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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프로테스탄티즘을 회복하라
    6월 14일은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막스 베버(M. Weber, 1864-1920)가 사망한 날입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집단이나 기관이 조직화, 분업화를 통해 효율성을 추구하는 ‘관료제(Bureaucracy)’를 도입하게 될 것이고, 이는 인간 소외와 영혼의 파편화라는 문제를 양산할 것이며, 따라서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현대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될 것으로 본 인물입니다. 동시대인이었던 로버트 미헬스(Robert Michels, 1876-1936)는 현대사회가 발전하고 관료제화할수록 의사결정권력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하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힘없는 처지에 있게 된다는 ‘과두제의 철칙(the iron law of oligarchy)’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수리하던 외주업체 직원 한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SNS를 타고 퍼져나갔고, 많은 이들이 인터넷 상으로 혹은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애도의 표시를 남겼습니다. 스물이 채 안 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은 그러나 우리가 몰랐거나 어쩌면 등한시했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른바 메피아(메트로+마피아)의 실체와 이들과 결탁한 외주업체의 비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희생과 굴종을 강요당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특히 젊은이들의 이야기들 말입니다. 전형적인 관료제의 병폐요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롯데 그룹의 로비 사건과 관련된 비자금조성 및 기업운영실태에 대한 대대적인 검찰 조사 과정에서 우리는 ‘과두제의 철칙’ 현상이 우리 사회에 문자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룹 후계 문제를 놓고 벌였던 재벌 부모와 자식 간, 그리고 형제들 사이의 충격적인 싸움을 목격한 지 불과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 그룹 총수(摠帥) 일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해 동안 주식배당금을 제외해도 수백억에 달하는 임금을 꼬박꼬박 받고 있음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열사들은 정규직 자리를 계약직 직원들로 채우고, 계약직 사원들은 용역업체에 떠넘기는가 하면, 계약직마저 ‘지원사원’이라 불리는 아르바이트 직원들로 보충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메트로나 재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똑바로 쳐다보십시오. 인간의 존엄과 생명보다 때로는 경제적 논리가 더 앞서는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합니다. 중세로마교회보다 더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합니다. 그러니 불의한 권력은 여전히 유령처럼 사회의 구석구석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극악한 이단이 설치고, 동성애를 신봉하는 무리 수천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불의한 시대가 아닙니까? 개신교는 본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불렸습니다. ‘저항자(抵抗者), 항거자(抗拒者)’라는 뜻입니다. 개신교는 16세기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교권(敎權)에 맞서 저항했습니다. 불의한 권력(權力)에 맞서 항거했습니다. 물질과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와 성경적 가치를 들고 맞섰습니다.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를 기치(旗幟)로 들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순교의 피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의 사람들과 예수의 교회들이 다시 한 번 진정한 프로테스탄트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할 수 없다!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환경을 보호하라! 젊은이들이여,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용기와 희망을 가져라! 이러한 믿음과 고백으로 다시 한 번 일어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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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성서연구] 누가 불씨를 던지는가(마가복음 16장 9-10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후에 예수님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9절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일 때문에 비통에 잠겨 있었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일과 세 번이나 부인한 일들로 인해 깊은 자책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힘들게 한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닫고(실제 의미는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요 20:19) 한 마디로 이들은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침체된 상황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흥>입니다. 그들에게 절박한 것은 부흥이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일어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는 말씀의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죽은 자들처럼 주저앉은 그들을 일으켜 세울 부흥의 불씨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침체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처지와도 흡사합니다. 현재 우리도 침체되어 있습니다.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누가 해도 마찬가지>라고 자조 섞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잘 나가던 산업들이 구조조정의 한파에 내몰리고 있으며, 모두의 입에서는 힘들다는 말들뿐입니다. 