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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교단 제3의 계파가 형성됐다고?
    K교단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총회임원, 유지이사, 법인이사, 감사후보 선거 공고를 교단지 6월 13일자에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7월 7일 오후 2시 각 노회가 임시노회를 열어 본격적으로 후보자 추천결의에 할 예정이다. 하지만 모 인터넷 신문에서 사설로 쓴 K교단 계파의식이 희석되고 신대원 기수와 서열 중심으로 단일 후보 전망을 게재했다. 그리고 계파가 많이 희미해진 것은 교단 인사들이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렇다고 오랜 세월동안 내려온 계파의식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증경총회장 L목사는 기자에게 “모든 조직체에는 계파가 있기 마련이다”고 말했다. 이번 법무부장관 내정자가 현 검찰총장보다 2년 후배를 봐도 서열과 기수는 정치계나 교단에도 파괴될 수 있고 그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또한 유일하게 보수 개혁파에서 부산 B목사를 이번 부총회장 후보로 러브콜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단 내 새로운 제3의 계파가 생겨난 것이 인터넷 모 언론이라고 교단 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고 어느 중진 목사가 본보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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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6-25
  • K장로 사과함으로 취하
    부산 사하경찰서에 정식 고소한 바 있는 A교단 K장로가 직접 본사를 내방해 잘못을 시인, 사과함으로 고소인이 지난 5월 20일 조건 없이 취하하고 서로 화해했다. 부산사하서(제2015-02344호) 사건 처리 결과통보는 피해자가 피의자에 대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명시적인 표현을 했으므로 불기소(공소권 없음)의견으로 부산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고 통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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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06-25
  • 故 송상석 목사, 그는 친일파의 고등계 형사였는가?
    고려파(고신)의 두 물줄기가 있다면 故 한상동 목사와 故 송상석 목사일 것이다. 이들이 고려파 초창기 교단형성의 초석을 다졌다는 것을 교회 역사가들이 말해주고 있다. 지난 6월 22일 오전, 고신 경남노회 100년사를 집필하기 위해 허창수 목사(창원동성교회), 양재한 장로(창원 한빛교회), 강종환 장로(가음정교회)가 본사를 내방했다. 강종환 장로는 “<경남노회 100년사>는 고신교단의 역사이자 교단 역사의 전초기지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필자를 찾아온 것은 고신 경남(법통)노회에서 활동했던 故 송상석 목사(제일문창교회)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故 송상석 목사는 과연 고등계 형사였나? 故 송상석 목사는 1967년부터 1975년까지 고려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의 사위 故 한남석 장로(부산영락교회)가 소유했던 애린유스호스텔(부산 중구 보수동)과 부산남교회 인근 부흥여관(부산 중구 동광동)에 머물면서 이기진 목사(진영교회), 현기택 장로(제일신마산교회), 김해룡 장로(진해시장 역임), 故 박윤섭 장로(교단 장로부총회장 역임) 등 그의 일급참모들과 함께 의논하며 어울렸던 현장을 목격한 바 있다. 최근 인터넷신문 코람데오닷컴에 K장로가 기술한 글에서 역사의 진실을 알리려고 애를 쓴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떠난 故 송상석 목사를 친일파, 고등계형사, 독립 운동가를 투옥시킨 인물로 표현한 것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다. 송상석 목사는 1938년 신사참배 반대자를 도운 혐의로 이약신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루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나왔다. 그의 좋은 점은 뒤로하고 나쁜 과거 행적을 나열하면서 매도하는 것은 역사의 객관성과 공정성에서 약간 벗어난 사관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1979년 9월 총회 직전, 총회 전망기사를 위해 송상석 목사가 살아생전 자주 갔었던 애린유스호스텔에서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필자는 의심과 의혹의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기자 근성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송 목사님, 어른에 대한 실례를 무릅쓰고 어렵게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라고 운을 떼자 송 목사는 한번 들어볼 테니 말을 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딱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과거 고등계 형사로 계셨습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아, 그거. 교회를 다니지 않던 소싯적에 잠시 일본계 형사 시험에 합격해 활동한 적 있었지. 내 적성에 맞지 않았고, 민족 양심에 가책을 받아 사표를 쓰게 됐다네. 경남 통영 욕지도에서 사립 원량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이곳 교회 강임영 영수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지”라면서 “그런데 말일세, 스데반을 죽이고 그리스도인을 괴롭게 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사도 바울을 기억하는가? 