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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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기독교 입문

전영창은 1917년 12월 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여원리에서 전일봉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영창의 할아버지 전치선은 일제치하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를 믿으면 독립도 할 수 있다는 말에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영창의 아버지 전일봉도 할아버지의 독립정신과 신앙심을 이어받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읍내 장터에서 열변을 토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하였다. 전영창 나이 세 살 때였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아버지의 교육열로 전영창은 집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안성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했다. 미국장로교 선교사 보이어(Elmer T. Boyer,1893-1976)가 해마다 두 차례 그의 동네로 와서 성찬식을 베풀곤 했는데 이때 전영창은 성구암송책에 있는 성경구절을 전부 암송하고 소요리 문답까지 막힘없이 다 외우자 보이어 선교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영창을 학비까지 지원해 주며 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서 근로장학생으로 공부하게 해 주었다. 1936년 5년제 신흥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 촉탁선생이 되었으나 학생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쫒겨났다.

 

일본유학과 투옥

신사참배 강요가 전국을 휩쓸 때 끝까지 이를 반대한 전영창을 눈여겨 보았던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William Alderman Linton,1891-1960)이 영창을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가도록 지원해 주었다.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영창(21세)은 신학교를 마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참여하다가 1941년 12월 1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신사참배 반대자 일제 단속에 걸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꾸오까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루고, 5년간의 집행유예로 출감하여 조국에 돌아와 주거 제한 속에 활동하였다.

영창은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임을 깨닫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작정하고 투옥될 때부터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영어공부에 혼신을 다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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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창 선생

 

해방과 미국유학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 합격한 후 미군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가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벧종드를 소개해 주었다.

벧종드는 자신의 모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 기특한 청년을 포옹하며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해 주었고 개인경비까지 다 부담을 해 주었다. 당시 미군정청 산하 외교업무 담당처는 첫 한국유학생을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여권과 비자를 발급해 줌으로 1947년 4월 건국 이후 최초의 유학생이 되어 펜실베니아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생활을 시작했으나 2년 뒤 미시간주 홀랜드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51년 1월 웨스턴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때 1951년 1월 3일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전영창은 뮬더 학장을 찾아가 지금 바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되면 나는 조국에 돌아갈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일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조국을 위해 일을 시키려고 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만약 조국에 돌아가지 않으면 주님뿐만 아니라 동포들까지 배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제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모른 체한다면 목자는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점령하기 전에 돌아가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배평모,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종로서적, 1996. 23-24쪽)

뮬더 학장은 졸업을 두 주 남기고 포탄이 쏟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며 막아섰다. “학위를 받으려면 졸업을 해야 하니, 두 주일을 기다리며 사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전영창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학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완강한 태도였다.

전영창의 고집을 꺽을 수 없음을 깨달은 뮬더박사는 귀국을 허락하고 수속도 책임질테니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라, 그리고 두주일 후의 졸업시험은 치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전영창은 학장의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학장은 이사장과 협의하여 졸업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여 1951. 1. 8일 저녁 학장실에서 뮬더 박사의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졸업장을 수여했다.

귀국경비는 학장의 친구 게리드윗 목사의 도움으로 해결하였고 게리드윗 목사가 주변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비행기 티켓 값은 물론, 전란중의 조국을 도우려는 전영창을 위해서 미화 5,000불을 별도로 모금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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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알기]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1917.12.26~197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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