출산율 저하로 가만히 놓아두어도 수십 년 후에는 저절로 사라질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극도로 예민하여 <묻지 마 살인> 등의 범죄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화가 난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관용과 여유, 사랑과 용서 등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기에 보태어 교회도 부끄러운 일들이 노정되며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고, 전도의 문이 닫히고, 교세와 재정의 감소, 그리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의기소침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부흥이 절박합니다. 문제는 <누가 이 침체된 현실에 부흥의 불씨를 던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불씨를 던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수제자 베드로였나요? 사랑 받던 제자 요한이었나요? 아닙니다. 전혀 뜻밖의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모두가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죽은 자처럼 있을 때, 홀로 흥분된 가슴을 안고 달려간 사람은 마리아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제자들에게 들려준 한 마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은 주저앉아 울던 제자들로 하여금 벌떡 일어서게 만들었습니다. 문을 닫고 숨어 있던 그 작은 다락방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게 부흥의 불씨였습니다. 부흥의 불씨를 던지는 것은 주인공 같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연약한 여성으로서 제자도 아니었고, 한 때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여인에 불과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감동이 가슴에 가득할 때, 침체된 상황에 불씨를 던지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부흥의 불씨를 던지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 후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누가 중심인물인가를 물으면 대뜸 베드로와 요한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전에 불씨를 던진 마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베드로 같은 인물이 나타나길 기다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불씨를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작지만 침체된 우리 주변을 깨우는 불씨를 던질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마리아가 되어 부흥의 물꼬를 트는 사명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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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소강석 칼럼] 사상전을 잘해야 영전에 승리한다
    영국교회의 몰락 원인을 아는가? 영국은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으며 세계의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을 주도한 나라였다. 그래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영국에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고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입법화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교회는 이런 시대적 트렌드를 읽지 못했다. 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반기독교적인 사상과 정서를 막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교회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노터치하겠습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개교회의 목양을 하는데만 집중을 하겠습니다.”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35년, 40년 후에는 영국교회가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전 국민이 기독교인이나 다름없던 나라가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겨우 2% 밖에 안 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반대로 이슬람은 8% 가까이 성장하였다. 게다가 지금 얼마나 테러문제로 몸살을 앓고 두려워 떨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사상전에서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회주의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빌헬름 라이히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아주 교묘하게 접목하여 네오마르크시즘(Neo Marxism)을 만들었다. 그는 성정치를 주장하면서 가정, 학교, 종교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성적 욕망을 해방시켰을 때 새로운 마르크시즘의 세상이 온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동성애를 앞세워서 가정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운동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어느 진보 정당에 속해 있는 국회의원이 동성애나 차별금지법을 입법화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반기독교적 사상의 흐름이 밀려오며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급속하게 파괴해가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영국교회처럼 사상전을 준비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파도만 보면서 바람은 보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왜 불어오는가, 그런 파도를 일으키는 원인인 바람을 보지 못했단 말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 반기독교적 정서와 세력을 직시하고 사상전을 잘해야 한다. 만약에 한국교회도 영국교회처럼 사상전에 실패하여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고 이슬람의 샤리아법이 통과되면 2-30년 내로 몰락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여전히 사상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무관심하다. 