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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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동아시아 사람에게는 익숙한 선문답 같다. 깊이 들여다보면 아둔한 사람이 ‘퍽’ ‘확’ ‘쾅’ 깨치는 천둥 같은 가르침이지만, 설렁설렁 보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 같달까. 종잡기 어렵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골이 깊다. 어리석은 제자들과 지혜로운 예수 사이의 대화는 어리숙한 신자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좋은 교육이다.

우리 주님 말씀, 참, 맥락 없다, 제자들에게. 기껏 드실 양식 구하느라 온 동네 돌아다니며 탁발을 했건만, 스승이 한술 떠야 제자도 먹는데, 얌체처럼 혼자 드셨다는 건가, 뭔가. 드실 것이 있으면 나눠 먹어야지. 제자 수준에서는 알아먹지 못할 말씀만 하는 예수님이 멀면서도 오묘해 보인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론으로 풀면 되지 싶다. 인간이란 무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동물과 천사의 두 얼굴을 지녔다. 동물이란 본능, 욕망, 야수적 폭력과 악을 말하고, 천사는 동물적 제약을 뛰어넘은 인간, 곧 철학에서 말하는 성찰적 인간일 테고, 신학에서는 초월적 관점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이다.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와 타인을 보기, 그리고 사랑하기.

그러니까 여기서 양식은 제자들에게 동물적 차원, 예수에게는 천사적 맥락인 게다. 분명히 말하지만, 피곤해서 우물가 기대고 누운 예수에게 주린 배를 채울 양식이 필요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되고 만다. 몸이 없는 영은 없다. 영이 육이 되었고, 변화된 몸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풀 스토리에서 보면, 영과 육은 하나다. 말씀 없이 살 수 없고, 밥 없이도 못 산다.

인간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닌 것을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인간은 신(神)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이유를 소크라테스와 톨스토이는 ‘생각’에서 찾는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은 기계적, 산수적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행위를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본능적,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단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가른다. 바로 ‘의미’이다. ‘가치’라고 해도 된다. 먹기만 하고, 배만 부르면 끝인 것이 동물과 인간의 공통점이지만, 아니, 인간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먹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추구한다. 그것이 없으면 동물이 되고 만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동물이 자살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게 있다는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데, 하여간에 인간만 자살을 한다. 하긴, 대량 학살을 하는 것도 인간이지. 그것은 공허해서 그렇다. 살 이유와 의미를 모르면 죽음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살 이유와 의미를 찾으면 그걸 위해 죽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전에 도를 듣고 깨치기만 한다면,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신 말씀은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장삼이사의 희로애락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겠으며, 오병이어 표적을 일으킬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 없이는, 그러니까 육체적 주림을 해결해야 영적인 것도 찾는다. 아니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동시적이라고 해도 되고.

우리 사회의 한켠에는 여전히 먹을 것의 문제로 고달픈 이들이 많다. 다른 한쪽에는 의미의 부재로 인한 영적 공허와 허기로 방황하고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이들이 많다. 앞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마가복음의 이적 또는 요한복음의 표적이 필요하다. 뒤의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필요하다. 그걸 먹지 못하니까, 진짜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니까 별 짓 다 하는 거다.

C. S. 루이스가 생각나는구나. 그는 일평생 ‘기쁨’(Joy)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뒤에는 어땠을까?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대략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기쁨이었다. 그 기쁨의 근원과 실체를 만난 다음에는 기쁨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다. 그게 인간이다. 의미, 가치를 발견하면 산다.

나는 예수가 좋다.

배가 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맘이 고픈 자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예수가 좋다오.

오늘도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열심히 글을 짓고, 가족들의 먹을 것을 위해, 교우들의 영적 양식을 위해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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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목사]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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