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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교회사 이야기 - 은성교회
    한양교회와 남부민교회가 하나의 교회, 은성교회로 통합이 되었고 이 교회에 저 유명한 최상식(崔相湜) 목사가 새 담임목사로 부임을 해온 것은 1974년 8월 11일이었다. 그가 교회의 조원경 장로를 통해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부산 은성교회로 부임을 해왔던 당시의 나이는 48세였다. 당시 최상식 목사는 삼각산에서 100일 금식 기도를 한 후여서 그랬는지 영적으로 성령이 충만하였고 변화된 사람으로 말씀에 은혜와 능력이 넘쳐 있었다. 최상식 목사가 부임을 하자 교회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새 당회장의 부임과 함께 교회는 각부 부장의 개편이 있었고 그해 말에는 당회원의 책임분담도 새롭게 되었다. 재정부장에 이건호 장로, 관리부장에 조원경 장로, 교육부장에 박근성 장로, 전도부장에 도환호 장로를 임명했다. 그러나 최상식 목사가 하나의 교회로 통합이 되었다는 은성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으나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 못한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에서 새롭게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다. 최상식 목사가 은성교회로 부임을 한 후의 첫 번째의 기도 제목은 우선 교회건축이었다. 낡은 것은 지나갔고 새롭게 되는 일 만이 그의 가슴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옛 남부민교회의 건물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현재의 교회당이 비좁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서라도 새롭게 성전을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새 성전 건축과 함께 은성교회의 힘은 하나의 교회로 집약이 될 것이고 아름다운 성전의 완성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뀐 1975년 1월, 최상식 목사는 새해의 표어를 전도하는 해,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성도로 정하고 열심히 가르쳤다. 당회에서는 새 성전 건축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미 동의를 얻었다. 마침내 1월 26일에는 건축 기성회를 조직하고 2월 2일에 교회 앞에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최상식 목사가 부임을 하자말자 새 성전을 짓게 된 배경에는 모든 성도들의 단합된 힘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최상식 목사의 목회가그냥 형식적이며 말로만 하는 목회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목회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인들을 사랑하되 진정 그 영혼을 사랑하였고 인간을 사랑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얼마나 교인들을 사랑하였는지 그 실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느 날 이건호 장로의 부인 김순옥 권사가 어깨 쪽에 난 종기가 덧나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때였다. 구역 식구들과 함께 심장을 간 최상식 목사는 그 종기를 직접 손으로 짜주었는가 하면 급기야는 입으로 고름을 다 빨아내어 그 상처를 낫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뿐 만 아니었다. 청년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을 때의 일이었다. 청년 가운데 장원삼 집사가 그만 뱁에 물려서 위급한 지경에 처하였을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최상식 목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직접 입으로 그 독을 빨아내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병원에 입원 치료를 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교인이든 교인이 아니든 이웃에 초상이 나면 언제나 제일 먼저 달려가서 시신에 염을 하는 등 어려운 이웃과 함께 했던 것이다. 언제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교인들을 사랑했던 최상식 목사는 교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목회를 했던 참으로 보기 드문 목회를 한 참으로 보기 드문 목회자였다. 최상식 목사가 주도했던 성전건축이 완성이 된 것은 1979년 8월 31일이었다. 이렇게 새 성전을 건축하고 부흥과 발전을 거듭했던 교회에서 최상식 목사가 돌연 사의를 표명했던 것이다. 그가 교회에 사의를 표한 것은 잘못된 호적 때문에 나이가 정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목사 정년 70세가 원래의 나이보다 6년이나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최목사가 떠나는 김해공항에는 믿지 않는 동네 사람들이 전송을 나왔던 것을 보면 그는 과연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목회자였음을 알 수가 있다. 교회가 합동이 된 후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산적한 교회에서 오직 겸손과 섬기는 자세로 일관되게 목회를 해왔던 그는 1991년 18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남은 여생을 다른 사역지에서 그 사명을 더하기 위해 은성교회를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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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독자투고] 교회사 이야기-봉화제일교회
    1919년에 창립된 경북 봉화의 봉화제일교회는 2년 전인 2019년에 100년을 맞아 역사적인 봉화제일교회100년사를 발행하게 되었다. 이 교회의 담임 권정호(權正鎬) 목사가 제26대 담임목사로 교회에 부임을 한 것은 1993년 3월 28일이었다. 역사의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을 한 그는 앞으로 26년 후인 2019년이 되면 100년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부터 인식하고 부임을 한 그때부터 100년사를 발행할 꿈을 품은 채 목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교회가 걸어온 100년의 역사 가운데 크고 작은 일들이 허다하게 많았지만 해방 후였던 1948년 9월에 있었던 제13대 박기환 목사의 죽음에서 비롯 되었던 그 사건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가슴에 긴 여운으로 남아 있기에 ‘교회사 이야기’에 가장 먼저 소개를 하게 된 것이다. 박기환 목사의 그 사건은 1948년 9월에 있었던 일이었다. 제45회 경안노회가 경북 영덕군 영덕읍교회에서 열렸을 때였다. 노회에 참석을 했던 목사와 장로 총대들이 노회를 끝낸 이튿 날은 영덕에서 20여리 떨어져 있는 강구 바다에서 뱃놀이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40여명의 노회원들이 큰 어선을 빌려 타고 강구 포구를 벗어나 강구의 등대 밖으로 나갈 때 까지는 꽤 기분이 좋았으나 뱃놀이를 하던 중에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 그만 노회원들이 타고 있었던 어선이 전복이 되고 말았다. 그들 중에 헤엄을 잘 쳤던 몇 사람은 등대까지 헤엄을 쳐가서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대부분의 노회원들은 모두 익사를 하고 말았으니 강구 앞바다에서의 노회원들 익사 사건은 참으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참 이상한 일이었다. 봉화제일교회100년사를 집필한 집필자는 당시 강구 국민학교 3학년으로 강구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여서 교회의 전도사님을 따라다니며 그 현장을 모두 목격할 수가 있었다. 강구 부두가에 즐비하게 누어있던 그 시신들은 보는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강구교회 김전도사님은 수레에다 밥과 국, 그리고 주전자에 식수를 싣고 가서 몰려 온 유가족들에게 일일이 대접을 하였는데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전도사님을 따라 다니며 심부름을 했던 것이다. 강구 부둣가에 몰려온 구경꾼들은 불행하게 죽은 이들을 향해 이런저런 말로 비방을 하고 있었다. “예수쟁이들이 죽으면 천당에 가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용궁에 갔구먼.”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전도사님에게 그 말뜻이 무어냐고 물었지만 전도사님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중에 알려 줄게 하면서 그런 말은 잊어버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강구 앞바다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 중에 봉화제일교회 제13대 담임 박기환 목사와 그해 3월에 봉화제일교회를 사임하고 떠나갔던 제12대 장재석 목사도 함께 시신이 되어 부둣가에 누어 있었으니 당시의 심오했던 역사의 감추어진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일 수가 없다. 그 박기환 목사의 불우한 소식이 본시 성내교회라고 불렸던 봉화제일교회로 들려왔던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교회는 약간의 돈을 준비해서 당시 남선교회 회장이었던 박영식 집사를 먼저 강구로 내려 보냈던 것이다. 교회를 대표해서 박 집사가 강구로 왔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박기환 목사의 아들이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의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나 연락을 할 길이 없었다. 이튿 날은 강구에 장이 서는 날이니 하룻밤을 자고 장에 가서 우선 광목 한필과 관(棺)을 구입을 해서 시신부터 수습을 하였다. 그 때가 6,25 전이었으니 트럭을 대절하려고 했지만 엄청난 돈이 있어야 했으니 박집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박집사는 지게를 하나 구입을 하여 지게로 그 관을 나르기로 했던 것이다. 그 때가 9월 중순, 아직 여름의 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여서 시신을 넣은 관에서는 역한 냄새가 났다. 그해 4월에 교회로 부임을 해와서 불과 5개월 남짓 담임목사로 교회에 시무를 했던 박기환 목사의 시신을 그대로 외지에다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강구면 사무소를 통해 봉화군청에 전화를 해서 교회의 청년 한사람을 강구로 와 달라는 부탁을 하자 시외버스를 타고 청년 회장이 강구로 와서 이튿날 두 사람이 번갈아서 지게에다 관을 지고 박 목사의 시신을 옮겼다. 강구에서 금호들을 거쳐 영덕과 지품, 영해, 창수를 거쳐 안동으로 갔고 해가 지면 남은 광목을 몸에 두르고 노숙을 하며 영주를 지나 봉화에 도착을 해서 삼일 되는 날 봉화제일교회당에 우선 시신을 안장하고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 갸륵한 소문이 좁은 동네 봉화군 일대에 두루퍼지자 동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회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의 정성이 저렇게 지극할 수가 있는가? 자기 교회의 담임목사를 외지에 묻어버리지 아니하고 지게에 짊어지고 280여리의 길을 걸어 지극정성으로 교회로 모셔왔으니 그 정성이 정말 대단해!” 박기환 목사의 유해는 봉화군의 석평 2리 유록골에 안장시켰으며 그 박영식 집사는 평생동안 그의 무덤에 벌초를 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교회는 전에 없었던 부흥을 이루게 되었다. 교회의 남선교회와 여전도회, 그리고 청년회는 깨어서 기도하며 새벽에도 모이고 저녁에도 모이며 열심히 기도하기를 게을리 않더니 얼마 안되어 교인의 수가 일시에 배나 늘어나게 되었다. 그 때 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하나가 되었고 함께 뭉쳐 서로 도우면서 그 어려운 때를 믿음으로 승리했다.
