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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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60년 전 부산교계(3)
    60년 전 당시 부산교회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분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먼저, 1960년대 부산교계는 한국교회 분열기의 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던 경남(법통)노회가 1951년 장로교 총회(제36회 총회)에서 추방되었다. 1907년 독노회 조직과 1912년 총회를 구성했던 장로교 총회는 단일 총회였던 것이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고신측(1951)이 총회에서 추방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를 구성했고(1952), 자유주의 신학 문제로 기장측(1953)으로 나뉘어 졌으며, WCC 가입 문제와 박형룡 교장의 3,000만환 사기 사건으로 인해 다시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었다(1959). 60년 전 부산은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통합측 63교회, 합동측 62교회, 고신측 43교회로 삼분되어 있다. 신설된 성경장로회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부산진교회에서 성산교회가, 구표교회에서 구포제일교회가 분리되었다. 명감에는 이러한 교회분열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같은 이름의 교회가 분리된 채로 다른 두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등장한다. 제2영도교회가 고신측의 환원으로 인해 두 교회로 분열되어 합동측과 고신측에 존재하고, 또 평양성 중심 52교회의 피난민들이 세운 ‘평양교회’도 1959년 장로교 대분열 때 나뉘어져 통합측과 합동측에 각각 같은 이름을 올리고 있다. 평양교회는 전쟁이 끝나고도 무려 17년이 되기까지 ‘평양교회’ 이름을 달고 있다가, 평양 출신 한부선 선교사의 제안으로 1970년에야 지역의 이름을 따 합동측 평양교회는 지역 이름을 따 대청교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금정구로 이전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9교회였으며 산정현교회(장상선 목사)와 서부교회(백영희 목사)는 독립교회로 존재했다. 재건교회는 4교회, 감리회는 22교회, 침례교회는 9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양분된 성결교회는 기성이 6교회, 예성이 11교회였고, 수정동성결교회와 중앙성결교회는 1965년까지 중립을 유지하였다. 이 《부산 기독교 명감》은 고신측과 합동측의 환원의 여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신측은 1960년에 이미 590교회였는데, 3년이 채 되지않는 환원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 환원 과정에 함께하지 않은 교회가 145교회, 경기노회 보류파까지 합치면 177교회가 되었다. 북부산교회에서 고신계가 분립 부산북교회를 설립하였다. 성산교회 목회자가 환원에 동참하지 않으면서 성서교회가 설립되었다. 부민교회는 합동측과 중립 양쪽에 이름을 올렸다가, 훗날 고신측으로 돌아왔다. 김창인 전도사가 개척한 동일교회도 환원 당시 합동측에 속해 있다가 뒤늦게 고신측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교단이 고신측이었다. 합동측과 합동과 환원 과정에서 고신측이던 송도, 북부산, 해운대제일, 충일, 범일 등 여러 교회들이 환원하지 않았다. 교단 통합과 환원의 성급한 판단이 얼마나 아픈 상처를 가져다 주었는가를 알게 한다. 고신측이 합동 당시에 590교회였는데, 600교회를 회복한 것이 1977년도였다. 한국교회 성장기에 고신측은 20년을 제자리 걸음을 했다.
    • 기고/강연
    • 기고
    2026-02-27
  • [기고]60년 전 부산교계(2)
    1945년 해방 당시 부산의 인구는 28만 명이었는데,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밀려오면서 급속도로 증가해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84만 명이 되었고, 1960년에는 116만 명이 되었으며 1964년에는 140만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전쟁 후 많은 피난민들이 서울이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갈 곳이 없던 이북 출신들은 다수 부산에 정착했다. 그 시기의 부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은 국제시장에서 볼 수 있다. 이북에서 집과 교회와 농토를 그대로 두고 떠나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한 그들의 모습을 영화 〈국제시장〉은 잘 그려준다. 전쟁 직전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한명동 목사는 교회에서 먼 거리 구역을 나누어 제2, 3, 4영도교회 설립 정책을 채택했는데, 한명동 목사도 부산남교회를 개척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네 교회가 분립되어 교회가 어려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분립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왔고, 많은 사람들이 영도에 정착, 교회를 찾아오면서 그 자리가 다 채워졌다. 분립된 교회들도 빠르게 성장해, 제2영도교회는 2년 만에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60년 전, 1960년대 중반만해도 한국은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대도시에는 전기가 공급되었지만 전기가 정전을 반복했고, 대부분의 농어촌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못했다. 북한은 수풍수력 발전소를 통해 전기가 생산되었고, 중공업이 발달해 1960년대 말까지 경제적인 수준이 남한보다 앞서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 3년 동안 온 나라가 처참한 전쟁으로 회복불능 상태가 되었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사회기반 시설도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역동적인 사회였다. 부정선거로 1960년에 4.19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민주당 정권이 채 안정되기 전에 5.16 군사 쿠데타(1961)로 박정희 장군이 집권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나라가 가난을 탈피하고자 하였다. 당시는 국민의 70% 이상이 농업, 임업, 수산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좋은 일자리가 없었던 때, 혁명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거절당하고, 독일과 경제교류를 시작했다. 1962년 독일에 광부를 모집할 때 다수가 학력을 속이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지원해 광부 5천 명을 뽑는데 약 4만 명이 지원하였고, 2천 명의 간호사를 뽑는데 2만 명이 지원할 정도였다. 그 시대에 산업화는 도시화를, 도시화는 교회성장을 이끌었다. 1964년에 서울에 구로공단이 조성되었고, 부산은 고무신과 섬유공장이 크게 번창하면서 농촌의 청년들이 도시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동안 오랫동안 찌들린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이 추진되고, 사람들은 ‘잘 살아보세’를 부르며 가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했고, 근로기준법이 제정되었지만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노동강도가 점차 가혹해지면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내세운 전태일의 분신사건도 1972년에 일어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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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6-02-10
  • [기고]60년 전 부산교계(1)
    지금부터 꼭 60년 전 부산교회와 교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자가 발굴되었다. 1965년 대한예수교전국평신도회 경남연합회(회장 김용옥)에서 부산의 각 교회를 전수조사하여 처음으로 발간한 《부산기독교 명감》이다. 이 책은 46판 양장 173면으로 구성되었는데, 60년 전 부산교회와 교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온천제일교회를 시무하던 교회사가 이찬영 목사가 ‘부산의 기독교’를 개괄하여 정리했는데, 부산의 위치, 부산의 천주교와 기독교 전래, 초기 설립 교회들, 그리고 부산기독교계의 특징을 미온적, 평화적, 소교회주의를 들었다. 둘째, ‘(부산의) 기독교 현황’을 한 페이지의 표에 담았다. 책의 서두에 부산의 인구 현황, 인구와 주택 현황, 각 교회 현황, 종교단체 현황을 실었다. 셋째, 각 교단별로 예장통합측, 예장합동측, 예장고신측으로 구분하여 노회 임원, 상비부 및 시찰 조직, 연합회 명단을 실었다. 각 교단에 각 교회의 명부를 교회명, 주소, 담임목회자를 포함하여 구별하고, 각 교회의 이름, 주소, 목사. 장로, 장립집사, 청년회장 등 중요한 사항을 포함하였다. 그 외에도, 기독교계 학교, 구제기관, 각 기구 현황 등을 포함하고, 교회 별 교인 전화번호부, 광고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꼭 60년, 당시의 부산의 교회와 교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네 차례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60년 전 부산 교계와 오늘 명감에 의하면 1963년 12월 말을 기준으로 부산의 인구는 중구, 서구, 동구, 영도구, 부산진구, 동래구 등 6개 구에 91개 동, 1,351,630명이었다. 초등학교 79개, 중학교 46개, 고등학교 40개, 전문학교 1, 대학교 10개였는데, 미인가 공민학교가 72개나 되었다.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하던 청소년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민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는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는 고등성경학교에서 성경을 주로 공부를 하면서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 경우도 많았다. 초장동교회는 지역 특성상 1970년대까지 공민학교를 운영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토착화 신학’ 논쟁을 벌일 정도가 될 정도로 신학적인 성숙을 추구하던 시기였지만, 한국신학대학을 제외하고는 정규대학으로 인가받기 전이었다. 60년 전 부산에는 장로교 통합측, 합동측, 고신측 외에도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재건장로회, 독립장로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성결교회는 교단 분리 이후 중립측도 두 교회가 되었는데 수정동성결교회는 중립측에 속하였다. 1963년에 대한성경장로회는 독립교단이 되었다. 해방 후 부산에 입국해 고신교회와 협력하던 마두원 선교사는 성경장로회를 창립하면서 고신측과 멀어졌다. 당시 부산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2교회, 침례교회가 9교회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장성만 목사가 제일그리스도교회를 시무하였는데,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지원으로 경남공업전문대학를 설립하였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동서대학교로 성장하였다. 설립자 장성만 목사는 정계에 진출,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구세군이 세 교회였고, 안식교가 일곱 교회, 안상홍의 ‘새안식교’는 이 시기에 출석 수가 100명이 되었다.(계속)
