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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문 목사]십자가의 도 — 본질을 잃은 시대에 던지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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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1 Corinthians)
우리는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치의 혼란과 영적 공허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확신은 옅어졌고, 관계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공동체의 깊이는 얕아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를 향한 질문은 피할 수 없다. 교회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왜 존재하는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외형적 성장에 있지 않고, 오직 성경이 증언하는 십자가 복음에 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 했다. 당시 십자가는 로마의 처형 도구로, 수치와 패배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 선포했다. 세상이 강함과 성공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할 때, 하나님은 약함과 낮아짐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이 역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이다.
초기 교회는 혹독한 박해를 견디며 이 복음을 지켜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가 전쟁을 앞두고 십자가의 표징을 보았다는 전승과 함께, 313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는 공인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제도적 승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박해의 시기에도 성도들의 심령 속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 있었다. 환경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이 교회를 지탱했다.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중대한 논쟁의 장이었다.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대립은 단순한 신학적 차이를 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참 하나님이신가라는 근본 문제를 다뤘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십자가의 구원도 설 자리를 잃는다. 교회는 시대의 압력보다 복음의 진리를 택했고, 그 선택 위에 서 있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자리다. 죄는 가볍게 다뤄지지 않았고, 동시에 죄인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 모두가 죄인이며 동시에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을 꺾고 겸손을 세운다.
오늘 교회의 위기는 외부 환경의 변화보다 중심의 약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성장과 영향력이라는 언어에 익숙해진 사이, 낮아짐과 섬김이라는 십자가의 길은 희미해지지 않았는가. 십자가는 더 높이 오르기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더 많이 내어주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회복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또한 은혜의 복음이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구원은 성취가 아니라 선물이다. 이 확신 위에 설 때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움직일 수 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후에 주어졌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고, 죽음 없는 생명은 없다. 십자가 없는 부활 신앙은 공허하다. 교회가 다시 십자가의 도 위에 굳게 설 때, 세상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변함없는 중심, 곧 십자가로 돌아가는 일이다. 교회의 능력은 규모에 있지 않고 복음에 있으며, 숫자에 있지 않고 진리 위에 있다. 십자가의 도를 붙드는 교회만이 시대를 넘어 영원을 바라보는 공동체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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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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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성 목사]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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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담임목회를 할 때 약 7년 동안 하루 3시간을 자며 사역을 했다. 일주일에 제자훈련을 4팀, 한번에 5시간씩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났는데,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아픈 곳은 없는데 온몸에 힘이 없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산호세(San Jose)에 중국 할아버지 한의사가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갔다. 맥을 짚더니 85세보다 더 기력이 없다고 했다. 주일 설교만 겨우 감당하고 거의 2년을 누워 지냈다.
휴가 가는 것을 성도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해서 말도 못 꺼냈다. 쉬는 것을 부끄러워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강을 다 상할 정도로 사역하는 것을 과연 충성이라 하실까? 사역하다 누워 있는 사역자를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서 허락한 첫날은 놀랍게도 안식일이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쉬고, 즐기고, 누리도록 하신 것이 첫 선물이다. 일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고 즐기는 것이 먼저였다.
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역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며 영적인 것이다. 사역이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인정하신 시간이며, 맡기고 쉬는 것이 사역을 더 잘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오래 전 이정석 교수(플러신학교)가 수련회 강사로 온 적이 있다. 그런데 “대체 잠은 언제 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휴가를 가라, 휴가를 가되 기도회, 세미나 가지 말고 책도 읽지 말고 그냥 빈둥빈둥 놀아라”고 강력히 권한 적이 있다. 쓰러지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시간인지, 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독일에서 사역할 때는 휴가가 한 달이었다. 첫 휴가를 앞두고 권사님 한분에게 “10월 중에 휴가를 가려는데 괜찮을까요?” 상의했더니 버럭 화를 내셨다. 교회에서 휴가를 주었으면 언제 갈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는 목사님의 고유한 영역이지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며 운영위원들에게 통보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 성도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현재 교회를 부임하며 아무 것도 요구한 것이 없다. 다만 휴가를 20일 달라고 했다. 옛날 같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쉼이 너무 중요해졌다. 멀리 떠나서, 평소에 만날 수 없었던 지인들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다녀온다. 평소에 읽지 못했던 분야의 책을 읽고 영화도 본다.
