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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가정의 달, 천국을 닮은 가정을 다시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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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가족 간의 살인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깊은 충격을 안겨준다.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해치는 참혹한 일들이 더 이상 예외적 사례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몇 달 전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가장이 가족을 살해한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자녀의 훈육 문제를 둘러싼 갈등 끝에 부부 간의 심각한 폭력이 벌어지는 일도 잇따르고 있다.
이제 가정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사랑과 안정의 보금자리만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때로는 분노와 외로움, 고립과 억압이 가장 날카롭게 표출되는, 사랑과 상처가 교차하는 가장 복잡한 공간이 되었다. 따뜻해야 할 공간이 추위의 중심이 되고, 보호받아야 할 울타리가 위협의 경로가 되며, 서로를 살리는 관계가 서로를 해치는 고리가 되는 현실은 가정의 본질적 회복을 시급히 요청한다.
2024년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의 이혼 건수는 9만 건에 달하며, 혼인율은 통계 집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한편,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율은 33.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생활 양식의 변화가 아닌 공동체 기반의 해체와 개인화의 심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수치다. 청년 세대에게 ‘비혼’과 ‘비출산’은 더 이상 미래를 유보하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이 되었고, 노년 세대는 점점 고립과 단절 속에 내몰리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고령화 사회에서 급증하고 있는 고독사 현상이다.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배우자 또는 자녀와의 사별,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노년기에 깊은 외로움과 삶의 무력감을 경험하는 이들이 많다. 주변과 단절된 채 세상을 떠나는 고독사의 사례는 이제 낯선 뉴스가 아니며, 심지어 발견되는 데 십 수일 이상 걸리는 일도 허다하다. 이는 가정이 더 이상 전 생애를 품는 지속적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정’이라는 단어 앞에 멈춰 서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혈연에 의한 물리적 구조를 넘어, 관계의 본질과 영적 정체성으로서의 가정에 대한 성찰이 요청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 한 가지 꿈을 심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을 닮은 가정’이다.
시편 128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집을 이렇게 노래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하나님의 뜻이 머무는 가정은 결실이 있고, 생명이 넘치며, 세대 간에 축복이 흐른다. 에베소서 5장과 6장 역시 부부 간의 상호 존중과 사랑, 자녀와 부모 간의 순종과 양육을 통해 질서와 자비, 사랑과 책임이 공존하는 가정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비전은 단지 관념적 이상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는 실제적 통로로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 천국 가정을 실현해 갈 수 있을까?
첫째, 교회는 가정 회복의 공동체로 기능해야 한다. 교회는 단지 주일에 모이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믿음을 구현하는 영적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세대 간의 단절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결혼과 양육, 갈등과 상실, 노년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을 품을 수 있는 전인적 목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가정사역, 부부상담, 시니어 사역 등 다양한 연령층을 위한 맞춤형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둘째,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가정은 예배와 말씀, 나눔과 기도, 식탁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일상을 실현하는 거룩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단지 종교 행위로서의 예배가 아닌, 살아 있는 영성의 호흡이 깃드는 장소, 사랑이 선포되고 용서가 연습되는 장소로의 회복이 필요하다.
셋째, 개인은 사랑과 책임의 결단을 새롭게 해야 한다. 타인을 탓하기에 앞서 용서를 먼저 실천하고, 침묵 대신 대화를 선택하며, 무관심보다 기도를 선택하는 태도야말로 천국의 문을 여는 가장 실제적인 열쇠가 된다. 공동체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가정의 변화는 한 사람의 회복으로부터 가능해진다.
가정의 회복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의 회복, 한 기도의 시작, 한 걸음의 결단이 모여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가정을 조금씩 그려나갈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선물이자, 마지막 보루다. 가정의 회복 없이는 교회의 회복도, 사회의 회복도 완전할 수 없다.