그때 형사 신분증을 반납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네. 1946년 만주에서 신학자 박형룡 박사를 모시고 오라는 사명을 맡아 바다로, 산으로 무수한 역경을 겪을 때 그 신분증이 필요했다네. 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 준비하셨던 것 아닌가 싶네. 일본군 검문소를 수없이 통과할 때마다 그 형사신분증으로 죄인(박형룡)을 압송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위기를 모면했었네. 그때는 ‘친일인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일본의 속국에서 살아남아 큰일을 하기 위한 일시적 방편이었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절대 기사화하지 말게”라고 오프더레코드를 조건으로 말했다. 통합 측 유호준 증경총회장을 비롯해 부산에 김길창 목사(항서교회), 소설가 이광수 등 친일인사 명부에 올려져있는 교계인사들이 수없이 많았다. 송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제 당시 그들의 마음 한켠에 조국 독립을 위한 염원을 붙들고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또 강압에 못 이겨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故 송상석 목사가 남긴 업적은? 송상석 목사는 서울에서 종로 중앙교회 김창준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김창준 목사의 후원으로 금연, 금주 등 절제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34년 제29회에 졸업했다. 1934년 5월에는 조만식 장로가 회장으로 조직된 ‘조선 기독교 절제 운동회’에 총무를 맡았다. 그 후 평양문 밖 대타령교회 청빙을 받아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무렵 경남 진해에서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 등이 주도한 신학 강좌가 개최됨을 알고 거기에 합류하면서 고신교단에 발을 딛게 됐다. 그는 송도 고려신학교 땅을 합동 측과 환원하면서 갈라설 때 배경업 장로(칼빈신학교 서무과장)가 밤새 줄자로 재어 도면을 그리고 법원에 고신교단 것으로 등기하고 또 구포 땅 70만여 평 기독교협력회 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김진경 교수(연변과기대 총장), 김상원 장로로 이어오면서 김상원 장로 개인에게 고스란히 뺏겼던 비하인드도 있다. 오늘날 성도고등학교 자리다. 여러 교단 부동산을 바로 찾아 세우려고 노력한 사람이 송상석 목사지만 그의 업적은 온데간데없이 나쁜 역사의 흔적만 들춰지고 있다. 마산문창교회의 지루한 소송 30년 법정분쟁자로, 1967년 7월 고려학원 재단 공문서위조 책임의 불명예 이사장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역사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공정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도 기자들의 역할 아니겠는가?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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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 (1)
    이제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 내가 한국인이란 것이 자랑스러워 1960년대 한국(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절반 수준이었다. 120개 독립국가 중 북한은 40위인데 한국은 10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하는 최빈국가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한국보다 더 잘 살았다. 그러다가 1976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2배로, 3배로, 4배로, 10배로, 20배로, 근 30배로,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소득의 격차가 생겼다. 눈여겨볼 것은 북한은 1970년대나 지금이나 국민소득이 거의 같다는 점이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난 후 새로 탄생했거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나라가 85개국인데 이 85개국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는 유일하게 한국뿐이다. 이건 놀라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경제대국이라는 일본이 한때 “한국의 삼성, LG, 포스코, 현대가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온다”고 경계하더니 지금은 자기들이 뒤지니까 “한국의 이 회사들을 어떻게해서든 따라잡자. 더 밀리면 안된다” 이렇게 구호가 바뀌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한국을 연구하는 박사급 인사 3,000명이 한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자기들은 대국이고 한국은 별볼일 없는 변방 소국으로 생각해 왔다. 그렇게 보던 한국을 이젠 기를 쓰고 배우려고 한다니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한국은 이젠 더이상 후진국이 아니고 개도국도 아니다. 이미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오랫동안 외국의 원조를 받아 겨우 연명해 오던 우리나라가 이젠 빈곤한 나라를 지원하는 DAC 국가로 변모하였다. 한국의 국력과 순위를 보면 국토의 크기는 미국의 한 주에 비할 정도로 작은 나라이지만 GDP(국내총생산규모)는 세계 10위 규모의 경제대국이다. 조선산업은 세계 1위, 철강과 자동차산업은 세계 5위, 반도체 생산은 세계 1위, 인터넷 기술도 세계 1위, 휴대폰 기술도 세계 1위, 교육열도 세계 1위이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순 없고, 종합국력이 세계 9위이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 한국을 “미꾸라지 용된 나라”라고 했다. 전날에 우리나라는 농업국이면서도 식량도 자급자족이 안 되는 나라였고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였는데 이젠 어느 사이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이건 전날 상상도, 예측도 못했던 일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한국인이란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 한국이 어떻게 이토록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는가.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다.(신명기 8:11~18)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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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06-25