사역지를 옮길 때 미리 하나님께 2달의 여유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기도한다. 새로운 사역지에 가면 한동안은 정신없을 텐데 미리 충분히 쉬어야 사역에 집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사역지로 가게 된다.
사역자들이여! 쉬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일상 속에서 틈틈이 여유시간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다 맡기고 잠시 떠나가는 것도 너무 중요하다. 사역과 휴식의 균형, 사역영성 못지않게 쉼의 영성, 사역자들이여! 휴식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휴식을 누리고 즐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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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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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새해, 다시 교문 앞에 서며(미션스쿨에서 교목으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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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학교는 아직 조용하지만, 나는 다시 교문 앞에 선다. 이 자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느덧 열아홉 해가 되었다. 매해 새해가 되면 마음속에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부름받은 사람인가.”
미션스쿨에서 교목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화려하지도, 늘 환영받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매년 새 학기마다 다시 이 자리로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교목의 가장 큰 보람은 시간을 견뎌낸 아이들의 변화에서 온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아이들은 기독교를 거리낌 없이 “개독”이라 불렀다. 그 말에는 상처와 불신, 그리고 종교에 대한 깊은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열여덟 해가 흘렀다. 설득보다 동행으로, 논쟁보다 일상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찾아가지 않아도 매일 마주치는 만남, 아침 인사, 복도에서의 짧은 농담, 힘든 날 말없이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쌓이며 아이들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개독”이라는 말 대신 “기독”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 변화는 교육의 성과라기보다 삶으로 스며든 복음의 흔적이었다.
교목의 사역은 예배당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담실에서, 교실 뒤편에서, 운동장 벤치 위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삶 속에 있다. 함께 울고, 함께 버티며,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쌓인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의 삶이 조금씩 달라진다. 포기하려 했던 아이가 다시 살아갈 이유를 붙들고, 관계 속에서 무너졌던 아이가 다시 사람을 믿어 보려는 용기를 낸다. 그 변화는 교목에게 주어진 가장 깊은 사명 확인의 순간이다.
아이들의 변화는 가정으로 이어진다. 한 학생과의 신뢰가 부모와의 대화로 확장되고, 학교에서 시작된 작은 만남이 가정의 분위기를 바꾸는 장면을 만난다. 그때 교목은 비로소 깨닫는다. 미션스쿨의 사역은 학교 담장을 넘어 가정의 복음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또 하나의 감사는 같은 미션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동료 교사 공동체와의 연합이다. 교육이라는 치열한 현장 속에서도 신앙을 이유로 고립되지 않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새해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큰 힘이다. 그러나 이 사역에는 늘 그늘도 함께한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사가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교목은 존재감이 적으면 “미션의 기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존재감이 커지면 “선교보다 일을 많이 해서 인기 끈다”는 오해를 받는다. 필요할 때는 찾지만, 견해가 다르면 돌아서며 “정치적이다”라는 말로 선을 긋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교목은 자연스럽게 고립감을 느낀다. 어느 날은 교사라는 기준으로 평가받고, 어느 날은 목사라는 기준으로 재단된다. 이중의 잣대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관리자의 성향에 따라 건학이념은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한다. 사시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관리자들에 의해 미션의 방향성이 외면되기도 한다. 결국 하루를 마치고 돌아서면 혼자다. 그러나 새해의 문턱에서 나는 다시 고백한다. 이 외로움마저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로 부르신 이유 안에 있음을. 올해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 다시 이름을 외우고, 다시 관계를 시작하고, 다시 복음을 삶으로 건네야 할 시간이다.
부디 이 새해에 지역의 미션스쿨에서 사역하는 교목들이 지치지 않도록 지역교회들이 함께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미션스쿨의 교목은 교회와 학교 사이를 잇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 다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새해에는 더 많은 연대와 격려가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새해, 나는 다시 교문 앞에 선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시작하실 일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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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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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정치에 집착하는 이단, 이단에 빌붙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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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의 정치권 불법 로비와 유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미국, 일본, 한국에 주요 거점을 가지고 있는 통일교의 경전 『원리강론』에 따르면, 통일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문선명이 왕이 되는 지상천국 건설’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경제, 언론, 문화, 예술, 교육 등의 모든 분야에서 규모와 영향력 확장하며, 통일교 왕국 건설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주요한 요인이 바로 ‘정치권 로비와 유착을 통한 특혜’였다.