가정의 달 5월, 다시금 이 땅의 모든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천국의 모습을 회복해 가기를, 그리고 그 회복이 교회와 사회의 새로운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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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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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곤 목사] 부활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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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이 아니라 아들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영광까지를 의미한다. 이 부활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것이며, 생명으로 생명을 낳은 복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한국 교회는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에만 부활을 기념한다. 개혁주의는 지키지도 않는 사순절은 잘 지키면서 성령강림주일은 잘 지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가 교리와 교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로 시작되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복음은 죽음을 인지하고 십자가를 믿는 것에서 싹이 튼다. 작금의 한국 교회가 부활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혹 피 묻은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기 때문 아닐까? 부활은 좋으나 십자가는 싫고, 생명은 좋으나 피 흘리기는 싫어한다.
죽어야 영생을 얻고, 죽어야 부활 할 수 있는데, 죽기를 싫어한다. 목숨을 내 놓아야 영원히 살 수 있는데, 영원을 포기하고 지금 사는 것을 선택한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의 자리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교자의 후예들은 이제 순교를 거부한다. 순교자의 후예로만 살고 싶어 하고 순교자가 되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러다보니 한국 교회에는 더 이상 부활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부활의 은혜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이 죽어 가는데,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 교회 일에만 바쁘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교회는 생존하려고만 한다. 공산주의가 교회를 공격하는데,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 신자들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다. 주체사상이 신앙을 흔들어 놓는데, 교회는 우리 교인만 아니면 된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진행을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대한민국을 사용하시어 세계 복음화의 선두에 세우실 것이다. 하지만 그 때와 그 시는 알지 못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나라는 이미 망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종북 세력은 득세하고, 오랜 세월 그들이 탄탄하게 쌓아 놓은 옹벽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옹벽을 부수고자 많은 국민들이 나라의 법치를 세우고 죽은 나라를 살리려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사, 장로, 신자들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다.
다음 세대에 신앙의 자유와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과 교회를 남겨주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줘야 하는데, 혼자만 살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외친다. 누군가는 죽어 씨앗이 되어야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부활이 있을 텐데, 아무도 씨앗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의 현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올해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데, 내가 속한 대한민국은 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는 것은, 부활의 시작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대한민국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복음으로 다시 덮으실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광복이후 가장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목숨 바쳐 지켜 냈던 자유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말해야 법정에서 이기고, 법의 권위와 정의는 이미 죽었고, 행정부는 마비되었고, 입법부는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대한민국에 더 유익할 것이라 생각하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이 죽어가고 있다. 자유는 사라지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유형의 독재자가 나라를 삼키려고 한다. 자유대한민국의 뿌리인 선거관리위원회는 불신을 넘어 해체해야 한다는 국민의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판사들(헌법재판소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의 판결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별로 없다.
더 이상 소망이 보이지 않고 나라가 죽음 앞에 절망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다시금 부활시키어 새롭게 휘두르시는 주님의 검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나라의 상황은 최악으로 가지만 부활은 죽음에서 시작되기에 다시금 조국 대한민국의 부활을 소망하는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보다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한국 교회가 되어 순교자의 후손이 아니라 순교자로 하나님 나라에 이름을 새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부활의 능력과 영광, 새생명의 감격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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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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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다락방을 떠난 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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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락방을 떠난 분들에 관한 상담이 여러 차례 있었다. 내용은 다락방을 떠난 분들이 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대부분 규모가 큰 교회들이었다. 아마도 작은 교회에서 불편하게 주목받기보다는, 익명성을 유지하고 정착하기 평안한 곳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다락방을 떠나 교회로 온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교회 처지에서는 기존 성도들을 생각해 혹시라도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염려도 있다. 물론 교회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이단을 떠나 올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온 분들을 환영하는 것에 대해서 이견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성도들과의 관계에 문제는 없을지 그리고 교회의 방침을 잘 존중할지 걱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락방을 떠난 평신도들이 가장 걱정이다. 각 교회가 문턱을 낮추고 마음을 다해 받아드리면 좋겠다. 혹시라도 다락방에서 왔다는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비록 잘 정착할지 혹은 목회 방침을 잘 수용할지 걱정도 되겠지만, 새 신자 교육을 통해, 그리고 교회 봉사와 직분을 서서히 맡기는 등의 안전장치를 통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다락방을 떠난 분들이 교회로 온다면, ‘받을까 말까’가 아니라 ‘받아드리되 어떻게 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품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락방을 떠나 교회로 오는 분들을 따뜻하게 품에 안아야 한다.
