 즉 상황을 솔직하게 인식하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그러면 뭔가 총체적으로 복잡해질 것이란 생각에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 4명을 양육하고 일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듣는 말 중 가장 자주 듣는 표현은 “아이 4명을 키우고 일도 하고 정말 대단해요”이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사실 “아니에요. 아이들 양육도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곳곳에서 펑크가 나는데 그냥 모른 척하고 살고 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냥 씩 웃으며 못 들은 척 하고 만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동 전문가들이 아이가 1세부터 3세까지는 가능하면 주 양육자가 엄마가 되어서 안정적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이의 평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단.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그렇게 키우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처해진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은 잘하고 싶은데 많은 한계에 부딪혀 곳곳에서 구멍이 펑펑 터진다.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아이들의 학업에 신경을 쓰고 집에서도 봐주면 별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럴 여유조차 생기지 않아 몇 개월 동안 놔두면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내 희망은 뿌연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뜻하지 않는 문제들만 가득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또 난 상황에 솔직해지지 않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나 때문임’을 피하고 싶지만, 결국 문제의 해결은 ‘나 때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지금 나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지금 내게 주어진 여러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분명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을 것인데, 생각할 여유조차 없을 때는 하루하루 살아내기만 하다 만다. 하지만 내가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고 적절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때 비교적 모든 일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주어진 일에 적절한 우선 순위를 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도 이 질문을 대뇌이며 분주한 삶의 퍼즐을 맞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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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다음세대 칼럼]기다림
    수업시간 아이들에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세 가지로 정리해 보자.”하며 주제를 던졌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가족, 친구, 돈’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의외의 답이 나오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이 많은 G였다. 전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다시 시험을 보고 우리 학교에 입학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공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살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한 것이다. “첫째는 여친(여자 친구)이고, 둘째는 자존심이고, 셋째는…… 교회입니다.” “인마, 아부하지 마라. 교회는 무슨…….” “목사님, 아닌데요. 정말 교회 맞는데요.” “어째서 그러냐?”“먼저, 지금 제게는 여자 친구가 제일 소중합니다. 제가 지켜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남자입니다. 남자의 뽀대(자존심)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소중한 이유인데요. 저는 교회에 이제 세 번 가 봤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갔을 때 이상하게도 누군가 내 말을 들어 주는 것 같았고, 교회에서는 나를 이상한 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겹게 자꾸만 웃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또 교회 샘들이 나를 볼 때마다 등을 쓸어 주면서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모습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 이름은 주로 ‘인마’ 아니면 ‘어이’나 ‘야, 새끼야’였는데 이름도 제대로 불러 주시고 말이지요. 그래서 지금은 교회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나 역시 웃었다. 물론 G는 교회에 꾸준히 출석한 것은 아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만 교회를 찾곤 했다. 하지만 고비의 순간마다(술이 취했든 맨 정신이든)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그에게 따뜻함을 주었던 것이다. G는 이제 군 제대를 앞두고 있다. 지난 12월에도 연락도 없이 음료수 한 통을 들고 학교를 찾았다. 나는 반가워서 꼭 안아 주었다. 그런데 녀석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휑하니 가 버리는 것이다. “목사님 생각나서 그냥 들렀습니다. 저 이제 부대로 복귀하는 길입니다. 얼굴 뵈었으니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G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아이들은 큰 것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도 감동할 줄 알고 귀하게 여기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사람이 소중하다고 하면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기준으로만 생각하며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온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자신의 기준으로 평가하며 판단해 버린다.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제 위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1~2년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데, 우리는 너무 쉽게 아이들을 포기하고 판단해 버리는 잘못을 하고 있다. 동일한 질문을 내게도 해 보았다. 학교에 근무하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중에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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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신앙교육 나침반]가정세대통합 컨텐츠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
    여전히 코로나 상황은 종식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교회학교 사역자들은 점차 줄어드는 코로나의 확산세와 백신접종자의 증가세를 보면서 ‘올해는 여름성경학교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델타 변종바이러스의 출현은 우리의 작은 기대마저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델타바이러스의 빠른 전파력은 연일 역대 최대 확진자를 기록하며, 야심차게 세운 성경학교 계획안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충성스러운 사역자들은 수시로 변하는 코로나 방역상황에서 성경학교 계획안을 여러 차례 수정하면서 가정에서라도 성경학교를 진행하도록 애를 썼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가이드를 따라서 부모가 교사가 되어서 성경학교 교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특별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역자들의 열심과 달리 가정 현장은 성경학교를 진행하는 데에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열성적이고 가르침의 은사가 있는 몇몇 부모들은 사역자들의 가이드를 잘 따라갔지만, 바쁘고 분주한 육아 현실에 처한 대부분의 부모들에게는 성경학교가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자녀들이 다양한 연령일 경우에는, 부모가 성경학교 교재를 자녀의 연령에 맞게 준비하여 가르쳐야 하니 엄두를 내기 힘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대다수의 교재는 연령별 수준에 따른 내용과 방법을 담은 세대분리 형태이며, 교회학교 환경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가정 모두 혼란을 겪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신들만의 사역 치트키를 발견한 몇몇 사역자들은 전혀 흔들림 없이 성경학교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들은 코로나상황에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고, 이를 위해 과감한 노력과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치트키는 바로 향기나무교육개발원에서 제공하는 신앙교육컨텐츠입니다. 