    • 기고/강연
    • 기고
    2021-03-05
  • [기고] 현장 점검 공무원을 VIP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코로나 19를 보도하는 세상 언론의 편향된 모습에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신경 끄려 했는데 요즘은 더욱더 심해지는 것 같다. 코로나 19에 조금이라도 교회가 관계있으면 ‘교회발 확진자’라 해서 자극적인 기사를 마구 쏟아낸다. 이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와 교회를 향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비난을 배설하다시피 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어떤가? 교회는 말할 것 없고, 국가 역시 하나님이 위임하신 통치권이 있는 곳이다. 특별히 그들에게는 공권력이라는 칼이 있고, 그래서 기독교인은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상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롬 13:1-7). 그런데,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와 국가가 크게 갈등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다보니 교회 점검인지 단속인지 주일마다 많은 공무원들이 교회로 온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끊임없이 문자가 날라 오고, 전화로 방역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이 온다. 지자체에 따라서는 아주 우호적으로 이 문제를 대처하기도 하지만, 어떤 지자체에서는 아주 강압적인 방법까지 사용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로 인해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관과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에 온 공무원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교회의 법을 존중해야 한다. 법의 집행자이지만 그렇다고 점령군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를 방문할 때 존중하는 자세로 와서 교회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의 경우이겠지만 무례하고 위협적인 말로 안 그래도 울고 싶은 교회의 분노를 자아낸다. 공권력은 힘을 가졌다고 함부로 쓰는 칼이 아니다. 그렇다고 요즘 일부 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의 일탈 행위 역시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방역을 무시하여 대규모 확진자가 나온 일부 교회들, BTJ 열방센터, 대전 IEM국제학교, 광주 TCS국제학교로 인해 기독교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물론 이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관의 비상식적 운영과 지도자들이 내뱉은 말들은 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기독교 용어’였고,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코로나 19 이후 어떻게 이 민족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최근 교회 사무간사가 구청에서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 중 우리 교회가 정부의 방역에 잘 협조해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계속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시청의 담당 국장이 교회를 방문하여 협조를 구했다. 이번 주 혹시 우리 교회에도 점검이 나올지 모르겠다. 솔직히 이런 일을 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나의 불편한 생각을 잠시 접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전도가 정말 안 되는데, 이렇게라도 찾아오는 공무원들이 혹시 하나님이 보내시는 VIP가 아닌가?’, ‘비어 있는 자리에 한 명이라도 더 앉게 해서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로 삼으면 안 될까?’ 너무 발칙하고 허황된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새벽 시간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중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다. 교회에 오는 공무원들이야 위에서 명령을 받아 온 것이고, 이 분들로서는 지난 1년 동안 주일에도 쉬지 못하고 교회에 일하러(?) 온다면 결코 기분이 좋을 리 없지 않는가? 이들 중에는 분명 기독교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공무원들은 이런 일이 아니었으면 교회를 한 번도 방문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들이야 말로 VIP가 아닌가? 매년 교회가 VIP초청잔치를 위해 많은 예산을 들이는데, 찾아온 조금은 ‘불편한 VIP’를 주님의 마음으로 영접하면 어떨까? 상냥하게 맞이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며, 음료를 제공하고, 갈 때는 교회가 준비한 선물을 안겨주면 안 될까? 혹시 적대적인 마음으로 온 사람이라도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간다면 결국 이들이 다음에 VIP로 교회에 오지 않을까? 우리 주님께서는 수가 성의 사마리아 여자를 구원하기 위해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배척하고, 피한 사마리아 땅으로 가셨다(요 4장). 사마리아 여자라는, 이미 5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인까지도 우리 주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이다. 이것이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품는 것이 바로 생명의 도라 불리는 기독교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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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8
  • [기고] 선빵(선제적방역)
    1년이 넘는 팬데믹은 한국교회를 직접적으로 괴롭혔다. 이 시점에 목회자이자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 가지의 대한을 제시해 본다. 그것은 바로 선제적방역이다. 한국교회는 항상 선제적으로 역할을 해왔다. 3.1 만세운동때도 해방후에도 한국에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모든 일에 선제적으로 앞장서 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원망과 불평 그리고 종교에 대한 핍박등을 내세우며 여호와라파만 기다리고 있다. 결국 이것은 한국교회가 세상보다 뒤처져 있고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기독교의 문화를 접한 많은 성숙한 성도들은 비록 교회가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반면 번지수를 잘 못 찾은 몇몇 교회와 목사들로 인해 자영업자들보다 못한 상황에 처한 작은 교회들의 상황을 어디에도 대변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그 이유는 지교회중심주의 때문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과 내 교회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 그리고 각 교회마다 독자생존의 늪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제 정신을 차려 한국 교회를 바라보니 그 동안 왜 그렇게 방어만 했으며 왜 그렇게 공격만 받아 왔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바로교회의 선제적방역의 부재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을 준비하지 못한 한국교회가 대면예배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는 대면예배 중요성의 강조와 다음은 노년층에 대한 배려의 부족 마지막으로 감독교회와 회중교회의 만연이다. 대면예배의 중요성은 한국교회의 역사이고 전통이다. 육신의 가족처럼 성도들을 섬기는 마음이 서로의 대면을 당연시하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순응함에 있다. 노년층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라 함은 비대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사전준비로 노년층에 대한 스마트 기기의 습득과 활용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데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에서 빠른 조치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독교회와 회중교회의 만년이라 함은 (초)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문제가 한국교회전반에 퍼져있다는 것이다. 감독교회라 함은 교회가 커질수록 담임 목사에게 과도하게 집중되는 상향식 성직자 구조를 갖는 교회를 말하고 회중교회라함은 감독교회를 회피하는 교인들이 사사시대처럼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신앙생활 하는 교회를 말한다. 때문에 코로나팬데믹 상황에서 대형교회들은 지교회 중심의 방역과 예배를 교회가 감독하고 소형교회들은 성도들의 소견대로 방역과 예배를 드림으로 인해 방역거부와 실패가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했고 이를 바라보는 세상은 이래나 저래나 교회가 탐탁지 못한 것이다. 코로나 발생 초기에 동기목사 중에 한 분이 성도들은 절대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열심히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이것이 팬데믹의 현주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교단차원의 선제적방역이다. 총회가 감독교회의 역할을 자처하여 국가가 원하는 이상의 방역 지침을 선제적으로 내려 교회와 교회 주변의 모든 이들을 돕고 위로하고 함께 기도하는 그런 교회들이 되도록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정신을 차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방역의 선수를 잡아야 한다. 우리가 늘 해왔고 잘하는 것들을 정부와 언론에 앞서 시행하고 정부 시책을 잘 따라주고 함께 나아가는 그런 한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더 이상 방역으로 욕먹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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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6
  • [기고] 이단과 역병의 시대 읽기
    소소한 행복을 집이나 캠핑카에서 즐기는 일상,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 마음 훈훈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감동 콘텐츠가 코로나 역병의 시대에서 사랑받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제한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콘텐츠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대리만족과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힘든 역병의 시대, 각자의 자리에서 곳곳에 숨어있는 감사와 기쁨의 코드들을 애써 발견하며 희망의 싹을 틔우고 있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다. 중세 흑사병의 창궐은 중세교회의 무기력함을 노출해주었지만, 동시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피어오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구한말 콜레라의 창궐은 무기력하게 몰락하는 조선사회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희망으로 등장한 기독교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 알렌, 언더우드, 예이비슨과 기독교인들의 헌신적인 콜레라 방역과 퇴치 활동이 조선민족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최근 인상적이고 통찰력 있는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키워드로 보는 포스트 코로나 세상”이라는 장제국 총장(동서대학교)의 <21세기포럼>에서의 주제 강연이었다. 대학 운영의 책임자로서 코로나 세상에서 바라보는 사회와 대학의 미래에 대한 분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장 총장이 제시한 키워드들을 가지고 ‘이단과 역병의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에 적용해보고 싶었다. 첫 번째 키워드는 “거리두기”다. 나와 타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적극 권장되고 있다. ‘밀폐’된 공간, ‘밀집’된 장소, ‘밀접’한 접촉 등 소위 3밀을 피하면, 감염을 대부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이단들도 친밀한 관계 형성을 통해 밀접 접촉을 시도하고, 그들만의 밀폐된 공간으로 유혹해 비성경적 감염에 노출되도록 만든다. 