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작년 2018년 말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20대 여성들의 높은 지지도와 비교되는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는 무슨 의미일까? 20대 남성들의 가치관이랄까, 아니면 그들의 고민과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고맙게도 20대 남성들을 분석한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그것은 곧, ‘프레카리아트’, ‘밀레니얼 세대’, ‘90년대생’, ‘밀레니엄 대학생’이다. 이것을 분석하면 20대 남성들의 가치관과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 프레카리아트의 등장
먼저,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에 있는 노동자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Precàrio, 불안정한)’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노동자 계급)’를 합성한 것이다. 직역하면 ‘불안정한 노동 계급’이란 뜻이다. 직업이 불안정하고 저임금을 받고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뜻한다.
한국의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 처럼 유럽에도 1,000유로 세대(Generazione 1000 euro)가 있다. 기본생활만이 가능한 수준인 월 1,000유로 정도를 벌기도 힘든 유럽의 20-30대를 말한다. 역시 일본에도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가 있는데, ‘깨닫다, 득도하다’라는 뜻의 사토루(さとる)에서 나온 말로 일본의 오랜 경제 불황 속에서 성장하여 돈과 출세에 관심이 없는 일본의 20-30대를 말한다. 그리고 이들을 계급적으로 부를 때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프레카리아트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 시장이 유연해지면서 등장했다. 대개 일용직 등의 비정규직이나 파견직과 같은 간접노동 형태로 불안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별다른 직업 경력이 없고 안정적인 고용 전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다수의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고용·노동 상황으로 인해 저임금에 시달리며, 사회보험 가입 등에서도 법적·실질적으로 배제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불안정성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며 일종의 계급으로 굳어지고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인싸(주류세력)들의 금수저-금수저의 계급 세습이 이들에게는 흙수저-흙수저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9면-문화.jpg▲ 20대 남성 지지율 저하의 의미?
 
2.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과 ‘90년대생’이 온다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 Generation)’는 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사이에 출생하여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세대로,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소통에 익숙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시대의 아픔 속에서 문화적으로 ‘모자람이 주는 충족감’, ‘불완전함이 갖는 미학’에 매력을 느끼며 ‘낡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정신적 충족감을 얻는다.
밀레니얼 세대를 좀 더 세분하여 90년대생들에 주목하여 보자.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 (웨일북, 2018)에서 이렇게 말한다. “90년대생들의 의식은 기본적인 자아실현의 충족을 위해 힘쓰는 ‘유희 정신’에 기울어져 있다. 이념적 세계보다 연극적 세계가 더 중요하다. 물론 이들도 앞선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과 다른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 유희를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점은 이들의 세계를 다르게 만든다. 이들은 스스로를 어떤 세대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 책은 1982년생인 저자가 1990년대에 출생한 신입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접하며 받았던 충격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90년대생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특징을 ‘간단, 재미, 정직’으로 정리해 준다. 그리고 90년생들이 생각하는 회사생활의 한 일면을 이렇게 들려준다.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발전보다는 자신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상사 눈치 안 보고 정시 출근과 퇴근을 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싫으면 관두는 것이 바로 이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임홍택의 말을 들어 보자.
“과거 70년대생과 그 이전 세대에게 충성심이라는 것은 단연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생에게 충성심은 단연 자기 자신과 본인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충성의 대상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다르니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90년대생들을 위한 조직 문화 개선 방안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충성도에 회사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90년대생은 어려서부터 이미 인터넷에 능숙해지고 20대부터 모바일 라이프를 즐겨온 ‘앱 네이티브’이다.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이들 90년대생들은 웹툰이나 온라인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생겨나는 신조어나 유머 소재들을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따라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이들에게는 허물어졌다. 증강현실(AR)게임을 소재로 한 tvN 주말 드라마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드라마로 진출한 90년대생들의 세계관이다.
또한 종이보다 모바일 화면이 더 익숙한 90년대생은 온라인 게시물이 조금만 길어도 읽기를 거부하고, 그나마도 충분히 궁금증이 일지 않으면 제목과 댓글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넘겨버린다. 따라서 이들은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가진 서사보다 맥락이 없고, 표현도 거칠고 어설픈 B급 감성에 열광한다. ‘참견(參見)’보다 ‘참여(參與)’에 긍정적인 세대인 것이다. 임홍택의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참여라는 말에는 긍정적이지만 참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참견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나 말 따위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함’이고, 참여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와 어느 정도 관계있는 일이나 말 등에 직접 나서고자 한다.”
많은 90년대생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고, 일터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하며, 참여를 통해 인정 욕구를 충족하려고 한다. 그들은 회사가 평생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헌신의 대상을 회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로 삼는다. 안정을 추구하는 공무원을 선호하는 한편, 창업의 길을 꿈꾸기도 하며 언제든 이직과 퇴사를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을 위해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기 마련이고,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선택에 훈수를 두거나 참견을 하곤 한다. 그러나 임홍택은 기성세대의 ‘과거의 경험’이 더 이상 90년대생을 ‘판단할 근거’가 되지 못하는 세대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그래서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상사의 모습이 ‘꼰대’인 것이다.
여기서 꼰대는 ‘전형적인 한국사회의 기성세대들’을 말한다. 기성세대들인 꼰대들은 무조건 가르치려 들고, 젊은 사람들을 야망 없고 패기 없고 조직에 안 맞는 나약한 인간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자기 말만 늘어놓는다. “한 때는 내가~!” “옛날에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
꼰대들은 양면적이다. 90년대생이 보기에 꼰대들은 이렇다.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보고를 안 하면 야단을 치고,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고 말하면 그건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니 종잡을 수 없다. 꼰대들의 모임인 대한민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능력 최우선’이라 말해놓고는 뒤로 가서는 은근히 ‘서열’과 ‘계약조건’을 따진다.