    • 기고/강연
    • 기고
    2026-02-10
  • [기고]불편한 진실과 역사적 책무
    이 글은 2024년 10월 31일 제2회 송상석포럼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로 오래도록 금기시 되어 왔던 그 이름이 새롭게 조명 받게 되는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감회가 새로워진다. 제일문창교회 당회가 송상석 목사의 기념사업을 펼치며 그분의 업적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또 한편 편향되지 않는 시각으로 역사적 자료들을 발굴해 내고 햇빛을 보게 하는 사학자(史學者)들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필자가 맨처음 송상석 목사와 관계하게 된 것은 악연(惡緣)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5월 그해 고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동기생인 강영식, 주종근 전도사와 함께 전국교회에 드리는 공개서한을 발송하면서 송상석 목사의 비위를 크게 건드려 버렸다. 참고로 2016년에 발행된 경남(법통)노회 100년사에는 “1976년2월19일 고려신학대학원 제30회 졸업생 중 주종근 전도사(가음정교회) 손상률 전도사(성주교회) 강영식 전도사(화삼교회)는 총회가 분열되려는 상황에서 뜻을 같이하여 여러 날 밤을 새우면서 쓴 ‘파수병의 절규’ 라는 제목의 서신을 1976년 5월 7일 전국교회 앞으로 발송했다. 같은 해 6월 25일 두 번째, 7월 15일에 세 번째, 8월 20일에 네 번째 서신을 발송했고, 제26회 총회 직전인 9월 10일에는 어떤 경우에도 교단은 나누어지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다섯 번째 서신을 발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p285) 그 첫 번째 글에서 송상석 목사와 마주치게 되고 말았다. 제1신 내용 중에 “동기와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피소자의 입장에 있던 송 목사께서 다시 맞고소를 하므로서 소송 반대를 들고 나온 경남노회가 안으로는 소송을 용납하는 것으로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부분에서다. 이 문제로 송상석 목사는 노발대발하여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전도사들이 나이 많은 목사의 이름을 활자화 하여 전국에 뿌리다니”하며 노회에 징계를 요청하였다. 하마터면 갓난 애숭이들이 그대로 목이 잘릴 뻔 했던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노회의 중진들이 극구 만류하여 일단 경고하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 갔다. 그해 여름 강도사 시험을 거처 이듬해 목사가 된 나에게 송 목사님이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 나는 이미 한번 찍힌 일이 있는지라 내심 걱정을 하면서 찾아갔더니 뜻밖에도 엄청난 과제를 맡기시는 것이다. 그때 송상석 목사는 “한국절제교육연구사료집”을 집필하면서 거기 포함시킬 내용 가운데 초기 한국교회가 사용한 만국통일공과중 절제공과 부분을 빼서 정리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목사님에게 왜 그런 일을 제게 맡기시느냐고 물었더니 “이 작업은 신학적 소양이 있고 문장력도 갖춘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데 손 목사를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개서한 첫 서신에서 필화사건으로 징벌을 받을 뻔 했다가 그 일로 인하여 신학적 소양과 문장력을 인정받아서 요긴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나는 반고소 교단 6년 동안 총회의 임원으로 교단의 진로와 정책을 입안하는 일과 주일학교 교재를 편찬하고 출판하는 일이며 신학교 일에도 관계하는 등 열심히 봉사하였다. 안타깝게도 1982년 제32회 총회에서 소송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합동을 결의할 때 그 현장에 있었지만 끝내 명분 없는 합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그 후로는 교단을 달리하게 되고 말았다. 1. 오해와 진실 고대 인도에서 유래 했다는 ‘장님과 코끼리’(盲人模象)의 우화가 있다. 어느 마을에 여섯명의 맹인이 코끼리를 만져 보고 제각각 다르게 평가 했다는 내용이다. 첫 번째는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를 기둥처럼 생겼다고 했다. 두 번째는 꼬리를 만져보고 새끼줄처럼 생겼다고 했다. 세 번째는 코를 만지면서 나무 방망이처럼 생겼다고 했다. 네 번째는 귀를 만지면서 부채처럼 생겼다고 했다. 다섯 번째는 상아를 만지면서 단단한 창 같다고 했다. 여섯 번째는 배를 만지면서 커다란 벽처럼 생겼다고 했다. 사람의 지식은 자기가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범위만큼 한계를 지닌다는 뜻이다. 문제는 어느 한쪽만 보고 아는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주장하거나, 다른 사람의 관점을 무시해 버리는 것에 있다. 지나간 시대의 인물을 놓고 후세 사람들이 평가 하게 될 때는 생전의 업적이나 동시대 인물들의 구전 또는 기록된 자료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나 가족이 체험한 것처럼 정확하고 완전하게 기술 할 수는 없다. 사실 한국 교회사적 인물에 해당하는 송상석 목사의 경우 몸담았던 고신 교단 안 에서도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나누어 져 있어서 같은 팩트를 놓고도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곤 했다. 여러해 전 서울에 있는 어느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는 교수 한사람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한국교회 초기부터 역사 전반을 연구하던 중 여러 부분에서 송상석 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분의 이력을 살펴 보았다고 한다. 그분이 일제 치하에서 부터 각계의 유력인사들을 규합하여 절제운동을 전개하였고, 언론과 교육에 기여한 것 등 당시 크리스챤 인사 중에서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 고초를 겪으면서도 동지들을 도왔다는 것과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 때 중국 봉천에 거주하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다 교장으로 추대한 일까지 대단한 업적이 있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렇게 신학교 설립에 산파역할을 했고 교단 성장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 왜 말년에는 자신이 몸담고 키워 왔던 고신총회로 부터 징계를 받아 면직까지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교수처럼 어떤 선입견이나 이해관계가 없이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한다면 훌륭한 업적이 들어나고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할 인물임에도, 그와 반대로 부정적 시각에서 개인적인 실수나 약점만을 크게 부각시키며 악마화 시켜 버린다면 역사에 오명으로 기록을 남기게 된다. 어쩌면 송상석 목사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퍼뜨렸거나 선동을 하여 일반에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점차 그것이 정설처럼 굳혀지게 되어 버린 경향이 많다고 본다. 1969년 내가 고신대학에 입학하던 해 학내문제로 많이 시끄러웠는데 송상석 목사를 반대하는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곤했다. 그 즈음 학생회 임원 몇사람이 이사장과 담판을 짓겠다고 마산을 찾아갔는데 그들이 직접만나 대담을 하고는 생각이 달라 졌다고 했다. 전해 진 말에 의하면 자기들은 송상석 이사장이 학교운영에 전횡을 일삼고 사욕에만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고 들어 왔는데 직접 만나고 보니 전혀 아니더라. 그분도 기도하는 목사님이었고 눈물도 있는 것 같더라. 생각보다 지나칠 정도로 검소해 보였으며 사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 당시 경남노회 안에서도 송상석 목사와 뜻을 같이하며 그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았지만 막상 송목사가 명예훼손을 당하고 여러 가지 음해에 시달려도 거기 맞서서 팔걷어 붙이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제24회 총회 이후 경남법통노회가 정화노회와 대립하면서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쉴새없이 회의가 열리거나 공청회를 하는 등 복잡한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여러 모임이나 회의때 마다 송상석목사 본인이 직접 나와서 사건마다 소상하게 설명을 하곤 했는데 이런 모습이 회원들의 눈에 불편해 보인다고 노회의 중진 몇사람이 찾아가서 그런일은 다른 사람들 에게 맡기고 목사님은 한걸음 뒤에 물러나 있어주면 좋겠다고 건의 한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송상석 목사의 반론은 “나에게 관한 문제인데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또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면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 삼자처럼 본질은 덮어 둔채 적당히 타협하고 말더라” 고 했다. 