이를 위해 심지어 사전에 개인 정보를 취득한 후, 거짓말까지 동원해 맞춤형 미혹을 진행한다. 이단과 역병의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와 함께 ‘영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자발적 고립”이다. 악수와 포옹은 친밀감의 표현이 아니라, 위협적인 행위가 되었고, 나의 영역 안으로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개인주의와 함께, 국가적 차원의 폐쇄적인 경제적·정치적 이기주의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고, 비상식적인 분열과 편 가르기가 상식으로 둔갑해 자리 잡았다. 이단에 미혹되면 나타나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이단에 의한 생활, 정보, 사고, 감정을 통제 당하면서 고립은 시작되고, 이는 가족과 지인들로부터의 자발적인 고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거나 가출도 불사한다. ‘자발적 고립’은 이단의 통제를 훨씬 더 쉽게 수용하게 만든다. 세 번째는, “냉소와 조롱과 위선과 악성댓글이 만연한 자기중심적 내로남불”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편견이 소신으로 신념화되고, 거짓 정보마저도 진실로 받아드려 진다. 극단적 분열과 선전·선동이 합리화된다. 이단에 미혹될 경우에도, 인지적 왜곡, 오류, 선택이 동반된다. 이단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비성경적인 눈’을 심어준다. 이를 통해 성경을 자의적·임의적 관점으로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만든다. 첫 단추가 잘못 깨워진 옷처럼, 성경을 지속적으로 왜곡하고, 친밀한 주변 관계마저 단절하는 오류가 동반된다. 결국 가족과 교회와 세상을 비판하는데 집착하면서, 자신의 왜곡된 선택을 합리화하는 자기중심적 아웃사이더가 된다. 코로나로 인해 본격적인 “디지털 혁명의 시대”가 열렸다. 교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세련된 이단콘텐츠가 온라인상에서 횡횡하고 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이단들의 포교, 교육, 감시, 통제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디지털 세상은 우리의 삶을 편하고 윤택하게 만들었지만, 한편 국가나 경제 권력에 의해 개인과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는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는 시대"를 만들어졌다. 코로나 역병의 위기와 불안 속에서, 개인의 정보와 신앙의 자유가 합법적으로 통제되고 감시당하는 환경이, 우리가 만나게 될 뉴 노멀의 세상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 기고/강연
    • 기고
    2020-12-09
  • [기고] 정근두 목사님께
    처음에는 이 글이 과연 정근두목사님의 글인지 그 이름을 빙자한 다른 누군가의 글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번 정목사님이 제게 보내신 장문의 카톡을 다시 훑어보니 논조가 거의 같습니다. 답할 건 별로 없지만 소감이라도 적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동네마다 빚 때문에 일어났던 어머니들의 싸움 소리를 기억합니다. 빌려간 돈 돌려달라고 찾아갑니다. 지금 없으니 다음에 드리겠다. 벌써 몇 번째냐? 오늘은 받아가야겠다. 이런 식으로 싸움이 전개됩니다. 그러다 보면 흥분하게 되고, 험한 소리가 오가게 됩니다. 그러면 빚 문제는 어디 가고 당신이 욕하지 않았냐, 내가 언제 욕했냐.. 이런 식의 싸움이 됩니다. 빚만 제때 갚았으면 될 일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욕이 아니라 빚입니다. 정치권에서 그런 방식을 따라 합니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다른 더 시끄러운 문제로 주의를 호도하는 방식 말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빚에서 욕으로 살짝 바꿔 버리는.. 교회도 이런 시대의 흐름을 비껴가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코닷의 천목사의 글, 기독교보의 저의 시론, 총회재판국의 글 어디에도 불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들 극히 조심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불륜프레임을 가지고 다룬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의 그 반응이 자연스럽긴 합니다. 이건 불륜프레임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프레임 없이 그냥 사실로만 보면 이렇게 쓸 수 있겠죠. “50대 유부남이 미혼의 여성과 주차장에서 12회, 자기 아내가 없을 때 여성의 집에서 3회 만났다.” 이걸 놓고 일반인들이 뭐라 볼지는 명약관화할 겁니다. 그런데 이때의 유부남이 목사고 미혼 여성이 그가 데리고 있는 여전도사가 되면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기준을 더 엄격하게 해서 보아야 합니까? 기준을 더 관대하게 해서 보아야 합니까? 그리고 어떤 프레임으로 보아야 합니까? 목회적인 프레임으로? 교육적인 프레임으로? 사역적인 프레임으로? 목사님은 박목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이 사안에 접근하고 있습니다만 열두 번, 세 번이 적은 건가요? 아니면 독신 여성 집에 가서 일대일로 함께 하는 게 아무 것도 아닌 건가요? 여성을 일대일로 만날 때는 방문을 열어놓으라는 말은 저만 아는 건가요? 다른 사람이 선입견을 가진 게 아니라 목사님이 (좋은 의미에서의) 선입견-박목사는 아니다-으로 접근하시는 거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혹시 목사님은 박목사님을 만나서 교제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최근의 설교 1편이라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읽으면서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상이 떠올랐습니다.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비틀거리면서 옵니다. 누가 봐도 음주운전입니다. 경찰관이 그 차를 세웁니다. 창문을 내리니 술 냄새가 확 풍깁니다. 경찰은 음주 측정기를 들이댑니다. 기사는 측정을 거부하면서 술 안 마셨다고 말합니다. 경찰은 불어만 주시라고 말합니다. (경찰은 음주운전이라는 프레임으로 기사를 대하고 있습니다!) 실랑이가 계속되니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내가 툭 끼어들어 한 마디 합니다. 경관님은 우리 목사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아세요? 우리 목사님 설교 들어보셨어요? 이건 그야말로 상상하기 어려운 상상입니다.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거죠. 경찰관이 사모님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이 생겼을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지금의 경우와 백 프로 맞아떨어지는 비유는 아니지만 목사님의 그 질문을 읽으면서 어이가 없어서 그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정목사님의 말씀은 설교를 잘하면 열두 번 세 번 정도는 괜찮다는 말로 들립니다. 사람이 훌륭하면 그런 행동도 괜찮다는 말로 드립니다. 그의 설교나 목회 능력이 그런 행동을 덮을 수 있다고 들립니다. 저는 목사님과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의 설교는 듣지 말라고 해야 옳다고 봅니다. 설교보다는 자숙을 권해야 옳다고 봅니다. 저는 노회나 총회임원회나 총회재판국의 처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왈가왈부할 만큼 아는 것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고요? 시론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열두 번 세 번이면 벌써 사임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재판거리나 됩니까? 서로 피곤한 일 아닌가요? 여기서 삐딱한 소리 한 마디 끼워 넣겠습니다. (이건 목사님께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앞으로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갈 거라는 소문도 들립니다. (이미 갔나요?) 요즘 교회들의 풍토가 그러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아예 세상 법정으로 가면 될 것을 뭐하러 그렇게 힘 빼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절차 논쟁 그만하고 그리로 갖고 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끼리 싸우지 않아도 되고 노회나 총회 경비도 아낄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교회 재판도 3심제로 해야 된다고 말하는데, 이미 우리나라 교회들은 5심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두 번, 세상 세 번이죠. 서글픈 현실입니다. 하여튼 다들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데 재판 받고 나면, 교회 재판이든 세상 재판이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에는 “재판장님께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면서 재판정을 나오더군요. 불리할 경우에는 정치적 판결이니 뭐니 하면서 거의 욕에 가까운 말을 하고요. 재판에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거겠죠. 다시 돌아와서, 앞으로 이 사건은 전례가 될 것입니다. 고신의 총회장을 역임하시고 현직 신학교 총장으로서 여전히 목사를 양성하시는 정목사님은 그 전례 만들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열두 번, 세 번은 일종의 기준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예닐곱 번 만나고 치리 받는 사람은 억울해할 겁니다. 그런 희한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모여서 고신의 역사를 만들 것이고, 그게 다시 한국교회의 역사를 만들겠죠. 그게 자랑스러운 것이 될지 부끄러운 것이 될지는 훗날 알게 되겠죠. 이제 글을 끝내겠습니다. 사안에 대해 말하다가 사람을 비판하는 것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거룩하게 살지도 못하는 주제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글을 쓰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 거룩은 선택이 아니라고 큰소리로 외치긴 하지만 저 자신이 기준에 너무 미달하기에 앞으로도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이런 글은 쓰지 않겠습니다.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전원호 드림
    • 기고/강연
    • 기고
    2020-10-19
  • [기고]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십자군의 길’을 걸을 것인가?
    오늘 ‘생명의 도’(행 7:38, 개역성경)라 불리는 기독교를 믿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인가, 아니면 ‘십자군의 길’(The way of the crusade)인가? 요즘 기독교인들끼리 나누는 대화나 SNS(카카오톡, 페이스 북) 등을 통해 주고받는 글들과 유튜브 영상을 보며 안타까운 때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십자군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시대 때 일어난 ‘십자군 전쟁’(The Crusades)을 보자.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의 “성지(聖地)인 예루살렘을 어찌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들에게 허락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교황의 말로 시작된 이 전쟁은 무려 198년간(A.D. 1095~1291)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부끄럽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치러진 전쟁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당시 로마교회의 권력은 막강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를 눈이 날리는 카노사의 겨울 성문 앞에서 얇은 옷과 맨발 상태로 3일 동안 꼬박 세워 눈물로 용서를 빌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성지를 수복하자는 교황의 말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멋진 명분과 종교심에 불타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지 수복을 향해 나아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당황한 로마교회는 이 전쟁에 참여하여 순교하면 천국이 보장된다는 약속도 하였다. 더 나아가 어린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에서 수만 명의 소년들을 조직한 ‘소년 십자군’(Children's Crusade)까지 조직하여 전쟁에 참여케 했다. 