최근 불거진 통일교의 무리한 불법적인 정치권 로비와 유착은, 통일교 70년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운명적인 행태인 동시에, 통일교가 마주한 심각한 안팎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첫째, 외부적으로는 최대 자금 기반 일본 통일교가 몰락으로 치닫는 상황이 초래한 결과이다. 일본의 유력 정치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피격 살해된 사건이 통일교와 깊이 관련된 사실이 그 시작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일본 청년의 어머니가 통일교에 10억여 원을 바쳤고, 이로 인해 청년의 가정과 성장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통일교에 대한 적대감은, 2022년 거액을 받고 통일교 비대면 행사에서 연설했던 아베 신조에 대한 복수로 표출되었다.
사건 3년 후인 지난 10월에서야 관련 재판이 시작되었고, 일본 사회는 이 청년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를 두고 여론이 분분한 상황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통일교 종교법인이 해산되었고, 신도들은 혼란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통일교의 종교 사기로 드러난 소위 영감상법 피해자 보상을 위해 일본 내 통일교 자금 동결까지 거론되는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다. 최대 자금원인 일본 조직의 쇠락은, 통일교의 최대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둘째, 내부적으로는 한학자와 아들들 간의 후계 전쟁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일본 통일교의 몰락과 함께, 통일교 후계자들 사이의 권력 싸움으로 인해 문선명 통일교가 분열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2012년 문선명 사망 후, 통일교는 부인 한학자의 평화통일가정연합, 3남 문현진의 글로벌피스재단(Global Peace Foundation, GPF), 그리고 막내 7남 문형진의 생츄어리처치(Sanctuary Church)의 세 개 분파로 분열돼 다투고 있다.
친어머니 한학자는 친아들들을 몰아내고, 셋째 아들 문현진은 한학자와 양보 없는 법정 소송을 이어가고 있으며, 막내아들 문형진은 유튜브를 통해 친어머니 한학자에 대한 공개적인 저주와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통일교가 주장하는 죄 없는 ‘참 가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모자(母子)가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거짓 가정’의 모습만이 노출되고 있다. 문현진은 한학자의 구속과 함께 영향력 확대를 노리며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고, 문형진은 아버지 문선명을 배신한 당연한 결과라고 어머니 한학자를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안팎의 위기 상황은, 통일교가 무리한 정치권 불법 로비와 유착을 가속한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한편, 정치권 로비와 유착은 비단 이단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공인들이 사리사욕을 위해, 국민의 눈높이를 벗어난 정치권 로비와 유착을 시도한 부끄러운 행태도 드러나고 있다. 정치에 집착하는 이단도 문제이지만, 높은 도덕성과 정결함을 유지해야 할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빌붙으려 벌이는 일탈 행위는 더욱 심각한 병리적 현상이다.