그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송상석 목사 생전에 뿐 아니라 사후 수십년이 지나오면서 그분과 관련지어 회자된 말들중에 터무니 없이 날조된 모략과 중상도 있었고 공적 기관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있었지만 한번도 어느 누구도 대신 나서서 경위를 밝히고 책임을 지우는 일이 없었다. 모두 다 뻔히 알수 있는 일인데도 자기의 일이 아니니까 묵인하고 지나치게 되고 결국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설처럼 굳혀 지곤 했었다. 송상석 목사를 두고 터무니 없는 허위사실을 퍼뜨리며 악의에 찬 인신공격을 하는자가 있는가 하면 이를 두둔하며 확대 재생산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유 모 목사라는 사람은 공개석상에서 송상석 목사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를 했고 독립운동가들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괴롭힌 경력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송상석 목사가 1947년 만주 봉천으로 가서 박형룡 박사를 모셔올 때 국경을 통과하며 여러차례 검문을 당했으나 그가 소지하고 있었던 일본 형사의 신분증을 제시하여 위기를 넘기곤 했다고 전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소리를 하곤 했다. 차 모 교수라는 사람은 어느 특강하는 자리에서 지성인으로는 입에 담을수 없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는 송상석 목사를 가리켜 “이사람은 기회주의자, 카멜리온 같은 변신술에 뛰어난 자” 등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 “송상석이 일본형사 시절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했던 것이 알려지고 통영, 고성 지방에 소문이 나서 숨어 다녔다. 1948년 반민족 특위의 활동으로 전국에 수배를 당하게 되자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이름도 바꾸고 절에 들어가 중이 되기도 했고, 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이처럼 전혀 근거도 없고 시차도 맞지않고 사리에도 어긋나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 자들이 뻐젓히 살아있고 그 동영상 자료도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참조:송병일씨가 보내온 동영상 3편) 참으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까지 한때나마 송상석 목사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쓰여 졌다는 것은 씁쓸하기 이를데 없다. 2006년9월 고신 신대원 설립 60주년 기념 행사때 박형룡 박사를 만주에서 모셔다 초대교장으로 추대하게 한 공로로 고 남영환 목사 유족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사건도 그중에 하나다. 이것이야 말로 엄연한 사실을 날조하여 역사적 오류로 남겨진 것이다. 이 일이 만일 의도적인 목적에 의해서 였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것이고, 무지로 인한 실수 였다면 학교의 공신력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오히려 불명예를 안겨 준 것이 된다. 이부분 정확한 자료를 소개할것이 있다. 1974년9월 경남법통노회 제100회 기념식에 내빈으로 참석한 박형룡 박사는 축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 고려 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있어서 출옥성도들의 주동에 그들을 존경하는 신앙동지 지도자들과 교회들의 협력이 크게 공효를 이루었다. 그 중에도 현 노회장이신 송상석목사의 비상히 희생적인 봉사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47년5월 중순 만주 영구로 가는 19톤짜리 목조 밀수선에 편승하고 황해를 모험 도항하여 봉천에서 박형룡 이 사람을 찾아 5개월만인 동년9월20일에 귀국, 동년 10월 고려신학교에 부임케 하였다. - 중략 - 당시 송상석 목사는 한국교회의 정통신학교육을 위하여 황해바다에 생명을 쏟아버릴 것을 각오하고 모험맹진 하였으니 그 교회, 신학교육을 위한 절륜(絶倫)의 충성은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뿐 아니라 전 한국교회가 영세불망(永世不忘)하여야 될 일이며 그의 모험구조를 직접 받은 이 사람에게는 백골난망(白骨難忘)이며 결초보답(結草報答) 해야 할 은덕이다 - ”(경남노회(법통)100주년 기념화보집 p5) 2. 고소(告訴)와 반고소(反告訴) 초기 고신측 사람들의 뇌리에 송상석 이름에는 소송의 대명사로, 한상동 이름에는 소송과 상관없이 살아 온 사랑이나 화평의 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다. 송상석 목사의 경우 장로교단 분열로 인하여 파생된 문창교회의 재산권을 두고 195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지루한 법정소송을 해 왔다. 그분과 대척점에 서 있는 한상동 목사의 경우 시무하던 초량교회를 내어 주고 절대다수의 교인들과 함께 삼일교회를 개척하였다. 전자와 후자를 놓고 단순비교를 하는 사람들은 막강한 권리를 내려놓고 맨땅에서 개척을 시도했던 한상동 목사는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로 성장시킨 신령하고 은혜로운 지도자로 추앙하는 대신 장기간 법정투쟁을 계속했던 송상석 목사를 두고는 오랜기간 소송때문에 허비한 막대한 비용으로 예배당을 짓고도 남았을것이라며 은혜는 없고 법밖에 모르는 고집 불통의 사람이라고 혹평하곤 했다. 이런일 말고도 송상석 목사의 경우 여러차례 파수군 (把守軍) 에 게재한 박윤선 교장과의 논전도 그분을 고소 옹호자로 인식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와같은 일반적 인식은 송상석 목사의 본의에 반대 되는 것으로 오해를 증폭시켜 왔다. 정리 하자면 송상석 목사는 고소론자도 반고소론자도 아니다 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분이 저술한 ‘법정소송과 종교재판’ 에는 신자간에 일어나는 송사에 대하여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해 놓았고 또 해방후 한국교회의 교파분열로 인하여 본인이 직접 겪었던 사례들을 예시해 가며 전문가 적인 견해를 밝혀주고 있다. 간혹 신학자나 교회 지도자 중에 고린도전서 6장7절을 근거로 신자간 불신법정에 소송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영역인 국가기관을 인정하는 마당에 정의와 질서유지의 도구인 사회법이나 소송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견해라고 보아왔다. 송상석 목사 에게 아켈리스건으로 작용하는 문창교회 소송건의 내막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을 소송전문가나 고소옹호론자 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문창교회 사건이 지루한 법정투쟁으로 이어졌지만 그 내막을 보면 처음부터 소송으로 가지않고 내부적으로 수습하려는 시도를 했고 송목사에 의해서 먼저 화해제안서를 제시했으나 상대측에서 거부하므로 어쩔수없이 법정 다툼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분쟁의 특수성 때문에 최종심에서도 해결될수 없었던 문제가 결국은 송상석 목사의 제안대로 쌍방이 합의하여 타결된 결과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소송문제와 관련하여 한상동 목사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상동 목사 에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출옥성도의 명망이 있는데다 초량교회의 건물과 재산을 그대로 두고 빈손으로 나와서 개척을 시작하여 대형교회로 성장시켰기에 사랑과 은혜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어 있었다. 그분은 교계와 신학교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법과 원칙에 근거하는 공적인 체계보다 신앙과 은혜, 또는 사랑과 평화를 표방한 나머지 공동체를 지탱하는 규범이나 질서를 흔들리게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고신역사에 굵직한 사건이나 중요한 사안을 두고 자기와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 또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섰던 경우 이를 용납하거나 공존하지 못하고 결국 결별하게 했던 사례가 많이있다. 타교단 인사들이나 고신 교단에 몸담았다가 중간에 떠나간 사람들 중에도 한상동 목사를 아는 사람들 입에서 그분의 독선적 리더십을 비판하기도 하고 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는 편협한 인물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 송상석 목사와의 관계야 말로 고신의 성장과 발전에 공헌하여 다 같이 후세 사람들로 부터 오래도록 존경받아야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 까지 영광의 동지자로 남아야 될 사이임에도 말년에 사회법정 소송이라는 최악의 방법을 동원하면서 목사면직 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하고말았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할때 누구는 소송 옹호론자 이고 누구는 소송 반대론자라는 도식은 성립이 될 수 없고 또 지금와서 그런 문제의 시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본다. 세월이 지나고 인물도 떠나가고 상황도 많이 바뀌어 버린 지금 되돌아보면 한 시대를 휩쓸고 간 소용돌이와 격랑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 결과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3. 반성도 없고 책임자도 없는 어두운역사 고신측 총회에서는 1970년대(1972-1976) 신학교와 교단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급기야 교단분열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진통과 파란을 겪게 되었는데 이런 일로 인하여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표방하던 교단의 위상과 정체성에 엄청난 손상을 가져왔다. 1976년 고신교단이 제26회 총회를 기점으로 소위 고소측과 반고소측으로 분열되었다. 반고소측은 1년뒤 비슷한 명분으로 또 다시 분열하여 고려측(석원태 계) 총회가 따로 조직 되었는데 이후 제각기 신학교를 운영하며 목회자를 배출하는 등 교단의 행세를 해왔다. 