  • [시내산] 왜 정치에 박수치지 않는가
    최근 총리후보자를 거명할 때 거의 사양한다는 말이 뉴스에 나왔다. 이는 현실정치의 주소이며, 정치에 박수를 칠 수 없다는 참담함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치, 플라톤의 이상국가론부터 현대정치까지 그 이론의 핵심은 최대 다수의 백성들에게 최대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숨은 백성들까지 굴 밖으로 나오게 하라는 따뜻한 말이다. 이는 군주제이든, 공화제이든,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모든 형태의 국가는 이를 실현하려는 것이 정치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현실은 어떠한가? 비판하고 소외되어 도피하였던 백성들이 돌아와 행복을 구가하는가? 혹, 동굴 속으로 몰아넣는 꼴은 아닌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민초들은, 흔히 유전과 무전의 차별과 배경의 유무에서 오는 한쪽의 상실감이란 문제이다. 또 자신의 역할을 찾아도 기회를 얻지 못해 실망감에 눌려 주저앉아 한숨 쉬게 되었고 하늘 꼭대기 까지 올라간 땅값과 전월세 값과 감당하기 어려운 사교육비에 놀랐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연일 보도되는 뉴스, 기대했던 정치인들이 주는 실망감, 외치는 개혁이라는 구호 그 자체가 개혁인가?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흠집 내기 품위와 장기근속도 아닌데 스스로 연금수혜자가 되게 한 이기적인 의정활동이 주는 비애로 인하여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접고 어디론가 깊숙이 숨어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민생문제 외치지만 여전히 불량 식재료와 유해물질로 음식을 만들어 팔고, 돈벌이를 위해 가짜 물품을 제조하는가하면 가격을 담합하는 이해 할 수없는 경제 난맥상과 사스에 이어 찾아온 메르스 등, 각종 전염병 바이러스에 답이 없으니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도력이 필요한 곳, 정치는 물론 경제는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모인 곳, 사회단체, 학교, 교회에도 예외는 아니다. 모두 지도자들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백성들의 소리가 정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 다양한 소리들을 합창의 지휘자처럼 아름다운 화음으로 창출하여야 한다. 만약, 그 소리들을 화음으로 만들어 낼 자질이 없거나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지도자의 길을 포기하거나 그만 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참신하고 진취적이고 개혁적이라 말해도 그에 부합하는 지식과 경륜이 없다면 헛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보았는가? 정치는 무대에 올려 진 연극과 같아서 영화와 달리 N. G(no good)할 수 없다. 대사를 잊어도 연기가 서툴러도 다시하고 되돌릴 수 없이 그대로 끝내야 하는 일이기에 밤을 새워서라도 연구하고 준비하여 무대에 올라야 되는 것이다. 머리에 전문가적 지식을 채워 높은 수준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부합하는 성명도 발표하고 정성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용감한 사람들” 이라는 책으로 프리처상을 받은 미국 대통령이었던 J. F. 케네디가 상원의원시절, 세인트로렌스 강으로부터 중부 시카고지역까지 수로를 개설하는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한 후 찬성연설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정책은 자신의 선거구인 보스턴 항구의 이익에 크게 반하는 것이라 참모진들은 지역민들의 반대를 우려하며 말렸다. 그러나 수로가 완성되면 배들은 멀리 돌지 않고 곧장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어 국가의 이익을 창출하는 미래가치가 더 크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는 “물거품 같은 인기를 경멸한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었고 소신과 지식과 이상의 승리이었다. 가끔 압도할 만큼의 지식도 경륜도 없는 사람들이 재력과 배경과 또 운동권이니 누구의 아들이니 하는 이력만 들고 정치권에 앉아 세계화를 논하고, 통일과 민생을 논하지만 결국 답이 부족하다. 또한 자신과 지역과 정당과 계파의 이익이라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정치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 백성들이 정치를 신뢰하고 박수치지 않는가?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듯 도망가게 하지 말라. 그것은 정치가 아니다. 교회도 그렇다. 교인들이 도피처에서 밖으로 나오게 하고, 모이게 하여 함께 고민하고 즐거워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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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탁지일 교수] 신천지 건축 블랙코미디
