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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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구영신, 어제의 마지막과 오늘의 시작, 12월 31일 밤12시와 1월 1일 새벽0시는 무엇이 다를까? 12월 31일에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움직이지는 않지만, 1월 1일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저 멀리 있는 동해나, 저 높은 곳의 산을 오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똑같은 해인데 과연 무엇이 다르기에 사람들의 반응도 다른 것일까?

해의 무게가 늘어난 것도 아니고, 둥근 원이 더 커진 것도 아니며 하물며 해의 주변에 새로운 물체가 생겨 변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바로 12월 31일과 1월 1일, 단지 시간 차이이고, 이 하루의 시간 차이가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든 알지 못하든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1월 첫 주, 내 삶의 변화를 이끄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첫째, 의미가 무엇인가? 의미는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생각의 결과이고 철학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고생이 기쁨으로, 고난이 견딜 수 있는 훈련의 과정으로 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의미가 없으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내가 없어지며 모든 에너지를 자녀에게 쏟아 부어야 하는 고난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의미가 부여되면 어떠한가? 나에게 허락된 최고의 선물, 기쁨이 바로 자녀이고, 삶의 이유가 자녀 양육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을 더 확장시켜 오늘 내 삶의 행복과 기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으니 하루가 왔다고 해서 그냥 저냥 하루를 보내면 의미있는 삶을 살아내기 힘들다. 어제 죽은 누군가에게 오늘은 꼭 살고 싶은 하루였을 것이니, 이 하루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에 따라 행복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둘째, 의미는 누가 만드는가?

내 삶의 의미는 당연히 나 자신이 만든다. 내가 겪은 일이 어떤 이유 때문에 왔으며, 이 일로 인해 내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정확히 알기란 힘들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 나 중심으로 살다보면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숨어 있다. 사실, 인생의 주인공은 나고, 내 의지와 힘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를 만드신 분, 내 삶을 이끄는 분의 도움이 없이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겉으로 봐서는 내 삶의 의미를 내가 만드는 것 같지만, 결국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지속시키는 것은 내가 아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말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삶이 주어진 것은 창조주에 의한 섭리이고 뜻이자 의미로운 사건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회가 만만치 않아 삶에 의미를 갖기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많았다. 행복, 감사, 기쁨은 나와 먼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답을 찾았다. “나는 여수룬, 행복자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가 인생의 종점인지 알기에 오늘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의미가 무엇이고, 누가 의미를 만드는 것인지 알았다면, 마지막으로 의미있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살리는 일이다. 오래 전에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드라마의 명대사 중 하나는 김사부가 후배 의사에게 “의사는 돈, 명예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라고 말한 장면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육을 치료하는 의사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영혼을 치료하는 목회자들,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성도는 개인의 삶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며, 사회를 살리는 사람들이다.

 

작년과 다른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것인가? 나는 올해도 작은 촛불처럼 나를 태워 청소년을 살리고, 청년을 살리고, 장년들을 살리려고 기도하고 있다.

비록 이 일이 쉽지 않지만, 의미있는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기에 다시 힘차게 한 걸음 내딛는다.

여러분도 다시 한 번 의미를 생각해보자.

2022년, 함께 사람을 살리고, 성령으로 교회를 살리는 이 일에 새 의미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2022년 12월 31일에는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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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작년 그리고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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