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8-0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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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4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는 캐서린 존슨이라는 여성이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면서 "존슨은 우리의 영웅일 뿐 아니라 그의 삶과 품위는 전 세계에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녀가 보여준 용기와 그녀가 없었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이정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미 정부는 그녀에게 2015년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으며, 그 일대기를 소개한 소설은 2016년 영화화되어 이듬해 유수의 상을 휩쓸었는데 일반 개봉에 앞서 당시 오바마 대통령도 참석한 가운데 백악관에서 특별시사회까지 열었던 그 제목이「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입니다. 천재적인 수학자였지만 평범한 계산원으로 묻힐 뻔 했던 한 여성이 소련과의 우주개발경쟁에서 우주선의 정확한 궤도와 이착륙지점을 계산해내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비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흑인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이중적인 차별과 그로 인한 분노와 아픔을 800m 떨어진 <유색 여성 전용 화장실> 같은 상징적인 장치로 깊은 여운 속에 담았습니다.

 캐서린 존슨 한 사람 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은 차치하고라도,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능력과 소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얼마나 많은 '히든 피겨스'가 있었을까요? 아니,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해 차별은 차치하고 성적 추행과 같은 피해에 시달리면서도 침묵을 강요당했던 얼마나 많은 '히든 피겨스'가 존재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다고 하는 우리 사회를 바라봅시다. 얼마 전 최대지방자치단체장의 극단적인 선택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에 상당히 훌륭한 시정을 펼쳤던 인물이었던지라 놀라움이 컸고, 자신의 여비서와 관련된 성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초래된 비극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 컸습니다. 이번에는 가해자의 사망으로 끝이 났지만, 그러나 그 동안 성적 피해자가 2차 가해에 시달리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은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억울하게 숨진 여배우 J 사건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고, '별장 성접대 사건' 가해자들은 풀려나온 반면 피해 여성들이 보상이나 위로를 받았다는 얘기가 없질 않습니까?

 자크 라캉은 여성을 '전체가 아닌(Not-All)' 존재라 불렀습니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배제된 타자(他者)라는 뜻이며, 물질중심적이고 소비지향적인 욕망의 구조 속에서 때로는 성적 환상으로만 대접 받는 현실을 고발하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소수자(social minorities)'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절대적인 숫자가 부담스럽다면 성경적인 표현대로 "작은 자(elakiston, minimis, 마 25:40, 45)"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까지도 배려하는 말씀과 행위를 보이셨건만, 그러나 우리는 명백하게 통전적(holistic)이어야 할 하나님 나라조차도 남성 위주로 형성된(King of God) 그런 신학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사시 디아즈(Isasi Diaz)는 '킹덤' 대신 '킨덤'이라는 표현을 제시했고(Kin-dom of God, Mujerista Theology, 2004), 피오렌자(Fiorenza) 같은 이들은 '왕국(Kingdom)' 대신 '바실레이아'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Discipleship of Equals, 1993).

 세상의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바라봅시다(마 7:3-5). '그루밍(grooming) 성범죄'가 교회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동물이 털을 쓰다듬는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 말은 친분이나 보호 관계를 이용해서 저지르는 성범죄, 즉 최근의 'N번방' 등에서 거론되는 표현이라 교회에서 등장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극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교회만큼은 여성을 향한 비하나 모욕적인 표현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청정지역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사회 전 분야에서 이른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깨져가는 등 여성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비해 신학과 목회 현장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고 나아질 기미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계 행사에서 여성도를 아직도 '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커피는 당연히 여성이 타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말입니다. 십자가 작은 핏방울이 교회의 밑거름이라는 사실을 유념하고, 여성을 비롯한 작은 자들을 위한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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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작은 자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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