오히려 개교회 목회와 개교단 위주의 사역에만 머물러 있었다. 아니, 한국교회는 다툼과 분열의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개교회도 계속 서로 내부 파워게임을 하며 싸우고 교계도 교권 싸움에 몸살을 앓고 있다. 사상전에서 실패하면 영전에서도 패배하게 된다. 그 결과 교회 생태계는 무참히 파괴되어버리고 교회들은 순식간에 사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가 깨어서 사상전을 잘해야 한다. 그럴 때 시대의 흐름과 바람도 보이고 영전에서도 승리하며 교회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 한국교회여, 깨어나 반기독교적 정서와 세력에 맞서 사상전을 준비하라. 영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일어서자. 그래야 한국교회가 다시 교회 전성기, 크리스텐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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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부산장신대 개방이사 선출
    부산장신대학교 이사회(이사장 민영란 목사)는 6월 14일 학교 5층 회의실에서 정기이사회를 열고 총회파송이사 및 개방이사를 선임했다. 이날 총회파송이사 김근호 이사 후임으로 귄위영 이사가 임기 4년 이사로 선임됐다. 6월 26일부로 임기가 만료되는 개방이사 황용인 이사와 허원구 이사를 대신 복수추천된 후보에 대해 투표했다. 먼저 황용인 이사 후임으로는 박한규 장로가 만장일치로 선임됐다. 허원구 이사 후임으로 복수 추천된 김운성 목사(부산노회 땅끝교회)와 이정희 목사(경남노회 영광교회)가 3차 투표까지 갔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1차에서는 6:4, 2차에서 7:3, 3차에서 7:3으로 10명 이사 중 8표를 얻어야 함으로 부결되고 차기 이사회(6월 23일) 때 투표하기로 했다. 한편, 부산장신대의 모 교수에 대한 논문 조작 및 이중게재, 그리고 공문서 위조 건에 대해 조사위원회가 유인물로 보고했으며, 추가 2차 조사에 대해서는 인사위원회에서 계속 조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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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5
  • 통합 총회장의 용기있는 고백
    제10회 영호남한마음대회가 지난 6월2일 창신대학교에서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설교자로 나선 통합 총회장 채영남 목사는 “한국교회는 일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해 조선장로교를 일본 천황에게 바치고 말았던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면서 “경남노회는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의 본분을 지켜준 자랑스러운 노회인데, 오히려 잘못한 사람들이 옳은 길을 가는 이들을 탄압하고 불명예를 안기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사실상 고신총회에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이에 예장 고신 경남노회장 이인덕 목사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오열했으며, 증경총회장 윤희구 목사도 “우리가 다른 교단을 비판하고 정죄했던 것에 대해 사과한다”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채 목사는 예장통합 100회 총회의 주제인 ‘주님, 우리로 화해하게 하소서’를 상징하는 스톨을 이인덕, 윤희구 목사 목에 걸어주었다. 이날 채 목사의 용기있는 고백으로, 참석한 이들은 뜨거운 눈물과 화해의 기쁨을 누렸다. 비록 교단간의 정식 절차를 거친 사과는 아니었지만, 최고 지도자의 용기있는 고백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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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6-06-15
  • 보훈의식 높여 사회갈등 구조 바꿔야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친 선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달이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의 ‘보훈의식’은 어떨까? 보훈처와 서울행정학회가 공동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의 보훈의식은 6점 만점에 4.79점으로, OECD 국가들 평균점인 4.82보다 낮다고 한다. 또 국가별 순위로는 12위에 해당한다. 특히 국가가 위기를 맞을 때, 나가서 싸우겠다는 비율은 42%에 불과하다고 한다(윈 갤럽인터내셔널이 지난 2014년 9월부터 12월 사이, 전 세계 64개국에서 ‘조국을 위한 참전 의사’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임) 이는 전 세계 평균인 61%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결과이다. 우리나라처럼 분단되지 않은 노르웨이, 핀란드, 터키, 스웨덴, 미국 등도 우리보다 높은 ‘참전 의사’를 나타내고 있다. 국민들의 ‘보훈의식’이 이렇게 낮은데, 국가가 위기 처해 있을 때, 누가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하겠는가?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는 “사회 갈등 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지난 2010년 조사에 의하면, OECD 가입 국가 가운데, 0.72점으로 종교 갈등이 있는 터키 다음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의 갈등은 결국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막대한 경제적 부담과 함께, 그 대가를 매년마다 지불해야 하는데, 최소 82조원에서 최대 246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GDP의 27%에 해당할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보훈처와 서울행정학회의 발표에 의하면, 국민들의 보훈의식 지수가 1%만 올라가도, 11조 9000억 원의 경제성장 증대 효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정말 외면하기 어려운 중요한 수치이다. 국민들의 보훈의식이 증대되면 사회 갈등도 자연스럽게,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보훈의식의 고양(高揚)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국가 보훈의식도 높이고, 사회 갈등도 줄이고, 경제적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 온다면, 이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진하여야 할 국가·국민적 과제가 아닌가? 이를 통해, 국민의식도 덩달아 높여야 된다. 이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면서, 단순히 나라를 지키고,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보훈의식을 높이는 전 국민적인 시민운동도 추진하여야 한다. 국민들의 보훈의식은 결국 국민들을 위한 일로 되돌아 올 것이며,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얻는다면, 이보다 귀하게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는 의미가 더 있을 것인가! 국가를 위하여, 후대들을 위하여, 몸 바쳐 희생하신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귀히 여기고, 그 뜻을 이어가는 호국·보훈의 달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앞장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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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5