이 전쟁의 참상은 너무 끔찍하여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분명 그들이 주장하는 명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명분을 이루는 방식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길인 ‘십자군의 길’(The way of the crusade)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라고 외치며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 그 열정과 헌신은 분명 귀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인 ‘숫자’와 ‘힘’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사람을 규합하고, 그 힘으로 세상과 싸우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의 길’이다. 우리 주님은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을 선택하셨다. 주님의 선택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는 낮아짐이셨다. 스승으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셨다. 5병 2어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아 로마를 뒤집으려고 할 때 홀로 산으로 가셨다(요 6:15). 유대 종교권력자들과 로마군병들에게 잡히셨을 때 그들이 가진 검과 몽치보다 더욱 강력한 하늘의 12군단의 천사를 동원하지 않으셨다(마 26:53).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십자군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사회학자인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인 스타크는 불신자이다. 그런 그가 로마제국에서 신흥종교와 같았던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300여 년 만에 그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로마를 정복하고, 지금까지 2천 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결국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을 점령한 것은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역병 때문이었다. 1차가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전 제국의 1/3 정도가 천연두로 사망했고, 2차로 251년 알렉산드리아 인구 2/3가 사망할 정도로 엄청난 전염병이 있었다. 로마 사회나 기성 종교가 좌절하고 역병 앞에서 종교인들이 먼저 도망갔을 때, 쌓여있던 시체들이 방치돼 쥐들이 병을 더 옮길 때,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를 다 정리하고 장례를 치렀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의료가 발달한 때가 아니었다. 지금의 코로나 19와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은 이교도를 믿는 로마 사람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크리스천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이때 종교지도자와 돈 많은 제국의 사람들은 전염병이 제국에 돌자 안전지대를 찾아 달아났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도망갈 힘도, 돈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경계의식을 풀지 못했다. 전염병에 걸린 감염자와의 접촉을 극도로 피했다. 이때 초대교회의 교부인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이 외쳤다.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인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풉시다. 원수도 사랑합시다.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것이 오늘 이 땅과 교회 안에 드리워진 수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군의 길’을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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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1
  • 오늘, 고신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코로나-19(COVID-19) 팬데믹 가운데 교단과, 신대원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두 분께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고신대 신학과 75학번, 신대원 93 학번인 진신덕목사입니다.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온 지 23년째입니다. 고신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저의 신앙의 모태인 사랑하는 고신의 현주소를 찾으며,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두 분의 지혜와 경륜을 빌어 저의 질문에 해답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개질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무례하다 외면하지 마시고 저의 어리석음을 속 시원하게 깨우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코로나-19 대유행과 관련한 질문입니다. 1.1 정부 당국이 대유행 조짐이 보여 거리두기 2.5 단계 방역지침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비대면 예배 행정명령을 내렸는데, 2020.8.21 <고신-대신-합신 총회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성명서 발표가 늦은 감이 있습니다. 미리 이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에 대한 교단 입장을 발표했더라면 8.23 주일예배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고신교회들과 행정기관과의 마찰이 예방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부산기독교총연합에는 고신교회들도 가입되어 있는데 정부 방역지침에 반발해 대면예배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는데 교단 방침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부산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같은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고신 총회가 가입한 한국교회총연합은 정부 방침에 반발해 대면예배를 사수하겠다고 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신속히 조정할 것인지요? 1.2 주일예배를 대면예배를 드려야만 주일성수가 되는 것입니까? 비상상황에서 비대면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심각한 교리 위반 행위인 것입니까? 성명서만 발표한다고 개교회와 성도들이 이해하고, 전적으로 동참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신학적 연구와 해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2. 고신교단과 전광훈은 어떤 관계인지요? 2.1 전광훈은 예장 대신에서 제명된 사람이고, 한기총 회장일 때, 이단 변승우를 이단 해제하고, 한기총 공동회장으로 받아들인 이단 옹호자입니다. 이런 자가 주최하는 정치행사와 주일예배, 부흥회 등의 각종 집회에 고신 목사, 장로,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은 개인 신앙의 자유에 속한 일입니까? 전광훈이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단에서 진작에 전광훈에 대한 명확한 이단 규정을 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뉴스에서는 총회 이단대책위에서 이번 총회에 상정할 문건이 보도되고 있지만 아직 총회 홈페이지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고신 이대위는 전광훈을 “이단성 있는 이단 옹호자”로 보고서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미 고신 깊숙이 전광훈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많은 ‘전광훈들’이 자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전광훈 집회에 집단적으로 동참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단 옹호자’라는 규정이 너무 약하고, ‘사후약방문’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3. 고신교단과 대장연(대한민국장로연합회)은 어떤 관계인지요? 대장연은 정치활동을 안한다고 하면서도 정치적 발언과 집회를 계속하고 있는데 고신 장로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에 해당하는 일인지요? 4. 고신교단과 소위 “태극기부대”와는 어떤 관계인지요? “태극기부대”에 일반국민도 있지만 고신 목사 장로들도 상당수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개인의 판단에 따른 정치참여로 교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까? 5.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고신의 입장은 무엇인지요? 지금 국회에는 장혜영 의원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의원들도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예고한 상태입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온갖 반대의견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고신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무엇인지요? 동성애 조장, 동성애 비판 설교시 처벌 등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무조건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신학적으로 법안에 대한 정확한 검토에 근거한 입장을 밝혀주셔야 찬반 논란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6. 고신의 ‘개혁주의적 미디어 리터러시 정책’은 무엇인지요? 한국의 소셜 미디어 환경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온갖 이단들의 선전 동영상은 물론이요, 가짜 뉴스와 선전선동물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많은 성도들도 이런 미디어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가짜뉴스가 교인들 단톡방을 통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개인의 취사선택에 맡겨두기가 힘든 위험한 미디어 환경입니다. 적어도 신앙과 신학에 관계된 미디어에 대한 ‘필터링’과 비판, 바로잡기를 위한 체계적이고 상시적인 기구와 활동이 시급하다고 판단합니다. 총회-신대원-고신대-고신언론사-기독교언론-시민운동단체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성도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돕는 다양한 활동이 요청된다고 생각하는데 교단과 신대원의 입장은 무엇인지요? 7. 총회의 민주적 운영과 소통 강화에 대한 정책은 무엇인지요? 정기총회는 1년에 한번 모이기에 코로나 -19와 같은 돌발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긴급한 사안은 임시총회를 열기도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총회 임원회와 각 부서와 위원회가 가동되지만 전국 교회와 성도들과 소통이 어렵습니다. 총회 홈피에 자유게시판이 있지만 청와대 국민청원과 같은 대화 창구가 활짝 열려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의견을 제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총회 차원에서 응답하는 소통의 광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특히, 총회 총대제도는 목사 장로로만 총대가 구성되고, 그것도 교세와 연차에 따라 선출되어 전체 교회의 의견 수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대 선출에 대한 혁신적인 방안을 마련할 의향이 있으신지요? 예를 들면, 전국여선교회 대표, 주교교사 대표, SFC 대표, 안수집사회 대표 등을 총회 언권회원으로 받아서 발언할 시간을 주고, 정책제안을 하게 하는 방안입니다. 이사회와 총회 부서, 위원회 구성도 여러 문제점들이 누적되어 왔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공개토론과 방안 모색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총회의 각종 회의록과 안건 등 교단 운영에 관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소통하는 방안은 있으신지요? 신대원은 총회에서 연구보고를 주문하는 것만 기다리고, 능동적으로 <교회의 교사> 역할을 할 의향은 없으신지요? 과문한 탓에 신대원이 자발적으로 교단 발전을 위한 세미나, 연구 등을 진행하는 소식을 듣지 못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신앙의 중심을 잡고, 고신의 정체성과 생활의 순결을 지켜 나가도록 총회와 신대원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등불과 지팡이 역할을 잘 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저의 질문에 대해 우문현답을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2020. 9월 미국 일리노이 샴페인에서 진신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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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8