다락방을 탈퇴한 목회자들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오랜 기간 목회자로 몸담았던 다락방을 떠난 것도 힘든 결정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더 걱정이다. 목회를 그만두거나 독립교회로 남아있지 않는 한 새로운 소속 교단이 필요한데, 기존 교단의 가입이 쉽지 않다. 과거 소속을 드러내지 않고 신학교육 과정을 다시 밟은 후 기성 교단 목회자가 되거나, 류광수 측과 결별한 개혁 교단으로 다시 가입하기도 한다. 다락방 탈퇴 목회자를 받겠다는 교단들도 있었지만, 진행은 지지부진해 보인다.
지난날 전도에 대한 열정으로 다락방에서 활동하며 청춘을 바쳤던 속상함과 회한을 누구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류광수의 사치와 다락방 일부 목회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가 노출된 PD수첩 방영 이후, 이들이 받은 상처와 충격이 어땠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다락방을 떠난 것은 커다란 용기였고, 회복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다락방을 떠났거나, 망설임 속에 떠날 계획을 세우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교회가 선제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다락방 탈퇴자가 다른 이단에 미혹되지 않도록, 그리고 다락방에 있을 때의 ‘열심’이 교회와 주님을 위한 ‘헌신’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락방을 떠난 분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다락방을 떠나 교회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정착 과정에서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더라도, 혹은 다락방에서 보낸 세월이 속상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겸손과 순종의 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인내하며 이겨내기를 기도한다. 교회의 본질은, ‘이단 정죄’를 넘어 ‘피해의 치유와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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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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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교수]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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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은 인간의 본성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랑하고 자랑하고 싶어한다. 자랑 자체가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자랑 자체를 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문자주의적 경향 때문에 그 말씀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랑하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포장하여 자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명령인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우리의 오해와 상당히 다른 내용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인용구절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장 31절은 “기록된 바”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4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하라”의 인용이다. 바울은 “이것으로”를 “주 안에서”로 바꾸어 인용한다. 문제는 “주 안에서”라는 번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는 번역은 “주를 자랑하라!”로 번역되어야 하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만일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번역이 옳다면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 자랑하지 말라!”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로 번역하지 않고 “사람을”로 번역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의 금지명령을 보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여기서도 모두 ‘지혜 안에서’, ‘용맹 안에서’, ‘부함 안에서’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지혜를”, “용맹을”, “부함을”은 모두 ‘안에서’를 의미하는 헬라어 전치사 ‘엔’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동사의 목적어로 번역한다. 성경의 헬라어 구조를 살펴보면 동사 ‘자랑하다’와 전치사 ‘엔’ 구절의 문장은 일관성 있게 ‘~을 자랑하다’로 이해하고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그것을 “주 안에서”라고 번역했을까? 아마도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인’을 가진 서구 언어의 번역 영향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폐일언하고 잘 알려진 고린도전후서의 말씀,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번역은 이제부터라도 “주를 자랑하라!”라고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이고도 최고의 자랑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 당시 자랑거리는커녕 최악의 비난거리였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거리끼는 것”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이고, “미련한 것”이란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책 제목 <우신예찬>에 사용한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 칭송>을 <우신예찬>이라 멋지게 번역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자랑거리와 질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자랑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결과중심적이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가시적 성공과 이에 따르는 부귀영화가 일반적인 자랑거리로 채워진다. 세상의 자랑거리로 보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대상일뿐이다. 최악의 형벌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떠벌리는 일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랑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성공과 부귀영화인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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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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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봉 목사] 금수강산 대한민국을 보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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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 유구한 역사를 살아온 우리 한민족이었다. 조상들이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은 한반도는 그리 크고 넓은 땅은 아니었으나 우리 민족이 옹기종기 오순도순 터를 잡고 살아가기에는 아담하면서도 옹골차기가 그지없는 말 그대로 금수강산이었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는 북쪽의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맨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낙동강, 섬진강 그리고 한강, 금강, 대동강, 임진강이 이 땅의 흙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북쪽에 우뚝 솟은 백두산과 남쪽 끝 제주도에 불룩 솟은 한라산, 그리고 셀 수 없이 솟아오른 산봉우리들... 실로 한반도의 강과 산들은 비단으로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답고 화려하고 기름진 강산이다. 그뿐인가? 한반도의 삼면을 둘러싼 동해, 서해, 남해 바다는 특유의 맛깔나고 풍부한 어족을 품고 있어서 한반도의 백성들 입맛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주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너무나 뚜렷한 사계절과 아름답기가 빼어난 우리의 금수강산은 이 땅에서 수천년동안 뿌리 내리고 살아온 한민족으로 하여금 지구촌 어느 민족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뛰어난 문화를 일구어내는 쾌거를 선사하였다.