    도무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신천지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144,000명이 완성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천지 신도들이 육체영생을 이루고, 세상을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날이 곧 온다는 얘기다. 실제로 신도수가 거의 144,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신천지는 요즘 왜 그렇게 건물 건축(매입)에 집착하는 것일까? 144,000의 날이 못 미더운 것인가? 아니면 그날이 와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일까? 144,000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자신들 소유가 될 터인데, 왜 이렇게 건물 건축(매입)에 힘을 쏟는 것일까? 의심할 여지없이, 144,000은 종교사기인 것이 분명하다. 요즘 신천지는, 144,000은 단순 신도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들”의 숫자라고 말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이 황당한 주관적인 판단 기준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신천지 교리는 지속적으로 변개되고, 144,000의 그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신도들은 144,000의 날을 위해, 가족의 품을 떠나, 끊임없이 거리로 내몰려, 피곤하고 지친 삶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물론 이만희씨와 후계자 김남희씨는 가평의 호화 별장에서 오늘도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들을 보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블랙코미디가 유행이라고 한다. 신천지의 최근 모습은 단연 종교적 블랙코미디의 초절정을 보여준다. 교리의 변개와 함께, 신천지의 또 다른 애처로운 모습은 부동산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곳곳에 집회소 마련을 명분으로 부동산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부산에서도 거액을 들여 연제구에 안드레지파 본부 건물 마련에 혈안이 되어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허구적인 144,000 교리의 실패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다. 신천지가 몰락해도 재산(돈)은 남기를 바라는 탐욕 때문일 것이다. 둘째, 나름 정상적인(?) 사회적 노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팽배한 한국사회에, 자신들이 (간판도 붙이지 않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평범한 종교단체인 것을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144,000의 날까지 비밀조직(모략)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신도들의 효과적인 통제가 목적이다. 계속되는 모략포교로 인해 신천지 신도들은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또한 거짓말 스트레스로 인한 낮은 자존감과 불안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제 지친 신천지 신도들을 다독거릴 번듯한 건물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신천지는 144,000의 ‘단기전’이 아니라, 나름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전’을 준비하는 양상이다. 그렇기에 최근 그토록 부동산을 탐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영생과 144,000을 주장하는 신천지의 블랙코미디가 애처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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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목회자 칼럼] 모스크바 방문기
    주후 2015년 5월 18일, 유럽 고신 총회의 초청을 받아 장로 부총회장과 함께 난생 처음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었다. 소련, 모스크바, 크레믈린, KGB ... 이러한 단어들이 익숙하게 먼저 떠올려지는 땅이었으며, 비록 지금은 ‘러시아’ 라는 이름으로 바뀌긴 했지만 우리들에겐 여전히 무겁고 어두운 인상으로 다가오는 나라임은 어찌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막상 발을 직접 디디며 보고 배운 느낌은 먼저 모스크바까지의 거리가 5천 킬로 정도 밖에 안되는 비행거리와, 10시간 남짓하는 비행시간은 의외로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때,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던 공산주의의 종주국(宗主國)의 심장부인 모스크바로, 색상도 선명한 대한항공을 타고 찾아가게 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풍광은 몽고의 고비사막인 듯한 상공을 지나치니 어느덧 러시아 대평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계속되는 평지, 습지, 호수들을 내려다보면서, 우리 조상들은 작은 땅,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어떻게 러시아 사람들은 저 광활한 대륙을 다 차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과 부러움을 함께 가지게 된다. 모스크바 공항에는 장로님이 마중 나와 주셨다. 구 소련말에 용감하게 입성하여 정착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대한 독립군을 대하는 것 같이 엄숙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러시아 선교사인 황상호 목사님과 함께 모스크바 장로교회의 설립 멤버로서 얼마나 긴장하고 수고를 많이 했을까하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과 가정위에 크게 칭찬과 축복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제29회 유럽고신총회 개회예배에서는 마 16:15-19의 말씀으로 (교회, 이 땅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설교하였다. 