  • 이상규 교수 '광복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
    이 원고는 지난 8월 9일(주일) 부산 세계로교회에서 열린 경남기독교총연합회와 경남성시화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8.15특별성회'에서 강사로 나선 이상규 교수의 특강 내용이다. 광복 75주년을 기념하는 이런 뜻 깊은 자리에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신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박정곤 대표회장님과 경남성시화본부 오승균 대표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차례 기념 예배를 드렸는데, 첫째는 매년 3월 첫 주에 드렸던 3.1절 기념예배였고, 둘째는 8.15일과 가까운 주일에 드렸던 광복기념예배였습니다. 이 전통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경남의 교계지도자들이 이런 한국교회 전통을 계승하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 오늘의 교회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시편 126편에 기대어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난과 수난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와 국가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뒤돌아보는 역사 : post tenebras lux 우리나라는 1910년 8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타율에 의해 해방되었던 1945년까지 35년 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만 일제의 한국침략은 점진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첫 단계가 1876년 일본대표 이노우에(黑田淸隆)와 조선대표 신헌(申櫶)사이에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입니다. 전문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이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된 조약입니다. 이 조약 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고 명시하므로 청(淸)의 세력(宗主權)을 배제하고자 했고, 1882년의 임오군란은 일본세력의 조선 진출에 대한 반일감정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894-5년에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침략의 방해가 되는 청나라 세력을 제거하고, 1904-5년에는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러일강화조약, 곧 포츠머스조약을 채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선점하게 됩니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차례로 강탈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켜 국방력을 마비시키고,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점진적인 침략과정을 거쳐 일제는 1910년 8월29일에는 '합방'(合邦)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행위를 정당성하기 위해 ‘한일합방 韓日合邦’ 혹은 ‘한일합병 韓日合倂’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한일병탄 韓日倂呑’이라고 말합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혹은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조선은 주권을 상실함으로서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시작된 조선 왕조는 27대 순종(純宗, 1872-1926)을 끝으로 518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때로부터 우리나라는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배경을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을 침략합니다. 우리는 ‘지나사변’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동남아전 지역과 태평양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해 나갑니다. 1941년 12월 7일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보통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함으로서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대외 팽창에 따른 제2차 대전이 전개되고 있었으나 미국은 참전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만이 일본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하게 되자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고, 미국의 참전은 전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까지 전선을 확대하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1944년 7월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 이후 전세는 급변하였고, 1944년 11월 사이판에 비행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이오지마(硫黃島, 1945. 2-3)와 오끼나와(沖縄, 1945.6)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버마전선에서도 일본은 거의 전멸 당했고, 중국전선에서도 1945년 봄부터 일본은 패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지역의 경우, 이탈리아가 1943년 6월에 연합국에 항복했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했습니다. 수도 베르린이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자 히틀러의 자살로 독일은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세가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게 되자, 1943년 11월 12일,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 전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이로회담입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의한 것입니다. 이 결의문 작성자는 루즈벨트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였는데, 그는 독실한 감리교신자였습니다. 독일이 항복하고 두 달이 지난 1945년 7월 17일에는 연합국대표는 독일 포츠담에 보여 일본의 무조적적인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연합군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하여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때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 미국은 히로시마(廣島, 1945.8.6.)와 나가사끼(長琦, 8.9)에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하게 됩니다. 원자폭탄 투하로 20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본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迪官裕仁, 1901-1989)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의 동남아국가들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35년간의 질고를 끝내고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어둠 후의 빛’(post tenebras lux)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광복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박정곤 대표회장이 인사말에서 언급처럼 빛을 회복한 것입니다. 2. 광복의 의미 그렇다면 이 해방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3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빨리 해방을 맞게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적같이 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립은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싸워 쟁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3.1운동 때 전인구의 10%인 2백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1,700여회의 집회를 하고 5만여 명이 수감되고, 7천5백명이 죽임을 당하고 1만6천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독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국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 애국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 때문에 독립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가 제국과 제왕을 다스리시고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십니다. 그가 전쟁의 승패를 관장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서울과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120년 간의 통일 왕국시대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스라엘왕국의 존속기간은 509년으로 우리나라 조선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대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당시 제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은 바벨론이 최강국이었으나, 바사라고 불리는 페르샤가 신흥 제국으로 등장합니다. 기원전 549년에는 메데를 정복하여 바사에 통합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레스는 메데와 바사를 연합국으로 만들고 두 나라를 동시에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메데 바사’ 혹은 ‘바사 메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에1:3, 18, 19, 10:2, 단5:28, 6:8, 12, 15, 8:20 등). 이 신생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가 기원전 539년이었습니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바사의 고레스(Cyrus II)왕은 그 이듬해에 칙령을 내렸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조서'(詔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그 내용이 역대하 36장 23절, 에스라1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민족에게 해방을 선언한 것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본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이 때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오늘 읽은 시편 126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 ‘시온의 포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포로된 자들을 시온으로 돌리실 때’(the captives to Zion)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토(故土) 곧 두고 온 고향을 의미합니다.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자유를 얻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해방을 얻는 자유민은 본토로 돌아오는 데, 그 거리가 1,200km였습니다. 1차 귀환 때 약 5만 명이 이 먼 거리를 걸어 귀국하게 됩니다. 이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남의 나라에 지배하에 있다가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셨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과 2절, 3절,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주체이자 주어입니다. 