금상첨화(錦上添花)로 이 아름다운 한반도 한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이 전래되었다. 옛적부터 신앙심이 깊고 천우신조(天佑神助)를 의식하면서 천제(天祭)를 신실하게 올려오던 우리 민족에게 성경을 통하여 설명되는 유일신 하나님 신앙은 큰 거부감 없이 좋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땅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므로 이루어진 인류 대속(代贖)이라는 생명의 복음은 이천년 기독교 선교역사가 전진하던 중 우리 한반도에서 특별히 환영 받으면서 꽃을 피웠다. 참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각별한 사랑이요 은총이었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소중한 생명의 복음을 받아서 품고있는 교회, 그 복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비이지만 이 복음을 담고있는 교회는 이 땅에 위치한다. 땅위에 있는 교회(그리스도인)로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어떤 것일까?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2)
오늘의 한국교회가 건전하고 왕성하게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고 있음은 일제 시대 환난과 박해를 견뎌낸 후 1945.8.15. 해방과 더불어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방과 독립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동시에 함께 받았음에도 한반도의 북쪽은 공산주의를 채택하였으므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견적(可見的) 교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사탄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요량으로 우리 남한에도 공산주의가 극성을 부렸다. 에덴동산에서 완전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달콤하게 유혹하여 넘어뜨리는데 성공하여 재미를 보았던 사탄은 거짓말과 선전선동에 탁월한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한때는 우리 남쪽 백성들도 70%가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 체제로 나라를 세워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위기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계셨기에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가치를 깊이 있게 확실히 공부한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기독교 선각자들이 사상과 이념적 혼돈시대를 수습하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웠다. 그렇다. 자유와 인간존중(인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가치요 선물이다. 이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80여년만에 세계가 놀라고 감동하는 참 아름다운 나라로 발전 성장하였다. 세상에~ 국민1인당 소득이 일본을 추월하다니! 그러나 말이다. 우리 모두 신32:15,16을 읽고 묵상해보자.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어떠한가? 윤리, 도덕, 체면, 양심, 상식, 예절의 바탕 위에서 5천년간 꾸준하게 이어오던 그 동방예의지국이 맞는가? 어른에게 묻고, 아비의 말에 청종하던 그 겸손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던 그때의 겸비함과 간절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인간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과 상식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는가?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데 절대 필수적인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온전하게 지켜나갈 의지와 희생의 자세가 돼 있는가? 세계가 경탄하고 부러워하고 박수하고 축하하면서 주목하는 대한민국에 동성애, 종북 종중, 무신론적 사회주의 미화, 무섭게 파고드는 마약과 도박, 특히 사이비 정치인들의 거짓말 선전 선동... 어이가 없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과 지혜가 혼돈에 빠져있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지나온 날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 나라를 새롭게 하자.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고 호소하고 경고하였다.
집이 낡고 망가지면 당장 손보고 수리하고 고쳐서 새 집으로 재건축하는 것이 마땅하듯이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옛것이라 하여 결코 무시하지 말고 소중한 전통들을 지켜가고 유익하고 참신한 새것들은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아름다운 금수강산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부디 단단하게 보전(保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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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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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문 목사] 칼빈주의 오대 강령: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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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오대 강령(TULIP)은 1618-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아르미니안주의에 반박하며 확립된 교리로서, 이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며,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첫째,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은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구원을 받을 능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완전한 무능력에 놓여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선함을 선택할 자유조차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임을 깨닫게 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로마서 3:10-11).