이단의 불법 행위에 대한 법적제재를 논의하기 전에, 소위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끄럽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예방할 수 있는 교회의 자구노력과 안전장치 마련이 오히려 시급하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이단 문제에 내성이 생긴 듯, 교회와 사회는 자꾸 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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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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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범 목사]윤리의 경계석이 옮겨지는 시대에 교회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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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총신대 평생교육원에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죽음의 정의와 본질, 존엄사와 안락사, 조력사 그리고 자살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갖고 강의도 하고 토론도 했다. 마지막에 수강생 중 미국에서 오신 장로님이 자신이 경험한 존엄사를 들려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랫동안 중병을 앓던 아내가 어느 날 낙상하면서 의식을 잃었고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자녀들 모두가 호흡기를 제거하는 최종 결정을 아버지에게 미루더란다.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을 결정해야만 했던 괴로웠던 순간, 이후에 진행된 과정과 법적인 절차 등을 들려주는데, 이론이 아닌 이 실제가 모두에게 큰 울림이 되었다. 100세 시대에 죽음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최근 미국에서 코린이라는 여성이 2021년에 있었던 부모의 조력사를 공개했다. 어머니가 대동맥판막협착증 진단을 받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며 수술을 거부한 뒤 낙상 사고로 상태가 악화되자 92세에 조력존엄사를 신청했다. 그러자 이미 뇌졸증 증세를 보였던 95세의 아버지는 “아내가 먼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면서 함께 신청했다. 이 부부는 스스로 선택한 날 의료진이 제공한 약을 복용하고 한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딸은 이런 부모의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 미화하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공론화하려는 목적에서 뒤늦게 이것을 밝힌다고 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의 양태가 유럽이나 미국 여기저기서 수용되어 가고 있고 그 영향이 우리 사회에도 밀려오고 있다. 이것을 보도한 중앙일보(2025.10.30)는 기사 마지막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 응답자의 82%가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이 여론조사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갖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유럽이나 미국을 좇아 변해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커다란 윤리적인 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0세기 이후 전통적인 가정 제도가 서서히 붕괴하고 있고 성도덕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의과학의 급속한 발달은 출생과 죽음의 영역에서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미국은 20세기 초만 해도 인구의 2/3가 50세 전에 사망했지만, 2023년의 평균수명은 78.4세에 이르고 있다(한국은 83.5세). 노인병 전문의인 랭고는 “수많은 사람이 그토록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이렇게 오래 사는 문제를 인간 사회가 이전에는 직면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런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여기까지는 허용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라고 하는 윤리적인 경계선이 끊임없이 밀리고 있다. 어제는 인간적 행동의 한계를 넘는 것으로 간주하며 경계했던 것들이 내일에는 이미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치 밤사이에 누군가 경계석을 몰래 옮겨버린 것 같은 세상이다. 윤리신학자 스튀겔베르거는 이 시대를 비판하면서 유전공학, 컴퓨터공학을 앞세우며 이런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선동적인 말들이 힘을 얻으면서 ‘균형과 목적이 없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E. 브룬너는 이처럼 경계석을 옮기는 시대에서는 윤리의 기반 자체가 해체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적인 기반으로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 거친 행보는 위기로 느껴지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좁고 협착한 길로 여겨진다. 생명의 시작점에 관한 논쟁, 인공수정, 안락사 문제, 환경문제, AI의 진화로 불거질 다양한 윤리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이런 21세기의 다양한 윤리 문제에 대한 지침을 성경에서 찾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야 한다. 이를 통해 균형과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기 쉬운 세상이 옳은 길로 가도록 돕는 그것이 또한 세상의 빛이고 소금인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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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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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택정 장로]다수가 정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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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 사회는 ‘크기’와 ‘숫자’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 정치에서는 의석의 수가 곧 힘의 근거가 되고, 교회에서는 교인의 수가 힘의 잣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숫자가 곧 옳음의 증거는 아니다. 최근 국회에서도 절대 다수의 힘으로 법안을 밀어붙이거나, 다른 의견을 불편한 존재로 치부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겉으로는 ‘국민의 뜻’이라 말하지만, 그 안에 진정한 공론과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독주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대형화되고 조직화된 교회의 흐름 속에서 “많이 모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사업이나 목회적 결정이 성경적 원칙에 부합하는가를 검토하기보다는, “다들 그렇게 하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앞선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다수의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다. 다수가 찬성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으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다수의 불평에 휩쓸려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민수기 14장). 바알 선지자 450명과 맞섰던 엘리야는 외로웠으나 진리의 편에 섰기에 하늘의 불을 경험했다(열왕기상 18장). 미가야 선지자는 왕과 400명의 예언자들 앞에서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 곧 그것을 말하리라”(열왕기상 22:14)고 선언했다. 이처럼 성경의 역사는 다수의 여론이 언제나 옳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경고를 깊이 새겨야 한다. 교단은 종종 정치화되고, 언론은 침묵하며, 성도들은 혼란 속에 방황한다. 교회의 성장이나 재정의 풍요가 곧 신앙의 성공으로 오해되고, 진리를 지키려는 소수의 외침은 ‘비판’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3) 하셨고,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자”(요한
복음 18:37)를 귀히 여기셨다. 교회의 본질은 규모가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가 얼마나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오늘의 교회 위기는 외형의 축소가 아니라 비판과 검증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성숙한 공동체 일수록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성경으로 검증하며,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는 법이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데살로니가전서 5:21)고 교훈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면역력을 지키는 길이다.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검증 없는 순종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성찰이다. 다수의 편에 서는 것이 편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진리의 길은 아니다. 때로는 소수의 자리에서 외롭게 서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태복음 5:13-14) 하셨다. 빛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소금은 적을수록 그 맛이 깊다. 교회가 다시금 빛과 소금의 사명
을 회복할 때, 사회도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함성이 아니라 양심의 고백, 힘의 논리보다 진리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많은 자가 아니라 충성된 자”(디모데후서 2:2)이다. 다수의 찬성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의 헌신이 교회를 살린다.