3. 밀레니엄 대학생
걱정이다. 이제 서기 2000년에 태어난 이들이 올 3월 2019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따라서 대학은 올해부터 21세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들을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이라고 부른다. 조효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선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놀랍다. 우리 기성세대는 잊고 있었지만, 밀레니엄 시대는 ‘이명박근혜 시대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경쟁’과 ‘실적위주(성적)’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전체의 공정함보다 작은(자신에게 해당되는) 공정성에 물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성은 또 있다. 조효제 교수의 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세월호와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권위에 대한 냉소,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였다.”
세월호를 통해 정치가 소용없다는 것을, 동시에 탄핵을 통해 소용없는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았던 세대가 바로 밀레니엄 세대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두 흐름은 인권의 측면에서는 모순적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한 태도로 인해 ‘정유라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킨 세대가 곧,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미투 열풍’을 더해 성평등의 흐름으로 20대 여성보다 20대 남성들이 더 공정성에 민감해진 것이다.
한림대의 조형근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평범한 20대 남성들도 재벌과 대형 교회의 세습에 분노한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는 세상에 분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더 특권과 반칙에 반대한다. 이들의 보수화를 특권계급이나 노년 세대의 보수성과 동일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들이 양성평등 정책, 군 복무 가산점 폐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진보적 정책에 분노하는 이유는 ‘개인들 간의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빼앗는 반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학종’(학생부종합전형)에 분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학 서열화보다는 정확하지 않은 대학 서열에 분노하는 세대다. 부모의 경제력이 인생을 좌우하는 데 반대하는 만큼이나 성별이 인생을 좌우하는 변수가 되는 데 분노한다. 남자라고 우대받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데, 남자라서 역차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오직 점수로만!’이 이들의 슬로건이다. 경쟁은 계급, 성별, 인종 따위의 비개인적 요소와 무관하게 공정해야 하고, 그 결과와 책임 또한 개인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자유주의 정의론의 전형적 사고방식이다.”
20대의 말을 들어보자. 바른미래당 청년대변인인 김현동 대변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20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정체성과 생각을 공유하는 세대이다. 과거 대한민국에는 그 세대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신이 또렷이 있었다. ‘나의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라는 새마을 정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민주화 정신, ‘나를 희생해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생각을 기반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 극복을 이루어낸 금모으기 운동 정신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저출산 위기, 다가온 통일 등 여러 가지 시대적 과제가 산적한 오늘날, 20대들은 뚜렷한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유교 사회주의’라는 표현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정도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던 과거의 집단주의는 이제 해체 수순에 돌입하고 있다.”
따라서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란에서 20대의 대부분은 설사 이 팀이 남북 평화와 화해의 단초가 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한 선수를 엔트리에서 제외하는 것에 분노했던 것이다. 사실 남북 단일팀에서 60대 이상 강경보수의 분노는 ‘북’이라는 글자에 기인한 것이라면, 20대의 분노는 ‘단일팀’이라는 불공정에 의한 것이었다. 계속해서 김현동 대변인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성평등이 필요하다’라는 명제에 대해, 남녀는 서로 다른 시각을 바탕으로 보고 있다. … 20대 남성에게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는 내가 비난할 대상일 뿐, 책임과 잘못을 분담해야 할 동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20대 남성에게 지난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책임을 분담하라는 요구는 불공정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말해 ‘82년생 김지영’이 살던 세상의 부조리는 ‘92년생 김지훈’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의 확립이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함이 가능할까? 미시적 공정함은 거시적 측면에서는 불공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을까?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형식적 공정에 대한 집착을 실질적 공정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개별 원자적인 반차별 감수성을 인도적 성격의 반차별 의식으로 이끌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지고 있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20대, 혹은 90년대생, 밀레니엄 세대들은 ‘전지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니, 아예 체념 하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가령, 기후변화에 대해 숙명론적인 인식이 많고,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적 불평등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문제 역시 귀찮아한다. 더욱이 ‘연대’와 ‘공동체’라는 의식은 저 멀리 사라진지 옛날이다. 너무 거대한 문제이기에 그 문제에 압도당하거나, 아니면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4. 희망의 인권과 새로운 혁명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가져다준다. 임홍택의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로, 이는 수요자인 기업에 유리한 시기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이 구직 활동을 진행하는 이 시간을 지나, 2000년대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입사를 하게 되는 시점에는 일본과 같이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 일자리보다 취업자가 적어지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90년대 출생자는 687만 명, 2000년대 출생자는 496만 명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구직자들의 눈치를 봐야 할 시기가 올 수 있다.”
따라서 조효제 교수는 밀레니엄 대학생들에게 ‘희망의 인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어보자. “앞으로 십년, 이십년 뒤엔 한반도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엔 이 땅의 모든 사람들―남북한 선주민과 이주자―을 아우르는 포괄적 인권이 우리 공동체의 본질적인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 일을 해낼 주인공들, 능동적 희망의 인권을 실천할 밀레니엄 신입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
지금 프랑스는 노란 조끼를 입은 프레카리아트들이 최저임금과 연금 인상과 함께 외주화 금지, 비정규직 양산의 중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1848년 6월 파리에 정치세력으로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탄생했다면 이제 2019년 프랑스의 노란조끼들의 반란은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레카리아트를 낳았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세상은 ‘촛불 혁명’ 다음에 전체(까지는 힘들다면, 적어도 약자들)의 공정함을 위해 연대하며 공동체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혁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최병학 목사.JPG▲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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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펼치기] ‘82년생 김지영’에게 ‘92년생 김지훈’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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