향기나무와 함께하는 ‘우리집 성경학교’는 기존에 만나왔던 신앙교육컨텐츠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첫째,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는 여러 연령이 혼재되어 있는 가정을 위한 세대통합 컨텐츠입니다. 향기나무 성경놀이키트는 비구조화된 놀잇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를 들어 흙, 물, 블록, 곡물, 종이 등과 같은 구조화되지 않은 재료는 놀이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러니 이러한 놀이재료는 연령에 따라 다양하고 창의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어린자녀를 둔 가정이 향기나무 놀잇감으로 만들어내는 놀이와 초등고학년 자녀를 둔 가정이 만들어내는 놀이가 달라지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동일한 놀잇감이 대상의 연령에 따라 다양한 성경놀이를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구조화된 도구는 여러 연령의 가족을 통합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코로나시대에, 가정의 세대통합을 이루어 가정을 성소로 세우고자 하는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세대통합형 신앙교육컨텐츠를 제공합니다.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놀이터 또한 신청자의 대부분이 영유아 부서였던 예년에 비해서, 올해부터는 점차 영아에서부터 초등고학년에 이르는 모든 가정이 참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의 신앙교육컨텐츠로 전 연령의 가족이 말씀 안에서 하나되는 경험을 하니 얼마나 복된지 모릅니다. 둘째,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는 가족을 말씀 안에서 마주하게 하는 놀이중심 컨텐츠입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기독 가정은 자녀에게 주로 인지적, 언어적인 방법에 치우쳐 하나님 말씀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모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한 영향력입니다. 그러한 부모가 자녀들과 마주하여 생명의 복음을 놀이로 경험한다면, 그 시간은 세상의 미디어 자극을 능가하는 생명의 고자극 시간이 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몸과 몸을 맞대며 놀이할 때 가족들은 ‘놀다보니 하나님!’, ‘놀다보니 예수님!’, ‘놀다보니 성령님!’을 전인적으로 경험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향기나무놀이를 만난 가족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생명의 향기가 되어 은은하게 퍼지는 중입니다. 셋째, 향기나무 우리집 성경학교는 언택트 시대, 메타버스 환경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컨텐츠입니다. 김현철 목사님의 저서 「메타버스 교회학교」가 현재 기독교출판부문 1위를 기록하며, 한국교회에 선한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 중 성경학교를 다루고 있는 내용에 향기나무 우리집성경학교 컨텐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텐트 시대에 점차 많은 교회가 우리집 성경학교를 실시간 온라인으로 진행하면서 기존에 해왔던 성경학교 이상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 비결은 바로 가정을 마주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비록 온라인으로 진행하지만, 온 가족이 마주하게 하여서 놀이중심으로 진행하는 우리집 성경놀이는 비대면의 제약을 뛰어 넘어 가정을 말씀으로 회복하고 치료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역자의 온라인 실시간 가이드는 성경학교 진행에 부담이 되는 부모들의 짐을 덜어주며, 온 가족을 더욱 성경놀이에 몰입하도록 돕습니다. 실시간 온라인 우리집 성경학교에 참여하는 가정들은 비록 또래와 마주할 수 없지만, 가족과 마주앉은 생명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본 그 어떤 대면환경보다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자리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올해도 우리집 성경학교를 통해 아름다운 이야기가 계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놀이키트를보며 유치하다고 고개를 젓던 까칠한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성경놀이를 시작하자 부드러운 눈빛으로 누구보다 즐겁게 참여하였다는 이야기’, ‘엄마인 본인이 마음의 치유를 받아 울며 놀이에 참여했다는 이야기’, ‘중학생 큰아들이 가장 천진난만하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 ‘아이들이 아침마다 향기나무성경놀이 언제하냐고 묻는다는 이야기’, ‘우리집 성경학교에 은혜 받은것이 감사해서, 향기나무에 더 많은 가정성경놀이개발에 동역하고자 적지않은 물질을 후원해주신 감동적인 이야기’ 가정을 말씀 안에서 마주하게 하여 일상의 자리를 성소로 세우기 위한 향기나무의 세대통합 성경놀이개발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많은 격려와 후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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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교사의 힘]달란트중심의 교육
    기독교교육은 달란트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춤과 게임도 모두 한 달란트입니다. 어느것이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이 아닙니다. 100명중 1등은 단 한명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달란트 중심의 교육을 하면 모든 아이들이 활기차게 사랑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달란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 달란트의 우열을 우리가 정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공부중심의 교육에서 달란트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하면 많은 아이들이 행복해집니다. 교회는 이것을 학부모에게 훈련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앞으로 많은 부분들이 로봇으로 대체되는 시대에 많은 직장은 없어지고 또 새로운 직장들이 생길 것 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아이에게 주신 달란트를 찾고 세워주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순종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달란트를 찾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일단 돌아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좋아하는 것 중 제일 잘하는 것이 아마도 그의 달란트일 것입니다. 그 달란트를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세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아야합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마음껏 해 볼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십시오. 그 분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지지해주시면 달란트 발달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달란트 중심의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달란트는 더 좋고 또 어떤 달란트는 별게 아니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없이 이땅에 태어나게 한 생명은 없습니다. 그 계획이 부모의 계획가 다를수 있음을 인정하고 높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면 됩니다. 아이들의 달란트가 아름답게 열매맺는 교육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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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사의 힘
    202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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