다수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언제나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진리는 말씀 안에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이 단순한 진리를 붙잡는 날, 우리는 외형의 크기보다 내면의 깊이로, 세상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공동체로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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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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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호 목사]북한 동족 구원과 북한인권 운동은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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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은 1970년대에 들어 기독교를 체제의 적으로 규정하고, “더 이상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선전을 서슴지 않았다. 국제 기독교박해조사기구(ICC)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도 정치범수용소에는 5만에서 7만 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감되어 있다. 태영호 전 외교관의 증언, 탈북자들의 간증, 그리고 북한 당국의 내부 교육 영상까지 종합하면, 오늘도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각오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스스로가 지하교회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아픔도 감수하겠다고 고백했다(롬 9:1-3). 모세 또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감수하겠다고 했다(출 32:32). 바울과 모세, 구약과 신약을 대표하는 두 믿음의 거장이 보여준 심정은 곧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절절한 기도의 대상이 있다. 바로 2천3백만 북한 동족이다.
한국교회는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대동강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에서 시작된 한국 복음의 불길은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으로 타올랐고,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통해 신앙의 순결과 애국의 모범이 세워졌다. 그러나 김일성 정권의 교회 탄압으로 수많은 성도와 목회자가 남하하면서, 그들의 눈물과 믿음이 남한 교회의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남한교회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북한 성도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동족 구원과 북한 인권 개선은 다르지 않다. 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북한을 위해 기도해 왔고, 탈북자를 구출하고 돕는 일에도 앞장서 왔다. 정치가들은 북한인권을 정쟁의 도구로 삼기도 했지만, 교회는 순수하게 동족애로써, 신앙의 책무로써 북한인권을 붙들어야 한다.
오는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광장과 플라자호텔에서 “2025 서울 북한인권세계대회”가 열린다. 9개국 76개 북한인권 단체와 미국 인권재단(RHF)이 함께 주최하며, 전 세계 30개국의 탈북자 대표들이 서울에 모인다. 정부 지원 없이 오직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준비되는 이번 대회는 북한 동족 구원과 자유를 향한 간절한 외침이 될 것이다. 북한 지하성도들의 필사성경 원본, 지하성도들의 신앙일지 원본, 6명의 북한억류 선교사 특별 부스전시, 남북한 예술가들의 함께하는 음악회, 국제적 저명한 북한인권전문가들의 초청되었다. 토털 컨벤션으로 펼쳐지는 한국 최초의 민간단체 주관 북한인권세계대회이다.
한국교회는 이 대회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바울과 모세의 심정으로 기도하고, 참여하고, 도와야 한다. 북한 동족이 자유와 복음을 누릴 그날은 우리의 기도와 순종을 통해 더 앞당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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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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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목사]AI시대, 슬기로운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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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큰 물결 앞에 서 있다. 물론 우리가 오늘날 주로 이야기하는 AI는 엄밀히 말해 거대 언어 모델(LLM)이라는 특정 기술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프롬프트(prompt, 사람이 AI에게 원하는 작업을 지시하는 질문이나 문장)에 내가 원하는 것을 입력하면 그 요청을 바탕으로 방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단순히 정보를 찾아주는 수준을 넘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동영상 제작이나 작곡 등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 최근에는 AI가 에이전트(agent)처럼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모든 단계를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목표를 이해하고 과정을 스스로 연결해 수행하는 지능형 대리인에 가깝다는 뜻이다.