교회는 1. 주님이 친히 세우셨으므로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다. 2. 주님께서는 마귀의 세력(음부, 죄, 사망, 지옥)을 제압하는 권세를 우리 교회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다. 3. 주님께서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를 교회에 맡기셨다. (마 16:19, 28:18-20, 롬 1:16, 10:8-17) 교회는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땅의 희망이다. 고국을 떠나 낯선 유럽땅에서 선교사로, 목회자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용기와 확신과 꿈을 나누어주고 싶은 열망으로 복음을 증거하였다. 모스크바 장로 교회에서의 주일 예배는 ‘행복’ 그 자체였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보면서 러시아는 더 이상 공산주의 소련이 아니고, 서구 유럽풍의 문명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문명의 기초와 정신은 단연코 우리 기독교 정신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치적인 자유만 한 단계 더 성숙되면 우리들 자유 세계와 더불어 밝고 건강한 인류문명의 발전대열에 능히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상을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는 것 하나를 여행중 발견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인민의 복지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모스크바의 대표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정교회 건물을 수영장으로 개조해 버렸다. 그러나 60여년 만에 민주주의 회복의 선구자격인 전 대통령 옐친에 의해 교회당으로 원상복구를 시작하였으며, 공사 20년만에 본래의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건물을 보면서 러시아의 ‘회복과 희망’을 확신하고 싶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한 때 기독교가 왕성함으로써 찬란한 기독교의 부흥을 꽃 피웠던 이 땅, 러시아에 70년 만에 밝은 태양, 의로운 해를 비춰주고 계시므로, 러시아 교회가 전열을 재 정비하여 세계 선교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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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교회법률상식] 시무정년 만료 후에 연장 시무는 할 수 없어
    [질의] 1. 예를 들어 8월15일이 생일인 장로가 2015년 8월 15일이면 만70세가 되고 장로 시무기간이 19년 10개월이 되어 20년 시무에는 2개월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원로장로 추대를 위하여 2015년 연말까지 연장시무를 하여 20년 이상 시무하게 한 후 원로장로로 추대할 수 있는지요? 2. 노회가 총회 총대를 투표하여 선택하였으나 노회를 폐회한 후 장로 총대 1인이 사퇴를 하였고 장로 부총대 2인도 모두 사퇴를 하였습니다. 장로 총대 1인과 부총대를 선출하는 방법은 법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합동 D장로) [답] 질의자가 합동측 장로이므로 합동 헌법으로 답한다. 1. 만70세 시무 정년의 의미 만70세 시무 정년의 의미는 만70세가 되면 시무기간이 종료되므로 만70세가 지나면 더 이상 시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만70세 익일부터는 은퇴의식 등과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당회나 제직회에 참석할 수 없고 어떤 공직도 받을 수 없다. 이에 관하여 만70세까지(교회정치 제3장 제2조, 제3조)에서 만70세의 의미는, 71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이다. 그 이유는 만1세는 출생 후 365일째인 두 번째 생일 전날이 만1세이기 때문이다(교회법률상식 pp.220-226 참조). 그런데 총회는 제93회 총회가 만70세에 대한 해석을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1년 동안이라고 잘못 해석(제93회 총회회의결의 및 요람 p.70 참조)하여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2. 장로 20년 시무를 위한 연장 시무에 대하여 질의자의 질의 내용에 만70세까지의 장로 시무기간이 19년 10개월인 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한 조건인 20년 이상의 시무기간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시무정년이 종료된 만70세 이후에 연장시무 운운함은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사안으로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천부당만부당한 불법이다. 그러므로 만70세에 장로 시무기간이 19년 10개월인 자는 원로장로로 추대하는 방법이 없다. 법은 단 하루만 미달되어도 추천할 수 없는 것이 현행 헌법의 법리이다. 3. 총회 총대 결원의 보선에 대하여 정치 제12장 제2조(총회 조직)에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하는 목사와 장로로서 조직하되 목사와 장로는 그 수를 서로 같게 하고 총대는 각 노회 지방의 매 7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씩 파송하되 노회가 투표하여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송달하고 차점 순으로 부총대 몇 사람을 정해 둔다.”고 하였고, 정치 제22장 제1조에 “총회 총대는 총회 전 정기노회에서 선택할 것인데 총회 개회 6개월 이상을 격하여 택하지 못 한다.”