시편 기자는 해방을 주신 이는 여호와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126:2)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여호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생제국인 페르샤의 고레스는 이스라엘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된 백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과거 바벨론이 빼앗아 갔던 모든 기병들 곧 지금의 문화제를 다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해답이 역대하 36장 22절과 에스라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The Lord moved the heart of Cyrus of Persi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해방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즉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대가 없이 얻는 것이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였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 신도, 1900여개처의 교회, 조선인 교역자 2천3백명, 선교사 270명, 3백 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이상의 재학생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식민지배의 성패가 달린 문제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회가 반일운동의 거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교회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의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는데, 한국교회를 탄압하여 그 힘을 축소하고자 했습니다. 한국기독교를 친일 세력으로 물들여 황도주의(皇道主義) 기독교로의 변질시키거나, 일본의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를 통해 조선인들을 충량한 일본국민으로 교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는데, 첫째는 법적 제제를 가하고자 했습니다. 보안법, 범죄즉결령, 조선 태형령과 같은 일반적인 법령 외에도, 한국교회 종교활동을 통제하려는 ‘포교규칙’(1915)을 제령83호로 공포했는데, 포교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교회당 설립의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얻게 하는 등 신교의 자유를 제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사립학교령(1911. 8), 사립학교 규칙(1911.10), 개정사립학교 규칙(1915,3) 등과 같은 법령을 통해 기독교 학교를 옥죄고 종교교육을 제한했고,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각종 집회를 제한하고 설교를 감시했습니다. 성경 중 출애굽기 에스겔 등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등 설교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셋째, 일부 찬송가를 금지시키거나 개사(改詞)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찬송가는 1934년에 편찬된 신편찬송가였는데,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등 만왕, 신앙적 결의, 재림 찬송은 금지곡이었습니다. 특히 만유의 쥬(32장), 면류관 드리세(33), 만왕의 왕(54), 믿음이 세상을 이김(201), 하나님은 피난처(206), 십자가 군병(222), 영원한 문아 열어라(286), 여호와만 섬기세(337), 의의 길(385)를 못 불렀습니다. 자구 수정을 강요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전능왕’(7장)을 ‘쥬시여’로, ‘만유의 대왕’(10)을 ‘우리의 쥬님’으로, ‘만유의 쥬’(38)를 ‘우리의 쥬’로, ‘만유의 주제’(48)를 ‘우리의 쥬님’으로, ‘태평왕’(56)을 ‘우리 쥬’로 변경하여 부르게 했습니다. 넷째는, 기독교회를 줄이기 위해 교회를 통폐합시켰습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325 처 교회가 있었으나 108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수는 217개 처로 축소되었습니다. 경남노회 지역의 교회 3분지 1을 폐쇄시킨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한 것입니다. 가장 큰 박해는 우상숭배의 강요였습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강요는 193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10년간이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습니다. 신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 한 것입니다. 이 일로 200여개 처교회가 폐쇄되고, 2천명이 투옥되고, 50여명이 순교했습니다. 이때 순교하신 대표적인 경남의 인물이 최상림, 주기철, 이현속 장로 같은 분들입니다. 이처럼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은밀하게 하나님께 손을 펼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이 패망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권력은 길어야 십년입니다. 권불십년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투옥되어 있었으나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은 사악한 일제 권력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해방은 정치적 자유일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마지막까지 감옥에 있던 26명의 종들(평양감옥 20명, 대구 3명, 부산 2명, 청주 1명)이 8월 17일 감옥문을 열고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안 일입니다만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기독교신자를 비롯한 민족지도자 5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비밀지령을 하달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인데, 학살 예정일이 8월 18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모가 결행되기 3일 전에 해방이 왔고, 처형대상자들이 처형되기 전날 밤에 석방된 것입니다. 해방이 하루만 늦었더라면 이들은 다 처형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1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일제의 학살음모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수사건이 된 것입니다. 거짓 불의 위선 음모와 같은 인간의 모사(謀事)는 한줌 모래 위에 쌓는 누각일 뿐입니다. 해방은 정치적인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얻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해방기념 주일을 지키고 자유를 주신 하나남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으로 기도할 때 늘 드렸던 기도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옵소서.”(갈5:1)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하소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그는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 하와이 요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셋째, 해방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주신 기회였습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체제의 나라를 건설하느냐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해방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변화의 길목이었습니다.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게 된 것은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6일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참전하였습니다. 일본과 홀로 싸우며 큰 희생을 치루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 대(對) 일본전에 참전을 요구했고 소련은 계속 미루다가 종전 6일 전에 참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이 곧 항복하자 소련은 별 희생 없이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한국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참전 선언 후 소련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하는데, 8월 12일에는 함흥 청진 원산을 점령하였고,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해 38도 이남인 개성까지 진출했습니다. 이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인민위원회 중심의 공산주의 독제정권이 북한에 자리 잡게 됩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소련군에 의해 실질적인 분단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미군은 소련군 보다 한 달 늦은 9월 6일에야 인천으로 상륙합니다.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미군정(美軍政,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 실시되는데, 당시 남한은 혼란했습니다. 그 혼란을 해방정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 정치 결사체가 난립했습니다.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김성수 송진우 중심의 한국민주당 등이 조직되었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 좌익세력은 이승만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를 허위로 끌어들이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발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안은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 안이 발표되자 민족 세력 중심에 있던 이승만, 김구, 좌익 계열인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등도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미소합의에 의한 한국문제해결이라는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책은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좌익은 찬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및 좌파계열과 이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데, 전자는 허울 좋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후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남한에서 반탁운동이 거세지자 결국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완전 결렬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주도하는 독자적 정부 설립을 촉진 시켰고,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국적인 반탁운동은 남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고 독자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남한에서 좌익들의 반발과 폭동이 이어졌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박헌영 계열의 좌익들은 반미운동을 선동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는 나라를 만듦으로써 공산화된 북한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한의 독자적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독립정부를 우선 남한만이라도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까지 참여하는 정부를 추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제기되었는데, 전자를 주장한 이가 이승만이었고, 후자를 지지한 인물이 김구와 김규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소련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총선거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입장이었고,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통해 문제해결을 주장하고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4월 19일 북으로 올라갔으나 본격적인 회담도 못한채 이용만 당하고 빈손을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김구, 김규식은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유엔은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을 통해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모두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한 정부 구성을 결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5월 9일 선거를 하려 했습니다만 일식(日蝕)예보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을 배려하여 하루 늦춘 5월 10일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의도로 일부러 주일 선거를 실시했지만(1946.11.3)남한에서는 주일을 피하게 한 것입니다. 