이런 시대에 교회가 취할 몇 가지 태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AI 문화와 트렌드를 이해하자. 새 기술이 나올 때마다 ‘안 쓰면 뒤처진다’는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AI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AI가 아무리 탁월해도 우리의 신앙과 사역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AI 문화를 이해하려는 수고는 필요하다. 이미 많은 성도가 일상에서 AI를 사용한다. 양 떼의 형편을 살피는 목자의 마음으로, 성도들이 실제로 접하는 문화의 언어와 사용 맥락을 알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문화 속에서 겪는 신앙적 고민과 유혹을 식별하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AI 문화를 아는 것은 기술 박식함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화를 살아내는 사회와 공동체 구성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애씀이라 여겨진다.
AI를 목회 조력의 도구로 활용하자. 하나님께서 문화를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그 문화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복음적 목적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AI가 가진 기능들은 복음전달과 목회사역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조력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말씀연구를 돕는 도구로서 AI가 가진 정보력을 바르게 활용하면 더 깊이있는 말씀 전달이 가능하다. 설교 내용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이미지나 동영상 등을 제작하여 말씀의 전달력을 높일 수 있다. 사역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다. 재정적 한계나 인력 부족으로 시도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돕는다. 작은 예로 디자인 전문인력이 없는 소교회의 경우 아이디어만 있으면 간단한 AI툴을 이용하면 전문가 수준의 디자인을 얻을 수 있다. AI는 저비용 고효율의 결과물을 제공하므로 목회 조력의 도구로 잘 활용한다면 사역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AI에 의존하거나 종속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AI를 사용하다 보면 편리함으로 인해 내가 해야할 부분까지 의존하기 쉽다. AI를 사용하되, 사용자보다 AI가 앞서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AI를 사용할 때 최종 권위는 AI가 아니라 사람, 바로 사용자 자신에게 있다. AI를 통해 얻은 풍성한 자료와 아이디어들을 복음의 본질에 비추어 검증하고 선별해야 한다. 특히 사실 오류의 가능성이나 알고리즘 편향 문제에 대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유의해야 한다. 아울러 '과정의 영성'을 잃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여야한다. AI가 조력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도록 조절하여 사용하는 것이 이 시대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AI 시대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AI가 일상이 되는 사회는 인간의 가치를 업무의 효율성이나 능력으로만 평가하는 비성경적인 관점이 만연할 수 있다. 그런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고유의 가치와 존엄성을 바르게 세우는 일에 힘쓰는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한다. 기술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그 기술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AI라는 새로운 도구를 두려움이나 맹목적인 기대로 대하기보다 각자의 소명과 필요에 따라 지혜롭게 사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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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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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교수]결혼한 부부의 성경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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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결혼한 부부의 관계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성경본문은 아마도 창세기 2장이나 에베소서 5장이다. 요즘처럼 이혼과 비혼이 비정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 시대에는 교회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설교를 듣기가 쉽지 않고 에베소서 5장은 가부장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에베소서 외에 부부 관계를 묘사하는 특별한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7장 3-4절이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부부관계를 이 성경구절에 호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위 본문은 분명 그리스도인 부부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가르침이다. 이 말씀에서 “의무”는 “빚”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은 “빚을 갚으라”는 의미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실상 서로에게 빚진 자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에게 진 빚을 평생 갚으며 살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부부의 채무관계는 둘 중 하나가 죽을 때 끝난다. 과연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빚”을 졌다는 것일까? 빚에 해당하는 내용을 4절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몸”이다. 그렇다면 부부가 서로에게 “몸”을 빚졌다는 말인가? 바울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 왜냐하면 부부는 둘이지만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때문이다.(창 2:24)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 즉 부부관계를 성경의 가르침대로 “한 몸”을 이루는 관계로 본다. 그것은 부부관계의 “한 몸”을 단순히 정신이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 따르면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관계의 “한 몸”이란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만 하나가 아니라, 서로의 육체까지도 하나라는 의미다.
그래서 바울은 아내와 남편이 각자 자기 몸을 결코 자신만의 것인 양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여기서 바울은 확실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권리의 동등성보다는 의무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가르치는 부부관계란 결코 권리의 상호성이 아닌, 의무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부부관계에서 서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면 다툼과 불화는 불가피하고 이혼의 위기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자신의 의무를 고려하면 일어날 갈등도 다툼도 사라진다. 그래서 바울은 부부관계란 의무의 상호성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강조한다. 부부가 되기 전에는 각자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부부가 되면 둘이 한 몸, 즉 하나의 새로운 공동 인격체로 거듭난다.