고 하였으며, 동 제2조(총대 교체)에 “총회 원 총대가 출석하였다가 자기 임의로 부총대와 교체하지 못할 것이나 부득이한 때에는 총회의 허락으로 부총대와 교체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총회 총대 선택에 관한 규정은 ① 정기노회에서 선택할 것 ② 목사와 장로 수를 같게 할 것 ③ 총회 개회 6개월 전에는 택하지 말 것 ④ 총회 개회 2개월 전에 총대와 부총대 명단을 총회 서기에게 제출할 것 ⑤ 총회에 출석한 후에 부총대와 교체는 경우는 총회의 허락을 받을 것 등의 규정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질의자의 노회는 정기노회를 마친 후 장로 총대 중 1인이 사퇴를 하였고 장로 부총대 2인 모두도 사퇴를 하였으나 총회에 총대를 보고하기 이전이요, 총대보고는 목사와 장로의 수를 같게 해야 하고 부총대 몇 사람도 보고해야 함이 헌법의 규정이다. 그러므로 부득불 “임원선거는 정기노회에서 선거” 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임원 중 결원이 있을 때는 임시노회에서 보궐선거”를 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처럼 “결원된 총대와 부총대 선거” 역시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장로 총대 1인을 선택하는 선거를 하여 총대 1인을 선정하고 차점 순으로 부총대 2인을 선정하여 총회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노회의 총대 보고를 하는 것이 법리이다. 여기에서 혹 임시노회는 3건 이상 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임시노회는 단 한 건만 있어도 목사 3인, 장로 3인이 청원하되 일시와 장소까지 정하여 노회 소집청원서를 제출하면 회장은 반드시 그 시간 그 장소에 노회를 소집해야 한다(정치 제10장 제9조). 혹자는 임원회가 총대와 부총대를 선정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지만 노회가 임원회에 위임하지 아니한 사안이므로 불가하며 노회가 투표로 선택하는 것이 법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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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성공칼럼] 비움=채움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으려고 하는가? 마음이 답답하고 힘들고 무겁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숫자의 노예로 살아간다. 숫자가 없으면 두려워하고, 숫자가 많아지면 욕심이 생기며, 숫자가 최고치에 달하면 지배욕에 불타게 된다. 예를 들어, 통장의 돈이 없으면 두려워하고, 통장의 돈이 늘면 욕심이 생겨서 더 많아지기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통장의 돈이 아주 많아지면 그 숫자만큼 자신이 높아진 것으로 착각하여 으스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을 아래로 보면서 지배욕을 나타내는 것이다. 돈 뿐만이 아니다. 교회에서도 교인의 숫자가 없으면 두려워하고, 숫자가 많아지면 더욱 많게 하려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해서 거대해지면 권력을 행사하며 지배욕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마음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사랑에서 나온 본성과 사람을 이용하는 정욕이기에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용한 자연에서 마음을 비우면서 쉬기를 원한다. 그러면 잠시 동안은 행복함과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잠시 편안할 뿐이다. 쉬고 난 후에는 또 자기 사랑을 위해서 돈과 권력과 사람이라는 숫자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자기 사랑을 위해서 신성한 것을 이용하고 사람을 이용하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의 목적은 자신의 숫자인 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비워도 자연에서 쉬어도 평안은 없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악으로 향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쉼을 얻고 기쁨이 넘치기 위해서는 숫자와 자기 사랑에서 나온 두려움과 욕심과 지배욕을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내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해와 비를 주시고 가족, 친구, 수도 없이 많은 것을 주셨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고... 이렇게 지금까지 나에게 주신 것을 찾고 찾으면 그 속에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이 일어나면서 주님의 사랑이 생기게 된다. 이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고 찾아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마음은 가벼워지고 행복해지고 밝아지면서 마음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목적은 사랑이다. 주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진리이며 지혜이며 사상이며 신념이다. 이 사랑과 진리를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과 선이란 전적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상대방을 이용하는 태도는 선이 아니다.