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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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세 장로(온천제일교회)

 오랜 인간의 역사를 통해 살펴볼 때 인간의 숙명(運命)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동양의 관상학과 사주팔자(四柱八字), 풍수지리 따위나 농업과 깊은 관계를 가진 음력을 중시하는 동양인들은 삶을 통한 경험이나 통계적 시각에서 체계화시킨 인간의 숙명은 자유 의지적 선택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인생이 숙명적(宿命的)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숙명에 대한 타당성과 창조주의 섭리(攝理,야훼의 의지))와의 관계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창조주의 섭리‘라는 말은 창조론을 믿는 학자가 아닌 ‘진화론적 개념’을 따르는 학자들은 완강히 부정한다. 인간사의 모든 일은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 뿐 숙명 따위는 결과론적 변명이란 것이 행동주의자들의 태도인 반면 숙명론자들은 한 사람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숙명이나 운명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떤 사건이나 사고의 결과를 두고 마치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으로 들리기도 한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인간생활에는 불가항력적인 사건도 적잖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무조건 인간의 운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가령,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향해 인도로 걸어가는 도중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승용차와 기타 여러 종류의 차가 갑자기 운전미숙이나 엔진고장 등으로 인해 인도로 돌진하여 지나가던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경우를 목도하다보면 갑자기 피해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숙명이나 운명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불가항력적으로 닥친 사건을 두고 생각해 보면 그 순간 본인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과는 전혀 관계없이 어떤 사고나 사건이 발생했다면 자유 의지적 선택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수백 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과 Covid19로 인한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 그리고 근래 38명의 희생자를 낸 이천물류창고 폭발사건의 피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재에 가까운 이 모든 사건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숙명이란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이들 사건에는 많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즉, 우리나라 형법에서도 불가항력적인 사건과 긴급피난 따위의 행위는 흔히 무죄가 되는 이유가 바로 본인의 자유의지나 선택의 여지가 전혀 반영 될 수 없는 조건을 전제로 한 불가항력적인 경우에 한해 적용된다.

인간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두고 따져볼 때 한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종교의식, 기술이나 취미, 잠재능력, 성격, 생활방식에 따라 선호하는 기호가 다르고 선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많은 경험과 지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생활의 적응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의 개념을 사고능력이나 종합적인 문제의 해결능력 또는 환경의 적응능력이라고도 한다.

나는 지금까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숙명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잘못해서 나쁜 결과를 초래했는데도 마치 자기합리화를 도모하기 위해 숙명이란 말로 포장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수영을 좋아해서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사망한 경우, 흔히 사람들은 숙명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다. 익사를 방지하려면 아예 수영을 하러 가지 않으면 될 것이고 또 굳이 수영하고 싶으면 수영의 기술을 충분히 익혀 연습하면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본인의 자유의지와 선택이 전혀 반영될 수 없는 여건이거나 조건이 주어질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형법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이란 상황은 자유 의지적 선택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5층 건물에서 갑자기 불이나 급히 대피해야 하겠는데 순간적으로 너무 급한 바람에 창문을 열고 급히 뛰어 내렸더니 그때 마침 불구경하던 다섯 살 아이가 깔려 죽었다면 살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 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을 분석해서 부주의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가 된다. 사건당시 창문을 열고 밖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살펴보지 못하고 뛰어 내렸을 경우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반면에 반대로 5층에 불길이 심하게 번져 피할 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생명에 위험이 닥쳐와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밖을 살펴 볼 겨를이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뛰어내렸다가 설사 아이를 치어 죽였다 하더라도 살인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인 긴급피난이 적용’되기 때문에 무죄가 성립된다.

‘창조주의 섭리’가 곧 불신자들이 흔히 말하는 운명이나 숙명과 유사한 점도 없지 않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전문어부인 베드로를 가리켜 후일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분히 계획적이고 마치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을 떠 올리게 한다. ‘모세의 사건’이나 ‘요셉의 일생’ ‘바울사도의 신앙심’ 그 외에도 수많은 일들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알파(창조주)와 오메(심판주)가 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손으로 지으셨다. 즉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 의해 이루어 졌음을 짐작케 하는 동시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창조의 역사를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시고 섭리 하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고 우리는 만세전에 예비하시고 섭리하셨다는 말을 곧잘 한다. 구약이 신약의 예언서요 매시야가 오실 것과 예수님의 부활 역시 예언이요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적인 선택을 두고 논할 때 학자들은 인간여생이 마치 커다란 파이프 같은 카테고리라는 한계적 상황에서 좌, 우로 움직일 수 있는 미세한 운신의 폭이 곧 자유 의지적 선택이라고 역설하는 학자도 있다.

즉, 건강관리를 위해 음식과 운동을 적절히 병행함으로 다소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국에는 모든 인간은 병들거나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란 사실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굳은 의지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결정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일을 하다가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또 아무리 과학적으로 계획하고 검정하고 도전해도 Covid19처럼 자연 재난이 닥쳐오고, 태풍에 바닷물이 쓰나미로 밀려 올 때는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 막을 길이 없는 지극히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육지와 하늘, 바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각종 사고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자유에 의한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 나머지 도전하여 성취감과 혜택을 누구보다 많이 본 사람으로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이를테면 밤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은 무엇을 먹을까? 라고 생각해서 선택하는 일이나 오늘하루 나는 무엇을 할까? 라고 생각해서 결정하는 일은 모두가 본인의 생각과 자유 의지적 선택이라고 생각했지 운명이나 숙명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피 동체란 생각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디 불완전하고 순간순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심지어 불신자들도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때때로 급변하는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란 말에 공감이 갈 때가 많다. 나는 부끄럽게도 나의 의지에 의해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를 지혜롭게 잘 피해가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았다.

솔로몬은 일찍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강조한다. 무소불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무척 쉬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분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 다’는 속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울사도가 무식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이방전도에 힘을 쏟은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의 뜻에 달린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힘써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살아간다.

불교에서는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공덕을 쌓으므로 비로소 ‘성불’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숙명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의한 자유 의지적 선택’이란 뜻이 된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에서는 구원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요 아무런 조건 없이 받은 은혜”란 차원에서 개인의 공덕이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요한복음 3장16절에 명시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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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인간의 숙명과 창조주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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