반고소측 총회나 거기서 나누어진 고려측 총회도 똑같이 본래 고신총회의 회수를 그대로 사용했고 신학교도 졸업회수를 그대로 이어갔는데 양쪽 다 “고소측 총회가 제24회 총회결의의 공죄를 회개하고 번복할때는 언제라도 하나가 될수있다“는 합동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결국 1982년 32회 총회때 반고소측 총회는 고소측과 합동을 하게되었는데 6년전 나누어질 때 목숨을 걸다시피 했던 본질문제 에는 유야무야로 넘어갔다. 1982년 제32회 총회에서 채택한 합동위원회 보고서 제2항에는 ”우리가 소송문제를 가지고 나누어진 것은 하나님 앞에 피차 죄송스러운 것이므로 하나 되기를 원하여 무조건 하나 되어 지기를 가결해 주실 것을 원합니다“ 라고 되어있다(경남법통노회100년사 P312) 반고소측 총회가 고소측총회와 합동이 된후에 남아 있던 반고소 고려측 에서는 저희들만이 성경진리를 파수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유일한 총회라고 주장해 나왔다.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시차를 두고 점차 고신 본류로의 합동에 가세하면서 사실상 고신에서는 고소와 반고소의 의미는 사라저 갔고 이 문제는 한 시대 또는 인맥중심의 해프닝처럼 되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고신 역사에 반고소 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교단의 분열을 가저 올 만큼 큰 이슈가 되고 신학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진리논쟁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 시기 영향력있는 목회자들과 신학교 교수들까지 가세하여 신학과 신앙의 본질적인 대결로 몰아 갔지만 그 실상은 신학교 이사회의 내분과 교권싸움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이 들어났다. 총회 제23회와 24회는 ‘신자간 불신법정 소송문제’ 에 대한 총회결의가 대세에 따라 엎치락 뒤치락 했는가 하면 같은 조항을 놓고도 편리한대로 적용하는 등 일관성 없었던 총회의 입장이 이면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와같은 전후사정을 살펴볼 때 교단 행정을 책임진 실세들이 자기들의 권력문제나 이해관계에 따라 무고한 교회와 순진한 성도들을 희생시켜 왔다는 점이다. 참으로 ‘고래싸움에 새우가 등터진다’는 말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이없다. 모두가 하나님 앞과 역사 앞에서 뼈저리게 회개하고 책임을 저야 할 일이 아닐수없다. 고신에서 나고 고신에서 자라 목사가 된 나는 소송문제로 야기된 교단의 분열과 합동의 격동기를 겪으며 누구보다 큰 기대와 상처를 다 지니고 있다. 그당시 경남 법통노회를 중심으로 총회와 행정을 단절하고 반고소 총회를 출범하려고 할때 다수의 사람들이 꼭 이렇게 까지 해야 되느냐며 간곡히 말려도 보았지만 지도층 사람들은 “형제끼리 갈라서는 것은 수족을 잘라내는 것 같은 아픔이나 이 길만이 진리를 파수하는 수단이기에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감행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때 나는 그것이 옳은 길인줄 알았고 그 쟁쟁한 선배들의 관록과 정신에 매료되어 더욱 진취적이고 야심차게 지경을 넓혀 나가리라 생각하고 죽기살기로 매진하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가 지나자 어느때 부터인가 겉으로는 쉬쉬하면서 속으로는 그토록 증오하던 고소측 사람들과 합동을 모색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는 소송이 비성경적 이라거나 특별재판국의 부당한 권징과 교권의 횡포에 대한 책임문제 같은 것은 논외로 하고 무조건 하나되는 것 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굳혀져 가는 것 같았다. 1980년 11월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임박했을 무렵이다. 어느편으로 송목사님께서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다녀 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즉시 마포에 있는 따님 댁으로 갔더니 목사님은 기력이 쇠약하여 숨쉬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나의 손을 꼭 잡고 의미있는 당부를 하셨다. 그것은 두가지 내용이었다. 첫째는 제일문창교회 원로목사 집무실에 소장되어있는 자료들을 손목사가 맡아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정리해 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또한가지는 본론격인 고소측과의 합동문제였다. 자기는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인데 같은 형제끼리 싸우다 찢어진 상태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나누어진 형제가 하나 되도록 젊은 목사들의 마음을 모아서 동참해 달라는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연로하신 목사님의 이 마지막 당부를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그 당시 목사님께서 오직 성경진리를 파수하기 위한 일념으로 골육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일이라고 역설하셨지 않습니까”하고 거부의사를 분명히 해 버렸다. 적어도 진리투쟁을 표방했던 반고소 운동이 아무 명분도 없는 합동을 한다는 것이 소신있는 목사들의 행동일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때 목사님은 마지막 명언 곧 “진리를 붙잡는다고 화평을 포기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진리도 놓치고 화평도 버린 결과가 되고말았다” 는 말을 남기셨다. 송상석 목사가 떠나 간지 2년후 1982년 9월 마산교회당에서 개최된 제32회 총회에서 고소측 총회와 합동하기로 가결하였다. 그때 나는 역사적인 합동결의 안을 의결할 때 총회 서기로 집무를 하고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합동결의가 대세였으나 교단분열 이후에 목사가 되었거나 외부에서 가입해온 목사들을 중심으로 젊은층 일부까지 반발하는 세력들도 있어서 긴장이 감돌았다. 사회하던 총회장이 가부를 물어 만장일치가 되었는데도 반대하는 세력의 눈치를 보며 가결 선언을 늦추기도했다. 물론 서기석에 있던 나도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않았다. 침묵은 묵시적 찬성에 해당한다. 회장의 가결이 선언되고 회중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저 나오기도 했다. 그럴때 나는 손을들고 발언권을 얻어 발언대에 섰다. 그때까지 내가 앞장서서 반대발언을 해 주기를 기대하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와서 왠 뒷북이냐’는 식의 비웃는 눈으로 처다 보는 것 같았다. “....6년전 진리파수를 표방하고 반고소 고려측 총회가 출범했으나 지금와서 조건없이 합동한다고 하니 착잡한 마음 금할수 없습니다. 다만 나누어진 형제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모두가 찬성하는 일에 차마 반대할수 없었습니다. 한가지 제안을 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동안 이 일로 인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순진한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혔던일은 마땅히 책임을 저야 할것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그당시 목사와 장로들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숙할 것을 결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는 잠시 숙연한 듯 말이 없었으나 누구도 찬성하는 사람없어서 소리없는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말없는 다수 가운데 겉으로 박수를 쳤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허탈하였고 그동안 우리는 헛개비를 보고 쫓아 다녔던가 싶은 비통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사의 언행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배들은 1960년 승동측과 합동했다가 3년뒤 전격적인 환원을 하고 그해 9월 남교회에서 모인 제13회 총회에서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사와 장로들이 자숙을 결의한바가 있었다. 성경전체 중에 고린도전서6장만이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목숨걸고 지키겠다고 전면에 나섰던 사람들이라면 어떤 형태라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마땅했다. 4. 누가 분리주의자 인가 일반적으로 “고려파 분열의 중심에 송상석 목사가 있다”는 말을 하곤한다. 이 통념에 동의할 수가 없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도 하는데 그 말에도 동의 할수없다. 고신24회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고 경남법통노회의 다수를 권징한 것은 송상석 목사 문제가 핵심이었다는 것은 부인할수 없다. 그러나 26회 총회 부터 고소측과 정상화를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꾸준히 합동교섭을 해 왔는데 거기에도 항상 송상석 목사가 걸림돌로 작용하여 그분 생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파다해 있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인 송상석목사의 입장도 그랬을까? 이 부분 일반에 알려지지않은 사실이 있다. 송상석 목사 본인 입장에서는 고려신학교 설립과 발전에 이바지 한 일이나 이후에 일어난 어려운 고비마다 궂은일을 마다않고 수습하며 그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으로 헌신 하여 발전시킨 교단이다. 일반적으로 송상석 목사를 고신의 세기둥(항상동,송상석,박윤선)중의 한축 이라고 말하지만 알고보면 법과 행정적 기반을 제도화 하고 장기적인 비젼을 제시하여 선진교단으로 발전하게 하는데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말년에 후배들로 부터 목사의 생명을 거두어 버리는 극단적 징벌을 받았으니 그 울분이야 오죽했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와같은 인식은 고려신학교와 총회의 설립부터 성장하는 과정에 그분이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살펴보면 자명한 대답이 나온다. 우선 신학교와 관련된 일만 보아도 그렇다. 