이 선거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보통, 평등, 비밀원칙에 입각한 민주적 방식의 선거였고,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준 것은 스위스(1971)보다 앞섭니다. 이 선거에서 총 200석 중 4.3폭동이 발생했던 제주도 2석을 제외한 198명의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5월 31일에는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첫 국회, 곧 제헌국회를 개원하게 됩니다. 이때가 오전10시였습니다. 이 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이윤영 의원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윤영 의원은 감리교 목사였는데, 서울의 종로구 갑 지역구 의원이었습니다.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하자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은 기도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신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 이 기도를 드릴 때 모든 제헌국회의원들이 다 일어섰습니다. 대한민국 공문서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에 바로 이 기도문이 기제 되어 있습니다. 국회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헌법기초위원이 제정한 전문 및 본문 103조의 대한민국 헌법이 7월 12일 국회 의결을 거쳐 7월 17일 공포되었습니다. 제헌 헌법은 개인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실히 한 것입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0일 회집한 국회 제32차 본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7월 24일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했습니다. 8월 15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독립(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기념사에서 그날의 행사가 우리 민족의 광복과 건국을 동시에 축하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선언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여,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찬성 48, 반대 6표, 기권1 이라는 절대 다수로 대한민국을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였습니다(결의안, 제195-III호). 이어 미국을 시작으로(1949.1.1.) 개별적인 승인이 뒤따라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승인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때 참전이 통과되었고,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70%에 가까운 63개국이 한국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단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원래 계획은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고, 서울의 미군은 평양의 소련군에게 물자의 자유로운 교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이를 거부하고 38선을 차단합니다. 북한을 동유럽의 나라들처럼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자 전문에서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소련식 공산정부를 세우기보다는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우게 지시했습니다. 기만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협조하지 않자 1946년 2월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광복된 지 6개월 만에 정부를 세워 놓고는 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기위해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선포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남한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나니 북한은 9월 9일 이미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노선을 취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공헌이며, 이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조사한 여론 조사,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찬성했습니다. 곧 77%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찬성했고, 자본주의를 선택한 이는 1,189명으로 14%에 불과했습니다. 좌익이 유리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反共)노선을 고수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승만(1875-1965)의 큰 업적은 그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제로 확립한 일입니다.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3년만인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귀국했는데, 11월 28일(수요일) 김규식 김구와 미군 아놀드 대령과 같이 정동감리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는 황치헌 목사였습니다. 이 때 그는 성경책을 선물로 받고 인사말을 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성경말씀의 토대위에 굳건히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으로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그는 기독교 건국론의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만, 해방된 조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울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맺는말: 우리의 과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광복을 맞게 되었고, 오늘 75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차 대전 후 탄생했거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85개국인데,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화와 산업회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해방당시는 유엔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아 살던 최빈국이었고, 휴전 당시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나 70여년이 지난 2017년 3만 달러가 넘어 OECD회원국 가운데 22번째로,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 중에는 7번째로 3만 달러를 달성해 3050클럽(인구 5천만 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에 진입한 일곱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자유와 인권을 탈취당한 채 독제정권하에서 신음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살게 되었고, 짧은 시기에 민주화와 산업화 두 가지를 다 성취했으나, 북한은 공산체제하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마크 크라머 라는 사람이 쓴 ‘공산주의의 검은 역사 The Black Book of Communism’라는 책을 보니 공산주의 혹은 공산국가에서 죽임을 당한인구가 무려 9천 4백만 명, 곧 1억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만 기근, 문화혁명, 대장정 기간에 6천5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소련에서 2천만 명, 캄보디아에서 2백만 명이, 북한에서 3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공산주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3대 세습국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유로, 혹은 성경을 소지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투옥된 자가 5-7만 명에 달합니다. 월드워치리스트(WWL: World Watch List)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19년 째 세계 최악 기독교 박해국 제1위라고 합니다. 정치법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12만 명에 달합니다. 북한에서 살 수 없다며 생명 걸고 탈북한 이가 3만5천명에 달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공산주의 북한의 실상입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백주에 공산주의가 좋다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다니고, 김정은 정권을 칭송하는 백두칭송위원회라는 괴이한 조직이 설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장관에 임명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 혼란합니다. 해방정국과 비슷합니다. 1947년 해방을 기념하는 주일, 손양원 목사가 부산 제일영도교회에 와서 설교하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무지했던 이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좋습니까, 민주주의가 좋습니까?” 그때만 해도 이런 이데올로기에 무지했고 분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 주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경주의입니다. 여러분,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손양원 목사를 순교자로만 아는데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좌익이 될 수 없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을 받았고, 결국 전쟁이 발발한 3개월 후인 1950년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에 잡혀 끌려 다니다가 28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북한은 일제하 35년, 공산정권 하에서 75년 꼭 100년이 넘는 세월을 고난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북한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6명의 한국인이 억류되어 있습니다. 김정욱(2013.10), 김국기(2014.10), 최춘길(2014.12), 고현철(2016.7), 김원호(2016.7), 함진우(2016.7) 선교사입니다. 북한 주민 탈북자를 도와주거나 성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잡혔고,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등은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노동교화형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은 부서지는 육신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억류된 자국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북한이 오만방자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죽은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유해를 발굴하고 정중히 모시고 예우를 다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구출하지 않습니까?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이들의 구출과 해방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둔가 진정한 해방과 광복을 누리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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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8