둘째,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구원받을 자들을 조건 없이 선택하셨음을 강조한다. 이 선택은 인간의 공로나 선행과 무관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뜻에 근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에베소서 1:4).
셋째,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모든 인류를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을 위한 실제적이고 확실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선택받은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적용된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5).
넷째,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받은 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며, 회개와 믿음으로 반드시 끌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은 인간의 저항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하도록 역사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절대성을 드러낸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6:37).
다섯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택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영원히 구원을 보장받는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각 항목이 논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완전한 구원 교리로 작동한다. 전적 타락은 인간의 무능력을 강조하며,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 속죄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주권성과 확실성을 보여준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성취됨을 선언하고, 성도의 견인은 구원의 영원한 안전성을 보장한다.
이 다섯 강령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고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선언한다. 이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확신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높이는 교리로 작용한다. 칼빈주의 오대 강령은 단순히 신학적 논리를 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핵심으로서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과 도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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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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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 목사] 가족의 경계와 새로운 패러다임: 2024년 한국 가족 이슈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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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주제가 논의의 중심에 섰던 해였다. 비혼 출산, 동성혼 논쟁, 초혼 연령의 상승 등 전통의 가족 개념에 도전하는 현상이 주목받았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 고령화, 가족 다양성의 확대라는 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양육하겠다고 발표한 사건은 비혼 출산에 대한 논란을 촉발했다. 한국에서 비혼 출산 비율은 5% 미만으로, 여전히 전통의 가족 구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OECD 평균 비혼 출산율 41.9%에 비하면, 한국 사회의 인식은 분명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비혼 출산을 둘러싼 논의는 단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지원 체계와 법 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정치권이 논의 중인 연대관계등록제와 동거혼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도입이 전통 가족의 해체를 가속화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진전일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10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연합예배는 동성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보여준 상징이었다.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판결 이후, 전통가족 개념을 옹호하는 기독교계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동성혼을 둘러싼 논의는 단지 법적 권리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정의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형태의 결합이 사회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의 질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동성 커플과 그 자녀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전통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2023년 남성의 초혼 연령은 34.0세, 여성은 31.5세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이는 사회 경제 요인과 개인의 결혼관 변화로 인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혼과 출산의 지연으로 이어져 저출산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저출산’을 ‘저출생’이란 용어를 바꾸며 책임 소재를 재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용어 변경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한국 사회는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줄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안정된 양육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다문화 가정과 한부모 가정의 증가는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2024년 정부는 한부모 가정 지원 정책을 강화하며 이들의 안정된 생활을 도모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의 확대는 한국 사회의 문화 다양성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언어와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추가 지원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2024년의 가족 이슈들은 기존의 전통 가족 모델이 새로운 형태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혼, 동성혼, 한부모, 다문화 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는 이제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 다가오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가족 본질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정되게 하라’는 메시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통 가치를 지키는 한편, 새로운 가족 모델을 포용하는 방안까지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은 단순히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2024년 한국 사회는 가족의 정의와 경계가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그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가족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될 것이다. 벌써 2025년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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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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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호 목사] 엘리트 탈북청년들을 위한 선교전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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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가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6월 현재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4,183 명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196명,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간 105명이 추가로 입국되었다. 코로나 사태 직전이던 2019년에 1,047 명이던 것이, 코로나가 발생하자 조중국경이 폐쇄되면서 2020년에 229명으로 급격하게 줄더니, 2021년 63명, 2022년 67명까지 감소하다가 코로나사태가 진정되면서 2023년도에 196명으로 늘어났다. 전년도에 대비 약 3배 가깝게 증가된 수치이다.