따라서 남편의 잘못은 곧 아내의 잘못이고 아내의 실수도 남편의 실수다. 함께 권리를 나누고 의무와 책임 역시 함께 져야 한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결코 각기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부부는 한 몸, 즉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따라서 남편이 자신만의 권리를 아내에게 주장한다거나 반대로 아내가 자신만의 남편에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아내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아내 역시 비록 남편이 부족할지라도 얕보거나 무시하지 말고 절대 복종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친 남편과 아내의 관계다. 창세기와 에베소서,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친 부부관계는 어떤 상충도 모순도 없다.
부부는 “한 몸”이라는 사실, 그리고 “한 몸”으로 서로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채무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예외적인 극단의 경우 외에는 이혼할 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성격차이’라는 이유로 이혼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부부 사이도 성추행이 성립 가능하다’는 해괴망측한 세상 법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 불가능할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인 “결혼한 부부의 성경적 관계”를 영적인 의미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거룩’은 단순히 영적인 것에만 해당하는 요구가 아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육체적인 거룩을 매우 강조하다. 간음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등의 명령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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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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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문 목사]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γη Θεο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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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로마서 1:17)
사도 바울이 전한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이자, 인류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역사 속에서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오해와 두려움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이 표현 앞에서 가장 깊은 고뇌를 했던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는 처음에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를 ‘죄인을 정죄하시는 기준’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고, 그분은 완전한 의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앞에 선 인간은 필연적으로 심판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 아닌가? 루터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수도원에서의 고행, 철저한 자기부정, 끝없는 고백과 기도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던 중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는 가운데 놀라운 빛을 보았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인간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죄인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속의 은혜임을 깨달은 것이다. 루터는 이 순간을 “천국의 문이 내게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이 깨달음은 곧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울과 루터가 말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이나 공정성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하신 구속행위를 뜻한다. 이 의는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신 예수의 순종과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해 역사 속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의가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설명한 내용이다.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요,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의를 숨기지 않으시고, 동시에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복음의 기적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정죄가 아닌 구원이며, 심판이 아닌 은혜다.
그러나 중세 신학은 이 복음을 점차 잃어버렸다. 특히 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만 이해했다. 이에 따르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가 아닌 인간의 협력과 공로의 결과물이 되어버린다. 이 사상은 중세 로마가톨릭의 신학으로 이어져, 종교개혁 이전까지 의롭다 함은 행위와 믿음의 결합으로 성취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바울은 이 잘못된 길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는 의롭다 함은 오직 믿음으로, 그것도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외래적 의’(alien righteousness)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빌립보서 3장 9절에서도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강조하며, 율법에서 난 자기 의를 단호히 버린다. 이 의는 단지 상징이나 선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제공된 ‘구속적 의’다.
루터는 이 의를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라고 불렀다. 인간은 이 의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다. 이 믿음은 자격이 아니라, 빈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외래적’이며, 철저히 ‘객관적’이다.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신 것이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불순종이 인류를 죄 아래 두었듯, 그리스도의 순종은 인류를 의 아래 두었다. 이것은 단지 윤리적 모범이 아니라, 대속적 구속의 실제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대신해 드려진 것이며, 우리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밖에서 완성된 것이다.
이 의는 유한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순종과 죽음은 영원한 순종이다. 그러므로 그 의 또한 영원한 의이며,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 인간은 결코 그 의를 스스로 만들 수 없고, 과거의 불의를 스스로 바로잡을 수도 없다. 오직 이 ‘외래적 의’가 죄인을 살리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만든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모든 죄인에게 열려 있다. 그것은 과거에나 필요한 구원의 원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삶과 죽음, 소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인간들에게 유일한 피난처다. 어떤 죄도, 어떤 실패도, 어떤 상처도 이 의보다 크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의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고백은 루터를 일으킨 고백이었고, 바울이 외친 복음의 핵심이었으며, 오늘날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이제 우리도 이 의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 율법이 아닌 은혜로, 내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신양생활을 해야 한다.
롬1:16~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δικαιοϬύνη γὰρ Θεού ἐν αὐτῷ ἀποκαλύπτεται ἐκ πίστεως εἰσ πίστι ν,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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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