고신을 설립할 때 적어도 평양신학교의 정통성을 계승해야 된다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초대교장으로 박형룡박사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본인이 직접 5개월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황해를 도항하는 모험을 감행하여 만주 봉천에 있던 박형룡 박사를 모셔다 교장에 앉힌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1960년 박윤선 교장이 신학교를 떠났을때와 그 후에도 여러차례 학교에 갈등과 알력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며 수습하여 공적 위상을 세우고 발전의 기틀을 이루어놓았다. 1960 승동측과의 합동을 하고 곧이어 한상동 목사 주도로 단행된 고신복교와 총회 환원으로 엄청난 혼란이 거듭 되었지만 그 많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뒤치닥 거리를 하며 총회의 안정을 도모해 왔던 것은 그분의 탁원한 지도력과 행정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점은 부인할수가없다. 타교단 사람들의 눈에 비췬 평가중에 한상동 목사는 출옥성도의 명성과 혁명가적인 지도력을 행사하여 교단에 상징적 인물로 알려저 있지만 다른 한편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는 공존하지 못하고 떠나 가게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다. 송상석 목사 역시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도 센 편이지만 사람을 내치거나 분열을 조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목사가 되기전부터 YMCA를 중심으로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청소년 금주금연을 위한 법제정까지 얻어 내기도했다. 또 국내외 구분없이 문서운동과 언론활동에도 종횡무진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사회 각계층의 인물들과 폭넓은 교우관계와 인맥을 넓혔던것은 그분의 포용력과 대범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5. 제24회 총회 특별재판국 결의는 무효되어야 나는 3년전 이상규 교수의 <송상석과 그의 시대> 출간에 간여하게 되었다. 참으로 어렵사리 원고를 수집하여 교정을하고 여러번 힘든 과정을 거처 출판작업에 들어갈 무렵인데 미국에 있는 송상석 목사의 4남 송병일씨가 강력하게 반발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는 처음 이교수가 자기 아버지에 관한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 고맙게 생각하면서 큰 기대를 가졌었다고 했다. 그런데 편집된 내용을 보니 집필진 가운데 송상석 목사 에게 등을 돌렸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제58회 고신총회가 경남노회의 헌의를 받아 송상석 목사를 사면하기로 결의 한것에도 강한 불만과 분노를 표출했다.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사문서 위조, 공금횡령, 총회불복종 등의 죄목으로 목사면직까지 단행 해 놓고 수십년이 지난 후 파렴치범 이나 다름없는 죄목을 그대로 둔채 마치 은전이나 베풀 듯이 용서한다는 뜻의 사면을 결정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다. 평생을 목사로 살아온 원로에게 씻을수 없는 죄목을 공표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목사 면직까지 시켜놓은 자들이 고작 ‘사면’이라는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을 상쇄할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그당시 총회에서 송상석 목사의 사면과 복권문제가 거론될 때 많은 논란이 있은 것으로 안다. 정당한 권징이었다면 반드시 당사자의 회개와 공적 고백이 따라야 된다는 논란도 있을법하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된 그분의 경우 사과나 고백은 당연히 있을수 없지만 생전에도 본인이 그 재판의 절차나 과정이 불법이었고 결과 또한 승복할수 없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한때 고려파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까지 흔들어 놓았던 “신자간의 불신법정 소송”문제가 총회 전체의 뜨거운 감자였지만 결국 송상석 한사람 정죄하여 면직시키는것으로 논란의 종지부를 짓고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니 더는 할말이 없게되었다. 고신총회 안에서 송상석 목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나 그 이후의 사람들 누구도 그분을 향해서 정죄 하거나 용서할 정도의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교단에 끼친 공로나 업적은 차치하고라도 정말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권징을 당하고 면직을 받을만큼 해악을 끼쳤다고 생각할수있을까. 오히려 그와 대척점에 섰던 한상동 목사나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벌어졌던 중요한 사건들 중에는 교회법으로나 사회법으로 도저히 용서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사실이 들어나곤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1967년에 있었던 사조이사단 사건의 경우 신앙적으로나 사법적으로 용납될수없은 엄청난 범죄였지만 송상석 목사는 불법을 조장하고 가담한자를 사법에 고발하거나 확대 시키지 않고 사과를 받는 것으로 수습하고 끝낸일이 있다. 누구보다도 법률지식과 사리에 밝은 송상석 목사측에서 그때마다 사직당국에 고발하고 권징으로 다스렸다면 총회가 편안하게 오늘까지 존속될수 있었을까.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 변죽만 울릴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본론을 짚고 나가야 될 것이다. 제23회 총회에서 불신법정 소송 문제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천명해 놓고 이듬해 다시 번복하여 특별재판국 설치와 송상석 면직까지 거사를 강행 했던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제24회 총회의 결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쳐놓으면 다른 것은 저절로 원인 무효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만큼은 언제든지 고신 총회가 한번은 풀고 가야 될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 일은 필자를 비롯하여 그 시대를 살았고, 그 살벌한 대립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 분열의 소용돌이 휘말렸다가 아픈 상처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다같이 통감할수 있는 정확한 해법임이 분명하다. 한국교회는 지난날 공회가 잘못된 결의를 하여 역사적 과오를 남긴일이 있었지만 사후에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 잡게한 전통이 있다. 1946년 6월 12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32회 총회는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승인한 결의에 대하여 이를 총회가 저지른 범죄로 시인하고 취소결의를 한 사례가 있었다. 3년전 인천 초원교회에서 거행된 <송상석과 그의시대> 출판기념 예배에서 축사를 한 고신대신대원 신원하 원장은 송상석 목사와 관련된 사건을 두고 “우리 고신총회 역사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이라고 말 했다. 사실이 그렇다. 개혁주의 신앙은 언제든지 회개하고 새로운 출발을 강조한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잘못된 것을 덮어놓고 뻔히 알면서 모른척 한다고 미화될수 는 없다. 그야말로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불편한 진실은 어떤 경우에도 밝혀 져야 되고 언제든지 제자리에 돌려 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1979년 여름 어느날 나는 마산 상남동 송상석 목사 자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분의 역작 <한국절제교육 연구사료집>을 출간하고 친필 서명을 한 책을 전달하고자 부르셨던 것이다. 그날 긴 시간에 걸처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한상동 목사에 대한 그분의 감정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누구는 꽃상여 차를 타고 수많은 인파의 환송을 받으면서 영광스럽게 떠나갔지만 나는 이 책 한권을 손에 들고 하나님앞에 서려고 한다” 고 하시는데 그 얼굴에 여러 가지 회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때가 한상동 목사 돌아가신지 3년반이나 되었지만 세상 떠난분을 들먹이면서 아직도 삭이지 못하고있는 감정이 묻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1976년1월 한상동 목사가 돌아가시자 고신대학교 강당에서 총회장으로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 하였는데 그날 송도에서 서면을 거처 동래로 이어지는 장례행열에 엄청난 인파와 차량이 동원되어 부산이 생긴이래로 가장 큰 장례식이었다는 말이 나왔다. 오랜기간 송상석 연구에 몰두해 온 강종환 장로는 “송상석 목사의 재평가를 위한 제언”에서 “비록 송상석 목사에 대한 1974. 12. 6. 고신총회 특별재판국의 ‘목사면직’이라는 결과에 대하여 제58회 총회에서 ‘사면’을 결의하였지만 사면하였다고 역사적 사실이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제1회 송상석기념포럼 p89)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근래에 들어 송상석목사에 관한 출판물이 나오고 그분에 대한 기념 사업들을 벌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기대할 일임에 틀림이없다. 그러나 당사자인 송상석 목사나 그분의 유족들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고인의 숨겨진 업적을 들어내고 그 이름을 높이 칭송해 준다고 한들 형사범으로 정죄하여 목사직을 거둔채로 세상을 떠나게 한 그 상처와 응어리는 삭여지거나 없어지지 않을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지난날 고신 총회가 송상석 목사를 면직 처리한 일은 하루빨리 고쳐 놓아야 할 과제라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 만이 고인에 대한 올바른 도리이며 한맺힌 가족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차제에 송상석 목사 기념사업회가 벌이고 있는 사업들 중에 일차적인 목표를 송상석목사를 면직시킨 제24회 총회 결의를 번복하게 하는 것으로 그 방향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결국 결자해지(結者解之)차원에서 총회가 풀어야만 되는 과제인 것이 확실하다. 송상석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지 44년, 총회가 특별재판국을 설치하여 면직을 시킨지 50년이 되었다. 반세기가 지나는동안 세대로 바뀌었고 주변의 상황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지만 아직도 남아았는 이 상처와 앙금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풀고 가야될 역사적 책무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표방해온 고신의 정통성과 권위를 회복하는것이며 또한 오고오는 후학들에게 자랑스러운 코람데오의 정신을 이어가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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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06