  • [기고] 국가권력은 예배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1. 문제점 제기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7월 8일, 교회의 정규예배 이외의 모임과 행사, 식사제공 등을 금지하고, 출입 명부 관리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7월 10일 오후 6시부터는 교회 수련회, 구역예배, 기도회, 성가연습, 성경공부 등 각종 대면 소모임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심지어는 정규예배에서 찬송가는 작게 해야 하고, 통성기도는 금지해야 하는 등 소소한 세칙까지 규정하고 이를 위반할 시 300만 원 이하의 벌금과 교회 운영을 일시 중단시킬 수 있다고 위협했다. 심지어 경기도 구리시는 7월 13일 방역수칙을 준수하지 않는 종교시설에 대하여 신고할 경우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지했다고 한다. 수도권에 이어 광주, 전남 지역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게 되자 이를 예방하려는 조치로 볼 수 있지만 기독교회의 예배나 집회에 대한 제한 조치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교계 지도자들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교회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를 제한하고 이를 규제하려는 것은 종교의 자유 혹은 신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기독교회는 그동안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협조하고 방역 수칙을 준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마치 코로나감염병의 진원지인 것처럼 간주하고 교회 집회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독교회 집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게 한다는 점이다. 셋째, 불교나 천주교 등 타 종교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고 유독 기독교회에만 이런 제한 조치를 강제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편파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감염자의 교회 출입으로 문제를 야기한 경우는 전체 6만여 교회 중 30여개 처 교회로 0.053%, 교회 관련 확진자는 전체 성도수의 0.0057%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는 매우 부당하고 형평성을 잃은 조치이며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은 이런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 집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제한 혹은 금지 조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역사에 기대어 지적해 두고자 한다. 2. 국가권력의 예배의 자유 제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기독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worshiping community)라고 불리는데 예배는 교회의 생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예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고투해 왔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일로부터 출발했다. 예배의 자유는 곧 신앙의 자유였고, 예배 금지는 바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기원 64년 6월 로마의 화제 사건을 계기로 로마제국이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최초의 조치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금지였다. 기독교인들의 공개적인 집회를 불법화한 것이다. 그 다음 조치가 교회 지도자들의 색출이었다. 근거 없는 소문을 빌미로 기독교를 해로운 미신으로 간주했던 로마 사회는 기독교를 혐오집단으로 규정했다.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단하다는 이유였다(행16:21). 다시 말하면 로마인들이 받아드릴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습(unlawful custom)을 전한다는 이유였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풍속으로 볼 때는 도널드 크리빌의 말처럼 ‘전도(顚倒)된 가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암적 존재로 규정되었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로 규정되어 공식적인 집회를 금지한 것이다. 그래서 비밀집회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공개된 장소에서 회집할 수 없었기에 은밀하게 가정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정교회’(domus ecclesiae)로 출발했다. 공개적으로 모일 수 없었고, 이방인이나 불신자들은 참석할 수 없는 기독신자들만의 모임이었기에 이런 비밀 집회를 ‘잠근동산’(enclosed garden)이라고 불렀다. 아가서 4장 12절에서 빌려온 이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이었다. 그가 신자들 간의 비밀 집회를 ‘잠근 동산’(hortus conclusus)라고 불렀던 것은 이교도나 불신자 등 외부인들에게는 닫혀진 비밀 집회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공개적인 집회를 할 수 없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모였지만 로마제국은 이 마저도 통제하고자 했다.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트라이얀(Traijan, 98-117) 황제조차도 어디서든 어떤 형식이나 조직이든 15인 이상 모이는 집회를 금지시켰을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집회의 제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러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그 첫 번째 조치는 집회의 자유였다.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 시장에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조치가 바로 기독교에 대한 공인(公認)이었다. 공개적인 집회가 가능했고, 몰수 되었던 재산은 되돌려 주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의 자유는 곧 집회의 자유라고 할 수 있고, 집회 자유에 대한 통제는 기독교 탄압의 첫 번째 단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구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국가에서도 동일했다. 중국은 최근 기독교 예배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집회소에 대한 자기 표현인 십자가를 철거하고 집회소를 통폐합하고 축소시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4개월간 안후이성 루안시, 마안샨시, 화베이시, 푸양시 등에서만 250여 교회를 파괴하거나 십자가를 강제로 철거했다. 집회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기간 루안시에서는 183개 이상의 교회 십자가가 철거되었다. 이런 집회 방해와 함께 18세 미만 청소년들의 예배 참석을 금지시켰다. 기독교 박해 국가 23위(오픈 도어즈의 발표)인 중국에서의 집회방해 혹은 집회 제한 조치는 기독교 박해의 첫 번째 단계에 속한다. 해방 이전까지 북한은 기독교가 융성했던 지역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2천여 개 처의 교회, 3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정권의 수립과 함께 기독교는 서서히 멸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취한 첫 번째 조치가 집회 방해였다. 예배를 드릴 수 없게 한 것이다. 처음에는 집회를 제한하고 축소하고 감시했다. 두 번째 단계는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하고 투옥시키거나 살해했다. 세 번 째 단계는 신학교를 축소, 통폐합하고 후에는 그 마져도 폐쇄했다. 교회당은 몰수 되거나 전용되었다. 집회소가 사라지고 공개적인 예배는 불가능했다. 물론 이와 병행하여 어용기독교 조직을 이용하였다. 북한에서 기독교 탄압의 결정적인 사례가 1946년 11월 3일 주일날 시행된 선거였다. 기독교를 탄압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11월 3일 주일날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예배를 방해할 목적이었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결의했으나 집회는 통제되었고, 이를 미끼로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교회는 서서히 북한 땅에서 사라져 갔다. 집회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기독교 박해의 첫 번 째 단계에 속한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도 기독교회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할 당시 일제는 한국의 기독교회는 1900여개 처의 집회소, 20만 성도, 300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이 넘은 재학생, 외국인 선교사 270명, 조선인 교역자 2천3백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보다 더 높게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기독교는 선교사들을 통해 외국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기독교 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가 식민지배의 중요한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의 정책은 일면 탄압, 일면의 양면적인 것이었다. 탄압의 첫 번째 단계는 집회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집회를 감독하고 설교를 정탐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동향을 사찰하고, 목회자들의 거주 이전을 신고하게 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조선 총독부에 제출했던 주기철 목사의 거출계(居出屆)가 남아 있다. 물론 기독교회에 대한 법적 규제를 병행했다. 후에는 기독교 집회소를 축소하기 위한 교회 통폐합을 실시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325교회 처가 있었으나 108 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수는 217개 처로 축소되었다. 경남노회 지역의 3분지 1의 교회를 폐쇄시킨 것이다. 집회에 대한 제한이나 예배 방해는 기독교 탄압의 시작이었다. 정리하면서 이상에서 집회 제한 혹은 금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역사에 기대어 제시하였다. 이번의 정규 예배 이외의 집회에 대한 제한 혹은 금지 조치는 코로나 현실에서 불가피한 잠정적인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한 조치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훼손일 수 있고, 자칫 기독교에 대한 통제 혹은 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비의도적인 잠정적인 요구라할찌라도 후일의 전례가 될 수 있고, 특별한 상황에서는 비의도성으로 포장된 의도적인 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고 불리는 국제적인 위기 현실에서 기독교회가 앞장서서 방역 수칙을 지키고, 코로나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협조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밀집 회합 조직 중 기독교회에 대해서만 집회를 통제하거나 금지하는 행정 명령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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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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