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조중 국경지역은 여전히 폐쇄되어 있고, 중국 내 탈북자들 입지는 악화일로에 있다. 최첨단 IT기술을 동원한 중국공안의 탈북자 색출과 검거는 고도화 되었다. 붙잡힌 탈북자들은 현장에서 즉시 구속되고 대부분 강제북송된다. 중국정부는 한국정부의 탈북자 강제북송 금지 요청이나, 유엔인권위의 경고 따위에는 눈 하나 꿈쩍도 안한다. 백약이 무효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제3국으로 탈출하는 이전의 루트는 사실상 막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는 탈북행렬은 무슨 영문인가?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2023년 196명 가운데 90여명이 북한내 엘리트 간부와 그 자녀들, 장마당 신흥 돈주들, 북한정권 보위부 고급 간부들, 외교관들, 북한인민군 장성급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배를 구입하여 서해와 동해를 통해 탈북하거나, 해외공관에서 제3국으로 조용히 잠입하여 탈출하거나, 러시아 출장 중 모스크바 유엔사무소로 직접 진입하여 망명 입국하는 경우도 있다.
전에 없었던 북한 내 사회지도급 엘리트 인사들이 새로운 루트를 통해 대거 탈북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가 만난 30대 초반 탈북청년도 평양 명문대학 출신에 부모가 둘 다 북한 고위직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북한 노동당 내 고급정보를 다루는 연구원으로 일하다 한국의 발전상과 선진된 모습을 확인하고 자유를 찾아 용기를 내어 탈북한 케이스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북한 젊은이들 대부분은 다양한 외부루트를 통해 이미 한국이 북한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선진화된 나라라는 정보를 익히 알고 있으며, 기회만 닿으면 북한을 탈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전에 없던 북한의 엘리트 청년 탈북민들이 한국에 밀려올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거나, 삶의 고통을 피하여 오는 자들이 아니다. 자유와 미래를 향한 또 다른 비전을 품은 새로운 세대들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북한선교를 주사역의 장으로 갖고 있는 선교단체들은, 증가하고 있는 북한 젊은 엘리트 탈북민들을 효과 있게 선교하여 복음의 도구로 쓰임받게 할 수 있는 고도화 전략을 세워야만 한다. 이들은 북한 내부 엘리트층들과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중요한 자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전공과 관심분야를 살펴 장려하고 계발시켜 미래 북한 복음화의 일꾼들로 쓰임받을 수 있게 해야한다. 한국교회는 이들도 품어야 한다. 시급하고 진지하게 구체적인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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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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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종 교수] 그리스도인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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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생어무위(福生於無爲) 이환생어다욕(而患生於多慾)’이라는 말이 있다. ‘전한(前漢)’시대(BC 200-8)의 학자 ‘한영(韓嬰)’의 저술인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표현으로 ‘복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고, 염려는 욕심이 많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정말 인간이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것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현대인들은 대부분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유엔산하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에서는 매년 140여 국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기초로 행복지수를 산출하여 순위를 발표한다. 2024년에는 10점 만점에 7.741점을 받은 핀란드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 발표되었다. 우리나라는 6.058점으로 52위에 랭크되었다. 2021년에는 5.845점으로 62위, 2022년에는 5.935점으로 59위, 2023년에는 57위였다. 전체적으로 행복 지수가 나아지고 있지만, OECD 국가들 가운데서는 거의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셈이다.
사실 ‘행복’이란 매우 주관적인 감정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현대 심리학에서 행복은 기본적으로 ‘쾌락’을 의미한다. 이 ‘쾌락’은 개인의 만족감이나 긍정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만족스러우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런 생각을 쉽게 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라고 질문해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혹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얻었을 때’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행복학을 연구하는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내가 즐거움을 느끼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의 기준이 개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행복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진 대표적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이성을 통해 인간의 탁월함을 나타냄으로써 인간다움을 추구하고 최고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면서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 행복을 올바른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행복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의 만족과 즐거움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행복에 대한 언급보다 평화에 대한 가르침이 압도적이다. 성경은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욕심에서 벗어나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개인의 행복보다는 함께 누리는 평화에 주목한다.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신구약 성경은 ‘평화’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나아가 성경은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peacemaker)’이 되라고 가르친다. 우리 시대의 행복은 개인적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관계적이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를 살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함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를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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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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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 지역교회와 미션스쿨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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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매력적인 선교지이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사회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 중 하나는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매우 중요한 선교지 중 하나이다. 학생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며, 지식과 인성을 형성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교는 신앙의 가르침이 배제된 채, 세속적인 가치관과 인본주의적 교육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를 선교지로 바라보는 시각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의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2008년부터 브니엘고등학교에 교목으로 부임하여 17년의 시간이 흘렀다. 17년 학교 사역 기간동안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사역의 결과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의 결과들은 교목실 단독으로만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2008년 학교 부임과 동시에 이삭교회 교육 목사로 고등부를 맡아서 겸직을 하게 되었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년의 사역기간동안 이삭교회는 본교회 교역자요, 지역학교 교목인 나를 전적으로 믿고 최선의 후원을 해주었었다.