  • KUPM 40주년, 제40회 선교대회
    KUPM 40주년, 헌신의 발자취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향한 비전을 세우다. 전국대학교수선교연합회(KUPM, 이하 KUPM)는 CCC교수회와 함께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서울대학교 평창캠퍼스에서 제40회 연합 선교대회를 개최하여, 지난 40년간 하나님의 주권 아래 걸어온 헌신의 여정을 돌아보고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향한 거룩한 이정표를 세웁니다. KUPM 40년사 편찬위원장 이선복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는 회고와 전망 분과는 눈물로 씨앗을 뿌리던 태동기부터 팬데믹의 고난을 넘어 제2의 도약을 일구기까지의 6단계 역사를 되짚어보는 감사의 장입니다. 이 시간은 전국 12개 지회와 7개 위원회의 사역 현황을 점검하며 KUPM의 저력을 확인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캠퍼스를 섬겨온 선배 교수들의 수고에 존경을 표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의 발자취를 깊이 성찰하는 것은, 변화하는 대학 환경 속에서 차세대 리더십 양성, 글로벌 선교 확대, 그리고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라는 미래 과제를 향한 지혜와 동력을 얻기 위함입니다. 미래를 향한 청사진: AI 시대, 디지털 복음 생태계를 구축하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 위에서 KUPM은 미래를 향한 담대하고, 획기적인 청사진을 과감하게 펼쳐 보입니다. 바로 AI 시대 학원복음화를 위한 디지털 생태계 조성을 위한구체적인 대안, '학생-교수-CEO 멘토링 플랫폼' 개발입니다. 남승호 교수(서울대)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 세션에서는 먼저 ‘AI시대 학원복음화를 위한 기독교수와 CEO의 역할과 소명’을 주제로 강용현 교수(CCC 대외협력위원장)의 주제 특강이 진행됩니다. 이어서 한석영 교수(인제대)가 학생/교수/CEO 1:1 멘토링 시스템 구축을 위한 플랫폼 개발 방안을 발표하고, 황홍섭 교수(KUPM), 문용재 교수(CCC), 정승영 위원장(CBMC)은 플랫폼 개발에 따르는 세부적 요소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세대의 학업과 진로, 신앙을 통합적으로 섬기기 위한 KUPM의 미래지향적 고민과 준비가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증명합니다. 사명, 학문이 기도가 될 때: 전문성으로 빚어내는 사역의 실제 물론, 이처럼 거대한 미래 비전이 구호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사역을 감당하는 교수들의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교대회의 핵심 정체성은 ‘기독교수이기에 가능한 고유한 사역’에서 가장 선명하게 빛을 발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손녀, 손자, 다음 세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은 시니어 교수의 역할 조명(이상식, 계명대)과 대학원생 선교 전략(남승호, 서울대)으로 구체화되며, ODA 국제협력(장요한, 계명대), 영어 리더십를 통한 프리이벤절리즘(김영우, 한국교통대), 글로벌 교육선교(박창일, 계명대) 등 각자의 전문성은 세계를 품는 선교의 도구가 됩니다. 또한 유학생을 위한 한글학교(정동영, 한국외대), 문화예술을 통한 세계관 표현(황승림, 조선대) 등 마음의 문을 여는 따뜻한 접근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 전도(금상호, 충북대), 캠퍼스 교회 개척(임경철, LDI) 등 실전적 모델들은 '학문이 기도가 되고 캠퍼스가 선교지가 되는' 살아있는 간증들입니다. 감격의 절정: 이론이 사명이 되고, 다짐이 헌신이 되는 '교수선교사 파송식' 이 모든 과거에 대한 감사와 미래를 향한 비전, 그리고 현재의 다채로운 헌신은 마침내 하나의 거룩한 예식, '교수선교사 파송식'에서 감격의 절정을 이룹니다. 한재호 교수(고려대)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 파송식은 "모든 교수를 선교사로 세우라"는 대회의 심장이자, 선교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임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이론이 사명이 된 교수들이 오정수 교수(충남대)의 메시지와 이지형 교수(고려대), 김성현 교수(건국대)의 간증을 통해 교수선교사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한번 공고히 합니다. 이 파송식은 40년 헌신이 맺은 가장 아름다운 열매이자, 각자의 캠퍼스와 세상 속으로 보냄 받는 복음의 사절단이 새로운 40년의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을 선포하는 가장 빛나는 약속의 시간입니다. 다채로운 시간들: 다음 세대를 깨우는 영성과 지성의 만남 그 외에도 다채로운 행사과 분과들이 있습니다. 대회 첫째 날 저녁의 대미는 휘닉스파크 야외대공연장에서 열리는 CCC 대학생수련회 저녁집회가 장식합니다. 이 집회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수많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뜨거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예정입니다. 대회 둘째 날에는 다음 세대가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다채로운 특강이 이어집니다. 김지연 약사(한국가족보건협회)가 '건전한 대학생활'을 주제로 마약퇴치 및 자살방지 캠페인에 대한 실제적인 강의를 진행하며, 이어서 박명룡 목사(청주 서문성결교회)는 '다음 세대를 살리는 기독교 변증'을 주제로 심도 있는 영적 무장을 돕습니다. 그외에도 미래 선교를 위한 중요한 연합의 장도 마련됩니다. KUPM이 CCC, CBMC, 한국가족보건협회와 각각 연합을 공고히 하는 MOU 체결식을 통해 다음 세대 사역을 위한 협력 체계를 더욱 굳건히 다질 계획입니다. KUPM 선교위원장 황홍섭(부산교대)는 KUPM과 CCC의 40주년 연합대회를 'KUPM 40년 지성과 영성 사역에 CCC 동력이 결합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이번 연합은 교수-학생-기업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통해 다음 세대의 진로, 신앙, 학업, 취업을 통합 지원하는 지속가능한 복음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합니다. 단순한 40주년 기념을 넘어 미래 캠퍼스 선교의 실질적 동력을 확보하는 위대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문의: 박신현 교수(고신대, KUPM 증경회장) 010 3882 0759, shinhyunpa@naver.com
    • 기고/강연
    • 기고
    2025-06-17
  • (기고)합창하는 목사의 즐거움
    ‘고신목사합창단’이 창단 된지 8개월 정도. 목사가 합창을 한다. 그냥 참 좋다. 목사님들 만큼 ‘찬양합시다. 아름답게 찬송합시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없을 뿐 더러 목사님들 만큼 ‘준비하지 않은 찬양, 아름다운 선율을 연습하지 않고 찬양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목사님은 주로 받은 영감대로 감정대로 찬송을 인도하면서 찬송한다. 그래서 목사님은 찬양대원을 부러워한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찬양대원으로, 전도사 시절에는 지휘자로 봉사하였다. 그만큼 음악적 재능이 있고 개발된 분들이다. 그런데 합창할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 했을 뿐이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했고 교회 중고등부 찬양대원, 학교 합창부였다. 음악을 즐기는 음악 애호가이지만 목사 안수 이후에는 합창을 할 기회도 찬양대에 설 기회는 없어서 부러워했다. 고신교단 목사님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창단되어 70을 눈앞에 두고서야 합창을 연습하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있다. 그냥 참 좋다. 합창을 하다 보니 몇가지 큰 즐거움을 누린다. 첫째는 집중하고 긴장하는 순간의 쾌감을 갖는다. 합창은 지휘자의 손짓, 눈빛, 몸짓, 표정에 집중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지지 않으려는 긴장이 있다. 예배 인도 이전의 긴장이나 설교단에 오르는 긴장과는 결이 다르다. 긴장이 주는 희열이 있다. 반주 음을 집중해서 듣는다. 기준을 잃지 않으려는 반주음 듣기는 음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집중이다. 옆 사람의 소리를 집중하여 듣는다. 가끔은 저 멀리 있는 동료 단원의 소리도 듣는다. 그렇지 않으면 튀어 나와서 합창을 그르치게 된다. 다음은 음악을 만들어 가는 즐거움이 있다. 음악 애호가로서 그냥 감상할 때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수월하게 들었지만, 연주자가 되어 음악을 만들면서 표현하려니 쉽지 않다. 미켈란젤로가 말한대로 ‘사소한 것들이 완벽함을 만든다’ 또는 ‘God is in the details.’라는 독일의 건축가 Ludwig Mies van der Rohe의 말처럼 사소한 것, 디테일이 중요한데 잘 되지 않는다. 음표의 점 하나 꼬리 하나 놓치지 않아야 하고 반음도 살리려고 연습을 한다. 지휘자를 따라 연습에 연습을 하고 고치고 익히는 훈련과정을 지나면 어느덧 음의 고저 장단 강약이 어우러진 음악이 된다. 즐겁다. 또 다른 즐거움은 교제다. 나이 60을 지나면서 작심한 것 중 하나가 새로운 사람과 엮이지 않고 맺어진 인간관계를 잘 맺어 가자는 다짐이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고 음악을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을 지나면서 노래하는 동료 목사님에게 친근감, 심지어 동지애가 생긴다. 찬양으로 엮어지는 형제구나. 형제가 동거함이 아름답구나!
