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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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 장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왔다.

가족들과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부르짖는 중보기도 덕분이었다고 간증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말 못하고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체로 누워있었다.

202442일 오전 830분경 이었다고 전해졌다.

의사들의 파업으로 병원은 적막했으나 당번이 마침 신경과 의사였기에 완벽한 처치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중환자실의 첫날밤 의식은 있으나 말을 못하고 손발이 경직되어 불구자에 가까웠다.

밤은 깊어 갔다.

자정 무렵 비몽사몽간에 낮 익은 통성기도 소리가 우렁차게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 여러 갈래의 기도들이 아름다운 색줄기를 이루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사푼사푼 내려오고 있었다.

이런 기도소리 중에는 아버지의 97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해외에서 온 딸들의 부르짖음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장로님, 김 장로님을 지켜달라는 성도들과 동료 장로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신기하게 들려왔다.

심지어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일가친척, 심지어 내가 섬긴 한상동 목사, 한경직 목사, 강원용 목사, 정진경 목사, 강병훈 목사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김준곤 목사와 조용기 목사는 웃으시면서 돌아갔다가 그때, 그 시간에 오라고 타일렀다.

나는 이 소리들이 바로 나의 급변 소식을 듣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중보기도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새벽 5시경이었다. 간호사가 와서 말했다.

"어르신, 아까 찬송 부르셨지요? 할렐루야 아멘도 몇 번 하셨어요" 나는 다음 순간 말문이 열렸다. “~아 그래요?”

그리고 손발도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그날아침 그러니까 생일날인 43일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남을 느꼈다. 이날따라 병원식은 미역국 밥이었다.

그 후 3일을 중환자실에 있다가 주치의 처방에 따라 하루를 일반병실에 머문 후 입원 닷 새만에 퇴원 귀가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범사에 함께 하심을 믿는다.

그날아침 718분쯤 미국에서 온 둘째 딸 원숙이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아버지에게 오찬 약속 확인 차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았으나 말을 못하고 중얼대니 사고가 크게 난 줄 알고 종로에서 마포집까지 달려왔다. 뒤이어 도착한 사무국장 이희연은 무조건 지체없이 119를 불렀다.

골든 타임이 남아 있었다.

의사들이 파업 중인데 그날아침 응급실 당번이 신경과 의사여서 일사천리 치료가 가능했다.

중환자실도 많이 비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 릴레이식 중보기도의 응답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퇴윈 후 천국에 갖고 가지 못 할 세속적인 물질이나 가치관들을 가차없이 정리하고, 상대화 하는 길을 향해 걷기로 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멀리한 독선적 신앙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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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중보기도의 능력 체험담 과소평가 해온 원로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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