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교육이란 명목으로 부모가 자녀를 이용하는 것이나 공부라는 이름으로 선생이 제자를 이용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목사가 교인을 이용하는 것이나 좋은 명분을 내세워 국민들을 이용하는 정치가나 이 모든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쉴 수 있는 길은 돈 버는 것, 일하는 것, 고민하는 것을 잠시 멈추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속에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채우며, 자신의 몸과 소유로 선을 행하려는 목적을 마음에 품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할 때 마음은 비워지고 또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선이란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나보다는 상대방이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인가? 쉼과 채움을 모두 얻기 위해 나보다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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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은혜의 말씀] 아이야의 축복(창 37:1~5)
    오늘 분문의 말씀은 요셉에 대한 말씀이지만 소개할 때 아버지 야곱부터 얘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삭의 믿음, 야곱의 믿음 3대를 지나가면서 그 집안의 내력이, 히스토리가, 그 집안의 흐름이 생긴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가정이라는 게 여러분 한 사람의 존재로 이루어 진 게 아니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시댁, 친정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구조 속에서 가정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오늘 선택하고, 판단하고, 계획하고, 실천하고, 평가하지만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손자에게, 아들에게 반드시 내려간다는 겁니다. 여기 창세기 37장에 아이야의 축복을 이야기 하는데 아브라함은 조상 중에 아무런 믿는 사람이 없어도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내려갈 때 아브라함이 왜 복을 받았는가 보면 포기의 축복을 누렸다고 봅니다. 아브라함 혼자 75세에 늦게 시작을 했지만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 익숙한 곳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저는 가정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면 많은 순간 포기의 축복, 내려놓음의 자유, 지는 것의 이기는 법을 알아야 된다고 봅니다. 부부지간에 이겨먹으려고 꿈도 꾸지 마십시오. 지는 것이 이기는 겁니다. 집안의 평안을 위해 남자들이 포기의 축복을 누리면 집안이 화평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포기하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생계수단을 포기하고 주를 따라갔기 때문에 위대한 겁니다. 포기하지 못하고 끝가지 하는 것은 집착·아집 입니다.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가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고, 불편한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고, 남편이 못하는걸 아내가 하고, 아내가 안 되는 걸 남편이 하고, 부부가 그렇게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면 미운 정 고운정이 들면서 세월이 지나면 좋은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이야의 축복이라는 건 대부분 약점이 강점되고, 쓴물이 단물 되고, 안 좋은 것이 좋게 바뀌어 갑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 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가정 문제가 한방에 해결 되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가정이나 직장이나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어떤 어려움이든지 복합 다중 적이고 간단하게 얘기할 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신바람 나는 직장 삼위일체가 되어야합니다. 성경적인 가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가정은 교회처럼, 교회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가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만이 드러나고 오직예수, 순수 복음, 진리 파수, 생활의 순결이 있어야합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주님만 드러나야 되지 인간냄새가 나고 사람이 큰소리치는 건 부질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가정은 사랑하며 섬기며 나누어야 하고, 가정엔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요셉이 어린 시절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에 인생후반전에 그렇게 처절하고, 고독하고, 인신매매가 되고, 절절하게 혼자 끌려가고, 팔려가는 세월을 살아도 눈도 깜짝 안합니다. 이미 부유하고 사랑의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사랑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 요셉의 마음에 철철 흘러넘칠 만큼 풍성한자였기 때문에 요셉의 인생에 구김살이 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정 예배하는 가정, 거룩한 가정 복 있는 가정 쓰임 받는 가정, 천대까지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는 가정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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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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