    • 기고/강연
    • 기고
    2025-06-17
  • (제언)고령화시대의 설교자들에게 제안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지공거사(지하철 무임승차 경로우대 어르신)가 듣는 안내 방송은, “슈크림 도어가 열립니다. 발 빠진 쥐 발 빠진 쥐. 전통차와 생강차 사이가 넓으니 맥이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듣는 정확한 내용은 “스크린 도어가 열립니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내리실 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웃고픈 현실이다. 난청 어르신들은 불편하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지만, 노인성 난청도 그 중 하나다. 교회에서는 노인성 난청 성도가 설교를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어 예배에 소극적으로 참예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의사 신문에 따르면 인구 20% 이상이 노인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난청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는 20대에 성장이 멈추고 30대부터 서서히 노화가 시작되는데 40대가 되면 시력이 떨어지면서 노안을 위해 돋보기 안경을 쓰기 시작한다. 귀도 마찬가지로 노화에 따라 청취 기능이 점점 떨어져 70대에 이르면 3명 중 1명이 난청을 겪게 된다고 한다. 노인성 난청 인구가 늘어 남에도 교회는 난청 어르신들을 위한 배려가 거의 없는 현실이다. 아니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회 설교자가 연로하신 어르신들에게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로하신 분들은 난청으로 설교를 잘 알아 듣지 못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면서 끄덕 끄덕 거리시고 찬양도 할 수 있는 척 지혜롭게 처신하신다. 60세 이상 어르신들의 난청이 생각보다는 심각하기 때문에 예배 중 설교를 어느 정도 알아 듣는지, 대표 기도에 어느 정도의 진심을 담아 아멘으로 화답하는지, 그냥 체면상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닌지 꼼꼼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인성 난청 어르신들이 늘어 나는 고령화 교회를 위해서 몇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1. 시청각 교재(PPT)를 활용하자. 교회마다 빔프로젝터에서부터 고화질의 대형 LED까지 잘 구비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그 좋은 영상 시설로 강단 위 주인공의 얼굴, 소지하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찬송가 가사, 성경 본문 정도만 보여 준다. 영상 시설을 설교할 때 시청각 교재로 사용한다면 좋겠다. 50-60년 전 주일학교에서는 괘도(걸그림) 융판, 환등기 등을 이용한 시청각 교육으로 주일학교는 재미가 있었다. 교육의 효과적인 측면에서도 듣기만 한 것은 10%, 본 것은 50%, 체험한 것은 80%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설교자 대부분은 말로 설교하고 청중은 듣기만 하는 실정이니 교육 효과가 아주 낮다. 교회의 영상 시설로 PPT(PowerPoint)를 많이 사용하자. PPT를 세련되게 제작하면 좋겠지만, 어설프고 간단하게라도 요약된 내용을 청중이 읽으면서 설교의 흐름을 따라 을 수 있을 정도라도 PPT를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요즘 텔레비전을 시청해 보면 대부분의 방송들은 음을 소거해도 그 흐름을 충분히 따라 갈 수 있을 정도로 자막을 많이 사용한다. 굳이 화면에 설교자 얼굴을 내어야 한다면 자막 문화가 대세이니 설교 내용을 자막으로 보내어도 좋겠다. PPT를 제작하여 사용해 보면 설교자에게도 유익이 크다. 큰 제목 작은 제목을 정하고 주제 또는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PPT를 만들게 되면 설교하기에도 좋다. 설교를 완전 파악하니 청중과 눈을 맞출 수도 있다. 거기에 지도 그림 등을 찾아 사용하면 더 분명하고 쉽게 성경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2. 난청 어르신들을 위한 또 다른 대안으로 헤드폰(이어폰)을 비치하자. 드물기는 하지만 외국인을 위하여 통역을 하면서 헤드폰(이어폰)을 비치하는 교회가 더러 있다. 난청의 어르신들은 외국어로 설교를 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듣지 못하니 헤드폰(이어폰)을 제공하여 또렷하게 설교를 듣고 예배에 편리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3. 더 나아가 목회적 차원에서 보청기 착용을 권하고 지원하자. 노인 인구 중 보청기가 필요한 중등도 난청 유병율이 20-25%라고 한다. 교회 로비에 돋보기가 비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본다. 노안이 오면 돋보기를 사용하듯이 난청이 오면 보청기를 착용하여 설교 말씀을 더 또렷한 소리로 들으면 좋지 않겠는가. 문제는 보청기는 고가이다. 교회가 목회적 차원에서 소액이라도 지원하면서 보청기 착용을 권하면 좋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노화된 귀는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천하보다 더 귀한 어르신들이 난청이지만 말씀을 더 잘 듣고 예배에 더 능동적으로 참예할 수 있게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교회가 많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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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7
  • (기고)“중보기도의 능력 체험담 과소평가 해온 원로장로”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왔다. 가족들과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부르짖는 중보기도 덕분이었다고 간증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말 못하고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체로 누워있었다. 2024년 4월 2일 오전 8시30분경 이었다고 전해졌다. 의사들의 파업으로 병원은 적막했으나 당번이 마침 신경과 의사였기에 완벽한 처치를 마치고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중환자실의 첫날밤 의식은 있으나 말을 못하고 손발이 경직되어 불구자에 가까웠다. 밤은 깊어 갔다. 자정 무렵 비몽사몽간에 낮 익은 통성기도 소리가 우렁차게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 여러 갈래의 기도들이 아름다운 색줄기를 이루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사푼사푼 내려오고 있었다. 이런 기도소리 중에는 아버지의 97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해외에서 온 딸들의 부르짖음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장로님, 김 장로님을 지켜달라는 성도들과 동료 장로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신기하게 들려왔다. 심지어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일가친척, 심지어 내가 섬긴 한상동 목사, 한경직 목사, 강원용 목사, 정진경 목사, 강병훈 목사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김준곤 목사와 조용기 목사는 웃으시면서 돌아갔다가 그때, 그 시간에 오라고 타일렀다. 나는 이 소리들이 바로 나의 급변 소식을 듣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중보기도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새벽 5시경이었다. 간호사가 와서 말했다. "어르신, 아까 찬송 부르셨지요? 할렐루야 아멘도 몇 번 하셨어요" 나는 다음 순간 말문이 열렸다. “아~아 그래요?” 그리고 손발도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그날아침 그러니까 생일날인 4월 3일 아침 나는 새로 태어남을 느꼈다. 이날따라 병원식은 미역국 밥이었다. 그 후 3일을 중환자실에 있다가 주치의 처방에 따라 하루를 일반병실에 머문 후 입원 닷 새만에 퇴원 귀가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범사에 함께 하심을 믿는다. 그날아침 7시 18분쯤 미국에서 온 둘째 딸 원숙이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진 아버지에게 오찬 약속 확인 차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았으나 말을 못하고 중얼대니 사고가 크게 난 줄 알고 종로에서 마포집까지 달려왔다. 뒤이어 도착한 사무국장 이희연은 무조건 지체없이 119를 불렀다. 골든 타임이 남아 있었다. 의사들이 파업 중인데 그날아침 응급실 당번이 신경과 의사여서 일사천리 치료가 가능했다. 중환자실도 많이 비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 릴레이식 중보기도의 응답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퇴윈 후 천국에 갖고 가지 못 할 세속적인 물질이나 가치관들을 가차없이 정리하고, 상대화 하는 길을 향해 걷기로 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멀리한 독선적 신앙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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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4
  • [기고] 백해무익한 재판국원의 자격 시비
    기독신문 제2417호(2023.12.19일자)에 “재판국 서기 박종일 목사 ‘자격 논란’ 불거졌다.”라는 신문 기사가 보도되었다. 필자는 사건의 내막을 알지 못하므로 신문기사의 내용을 토대로 재판국원의 자격 여부에 관련해서만 글을 쓰고자 한다. 1. 잘못된 헌법 적용  재판국원의 자격을 제기한 이재천 목사는 “박종일 목사는 권징 조례 제19조 상회 지시도 위반했다. 우리가 판결을 해도 누군가 박목사의 자격 문제를 건다면 판결이 무효가 될 우려가 있다.”라고 부질없는 염려를 하는 것 같아 보인다. 권징 조례 제19조의 “… 상회가 하회에 명령하여 처리하라는 사건을 하회가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부주의로 처결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처결권이 있다.”라는 헌법 규정은 “단순하게 상회가 하회에 시행할 것을 지시한 후 하회가 시행하지 아니하면 상회가 직접 시행하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시사항 외에 어느 누구를 시벌 한다거나 회원권 여부에 결부하는 것은 지나친 넌센스에 다름 아니다.  또한 이재천 목사는 권징 조례 제91조에 “소원자나 피소원자 된 하회 회원 등은 그 사건 심의 중에는 상회의 회원권이 정지 된다.”라는 헌법 규정을 오해하였다. 이 목사는 “권징 조례 제91조에 따라 박종일 목사의 재판국원의 자격이 정지되어야 한다.”라고 확대 해석하였으나 본 규정은 “소원이나 피소원 된 하회의 회원은 상회에서 그 사건을 심의하는 중에만 잠시 회원권이 중지 되는 것뿐이요, 재판국원 자격이 없다거나 재판국의 서기 자격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에 관하여는 재판국장이 “과거 재판국장에 대한 상소가 올라 왔는데 그대로 자격이 유지됐다.”라고 사례를 밝힘으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것 없이 잘 처리되었다고 본다. 2. 제안자 반대 불가의 원칙 제안자 반대 불가의 원칙이란 자기가 제안한 안건은 결코 자기는 반대할 수 없다는 법리이다(교회 법률 상식 pp. 46-47). 예를 들면 어떤 교회가 예산편성을 할 때에 예결산 위원회가 제직회에 제안하면 제직회에서 예결산 위원은 안건에 결코 반대할 수가 없고, 제직회가 결의해서 공동의회에 제안하면 제직회원은 제직회를 할 때 찬성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을 무론하고 공동의회에서 반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총회 재판국원이나 재판국의 임원들까지도 모두 다 재판국원들이 세웠는데 본인들이 뽑아서 세워 놓고 자격이 없으니 물러나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재판국원을 총회가 세웠을 때 재판국원들도 총회원이요, 임원을 세울 때도 재판국원들이 세웠으니 국원들이 제안자로서 재판국원들끼리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시비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곧 법이 정한 바이다(권징 조례 제94조). 3. 결론 일부 재판국원들이 “재판국원끼리 서로 보호해야 한다며 해당 문제는 잠재하자는 주장”과 같이 백해무익한 재판국원의 자격 시비는 종결하고 최종심인 총회 재판국의 면모로서 오직 법으로 승리하는 재판국의 판결을 기원한다.