당시 이삭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정진섭 목사님은 당회와 교회의 허락을 얻어 매년 4천만 원(?)여의 재정을 들여서 이삭교회와 금정구 자원봉사센터와 브니엘고등학교가 연합으로 지역의 홀로 어르신들의 도시락 반찬을 매주 배달해 주는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재정과 반찬 만드는 봉사는 이삭교회가 맡아 주었고, 홀로 어르신들 선정과 봉사 시간 부여 행정은 금정구 자원봉사센터가, 그리고 만들어진 도시락 배달은 브니엘고등학교 1학년 60명, 2학년 60명 학생이 격주로 홀로 어르신들을 찾아서 배달해 주는 봉사를 7년 동안 후원해 주었다. 이를 통해 브니엘고등학교 사랑의 도시락 봉사자 학생들은 졸업 때까지 평균 120시간 정도의 봉사 시간을 부여받아 졸업하게 되었다. 단순히 봉사 시간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성교육과 입시결과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시각변화와 나아가서는 기독교에 대한 자세가 바뀌어지는 결과들로 이어졌다.
사랑의 도시락 봉사를 했던 학생 중 서울대에 합격한 제자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불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대학 진학이 이삭교회 사랑의 도시락 봉사로 인한 것이라는 고백을 담아 편지까지 적어서 교회에 헌금을 한 일도 있었다.
2018년부터는 브니엘예술고등학교에 전보 와서 7년째 근무하고 있다. 이 기간에 브니엘예술고등학교는 학교 채플 장소를 학교 인근 함께하는교회(담임 황동한 목사)당에서 3년간 장소사용허락을 얻어 사용했었다. 이유는 교회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이들이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교회를 출입해 보는 경험을 주고자 함이었다. 교회가 공간을 내어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월요일 같은 경우는 모든 교역자가 쉬는 날인데 휴일을 반납하고 뒤처리할 것이 많은 학생 채플 공간으로 대여하는 것은 교회의 결단이 아니면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24년 우리 학교 채플은 지역교회인 제자들교회(담임 김규환 목사)와 연합으로 진행하고 있다. 월간 채플이라는 이름으로 드려지는 매월 첫 주 채플에 제자들교회는 청소년부 사역자를 메신저로 그리고 매월 아이들의 먹거리를(매월 30여만 원 지출) 우리 학생들에게 조건 없이 제공해주고 있다. 채플을 섬긴다고 해서 우리 학교 아이들이 제자들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님에도 지역교회의 사명이 지역 미션스쿨을 돕는 것이라는 사명으로 섬겨주고 있다.
우리 학교 비전 홀에서는 주일마다 2021년에 개척한 브릿지교회(담임 이성근 목사)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브릿지교회 역시 우리 학교가 필요한 것들을 언제든지 채우기 위해 살피고 있다.
결국 미션스쿨은 혼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역교회와 지역학교가 함께 할 때 미션스쿨들이 버틸 힘을 가지고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과 섬김을 받은 아이들은 개독교라고 부르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개독이 아니라 기독으로 바뀌게 된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더더욱 그렇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이며, 복음은 들려지는 소리로 인해 그 영향력은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지역교회들이 눈을 조금만 돌려서 주변의 미션스쿨들과 교회 안의 기독교사들을 잘 격려해 주었으면 한다. 다음 세대가 없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일어날 수 있는 근원지인 학교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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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