    • 기고/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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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강연] 기독교인들에게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본고는 백양로교회(담임목사 김태영)가 운영하는 사단법인 디아코니아부산에서 마련한 디아코니아 지상포럼의 발표 내용을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1.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인문학이 왜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리해 두어야겠다. 우리가 인문학(人文學, Studia Humanitatis)이라고 할 때 이 말은 문사철, 곧 문학과 역사 철학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는 말은 흔히 자연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을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할 때 인문학이란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그 광범위한 의미란 바로 인간을 위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포괄하는 보다 광의의 인간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과학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없다. 과학이나 기술이 장인(匠人) 혹은 기술인(技術人)을 양성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움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전공에 앞서 인문학 관련 강좌를 듣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공과대학이 짧은 기간에 전문적인 기술인을 양성한다는 목표아래 학부 1학년 때부터 자연과학 분야만으로 구성된 교과를 운영한바 있으나 몇 년이 못가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공과목을 가르치기 전에 인문 혹은 사회과학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 교과를 개편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의사가 과학과 의료기술로만 무장되어 있다면 로버트와 같은 의료인이 되고 말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기에 의과대학에도 의무적으로 인문학교실을 두게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대학교육은 물론이지만 인간 교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그런데 근년에 와서 인문학이 천대를 받고 있다. 문학이나 역사나 철학을 공부해도 취업에 어렵고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이다. 사회전체로 볼 때 자연과학이나 공학이나 의학이 발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 인문학적 토대가 없으면 건실한 사회가 될 수 없고 어쩌면 인간 상실의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인간 없는 과학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제 우리나라에서 인문대학은 인기가 없어 폐과되거나 다른 학과와 통폐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인문학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이 강조되고 고전 읽기도 권장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문학은 왜 필요한가? 두 가지로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설교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런 말이 있다. “성경만 아는 사람은 성경도 모른다.” 성경과 성경이 기록된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 문화, 역사, 사상, 종교 등 인문학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칼빈은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교했을 때 신학예비과정을 개설했다. 성경과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인문학적 소양을 터득하게 하기위해 신학예과를 설치한 것이다. 제네바 아카데미의 신학 예과 과정에서는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등 성경 언어만이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했고, 중급과정에서는 호머, 키케로, 버질, 크세노폰, 폴리비우스 등의 작품을 읽게 했고, 고급과정에서는 키케로나 데모스테네스의 웅변술 등 수사학을 공부하게 했다. 즉 고전과 고전어, 철학과 변증, 논리학과 수사학을 공부하게 한 것이다. 이런 인문학적 바탕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바르고 풍요롭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인문적 소양의 무지 때문에 성경을 왜곡하거나 곡해하고, 독단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하거나 비 논리적인 독단적인 해석하는 경우는 대체적으로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만 아는 사람은 성경도 모르게 된다. 1830년대 인도로 갔던 서구 선교사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성경과 기독교를 가르치기 전에 문자와 언어, 기초교육이 없이는 인도에 건실한 복음주의적인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세워 먼저 글자와 문자부터 가르쳤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으면 인간과 사회, 성경과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근대의 선교학교(mission school)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무지와 억지, 반지성주의에 빠지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문학은 인간, 혹은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문학은 구원받아야 할 전도(선교)의 대상인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만들어 준다. 인문학의 대상은 인간이고, 인문학의 본질은 그러한 인간성을 탐구하는 데 있다. 인문학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 왔기 때문에 인문학(人文學)은 사실은 인간학(人問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과 인간의 본질, 인간 삶의 환경에 대한 폭넓은 지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지식이지만 특히 목회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 대상은 인간 곧 ‘사람’이다. 따라서 목회를 잘하려면 사람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목회자가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도의 대상인 인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 인문주의자였던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서두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De cognitione Dei)은 우리(인간)를 아는 지식(De cognitione hominis)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이른바 이중지식을 다루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고, 우리 인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인간에 대해 사유하고 질문하면서 인간다움 삶을 살게 하는데 유용한데,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은 오직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인문학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해 주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의존적 존재라는 점을 알게 해 준다는 점이다. 3. 기독교와 인문학 기독교와 인문학을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5세기 이후의 인문학(인문주의) 운동은 종교적인 운동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기의 인문주의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과 기독교를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개혁사상의 토대를 형성했던 사람들은 다 르네상스 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인문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루터도 그러했고 칼빈도 그러했다. 인문주의 교육이 개혁운동의 바탕이 된 것이다. 인문주의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인물이 츠빙글리였다. 그는 사실상 종교개혁자이기에 앞서 인문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혹은 인문학과 기독교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가진 이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인문주의를 서구에서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하는데, 이를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해석한다면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인본주의는 인간중심주의로서 신중심주의와 대조적인 의미로 받아드려지는데,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인문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문주의, 곧 휴머니즘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리스와 로마의 언어와 문학에 강조점을 둔 교육의 형태였다. 곧 지금의 인문학이었다. 이 시대의 인문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라틴어 ‘ad fotes,’ 곧 ‘원천에서’ 혹은 ‘원천으로부터’였다. 즉 인문주의란 “원래의 자료들로 돌아가자(go back to the original sources)”는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는 문화 운동이었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은 그 ‘원천’을 ‘성경’으로 보아 오직 성경, 곧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이다. 정리하면 인문학(humanities)을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나 인도주의(人道主義)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취급하며 사색하고 질문한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적 소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과 사회를 건실하게 성찰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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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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