  • 동성애 저지운동 ‘장기적 전략’으로 나가야
    지난 2일 대부도 토막살인 사건의 진상이 경찰에 의하여 밝혀지면서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경제는 “대부도 토막살인 배경엔 동성애…조성호, 동거男에 성관계 대가 못 받자 살해”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조 씨는 피해자 최모(40)씨에게 성관계 대가로 받기로 했던 90만원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몸 파는 놈이" 등의 욕을 듣고 격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라고 보도했다. 동성애의 현주소다. 용기 있는 몇몇 언론들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단순한 동거가 아닌 동성애자들의 성매매 관계로 보도했지만, 대부분 언론은 이를 단순한 성매매 화대 사건으로 보도했다. 한국기자협회 인권보도준칙 제8장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 경우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을 밝히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다. 대부분 언론들은 강제규정이 아닌 나쁜 규정을 동성애 문제에 관한 만큼은 엄격하게 지키기로 한 것 같다. 언론들의 이와 같은 2중적 보도 행태가 우리 사회의 동성애와 에이즈의 심각성을 덮어버리고, 오히려 미화시킴으로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망가뜨리는데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 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운동이 언론과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오히려 혐오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현주소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강력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가져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역풍을 맞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제 한국교회의 동성애 조장 반대 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 된다. 지금처럼 해마다 6월이면, 서울광장 퀴어집회에 대하여 맞대응하는 식의 교계연합의 ‘반대 집회’는 오히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과 언론들에게도 한국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핍박한다’는 오해를 심어준다. 매년마다 맞대응을 언제 까지 할 것인가? 오히려 대규모 반대집회 장면들은 국제인권단체와 국내외 언론들에 의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차별과 혐오를 증명하는 자료로 역이용 되고 있다. 한국교회 집회의 진정성은 허공에 사라지고, 각 언론들은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 보도만 쏟아놓는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실외집회가 한국교회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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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5
  • 화해하지 못하고 하늘나라 소풍 간 故 오병세 박사
    고(故) 오병세 박사가 6월 8일 자택에서 하늘나라로 이사를 갔다. 고신 교단 안에서는 너무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고명하신 어른이라 일일이 학력 및 약력까지 열거하지 아니해도 알만한 교단 인사들은 알고 있는 분이다. 90세까지 이 땅에서 살면서 좋은 일, 굳은 일 다 겪고 사신 교단 내의 큰 어른이라 아쉬움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여나 마음한 구석에 아쉬운 점이 있으면 이런 것이 아니겠나 하는 노파심에 한 글자 적어두고 싶은 것임을 친지, 가족 분들에게 이해를 먼저 구하고 싶다. △하늘나라로 소풍가기 전 꼭 화해하고 싶은 분들과 ‘미안하다’는 말 남겼으면... 오 박사는 고신 교단 초창기부터 고려신학교 설립 이후 고신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장, 학장, 총장, 총회장 등을 거친 유일한 인물이다. 그들이 말하는 동방박사 세 사람(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1951년 고려신학교 제5회 졸업동기생들이 이제 하늘나라에서 조우하시겠지요. 고신 교단이 인재를 배출하고 끝까지 배려해준 이 세 박사들은 고신 교단의 초창기부터 후진을 육성한 신학계의 거목이자, 훌륭한 영적 스승이었다. 故 홍반식 박사는 교단 정치는 모르고 오로지 후학들을 위해 몸으로 헌신한 한국교회 신학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노회장, 총대, 총회장 한번 못해보고 오직 믿음으로 경주한 영적 스승임을 자타가 인정하는 인물이다. 아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어려움을 토로하지 않았고, 교단이 다른 재건파 교회에 다녀도 신앙의 자유 범주에 속한다고 하여 부부싸움이 없었던 인자한 어른으로 후배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故 이근삼 박사는 학장, 총회장, 총장까지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고신대학이 고신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기까지, 의과대학 의예과 신설로 인해 교명이 바꾸기까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견디어 낸 큰 어른이었다. 고려신학교가 고신대학으로 총회의 사전허락 없이 교명이 바뀐 채 문교부로부터 의예과 허락 발표가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는 날, 서울중앙교회당에서 총회 가 진행되던 기간이었다. 총대 중 특히 경북노회 소속 오병세 목사로부터 총회 허락없이 교명을 바꾼 사실로 인해 비판의 발언으로 공격을 받을 때 “모든 책임은 오로지 나 이근삼한테 있습니다. 용서해 달라”고 호소할 때의 광경이 생각난다. 그때 구원 투수로 나선 사람이 김경래 장로였다. 그가 일어나 하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해 오는데 언제 홍해바다를 건널 때 의논하고 숙의하였겠습니까? 다 교단을 위해 하신 것으로 하고 용서해 주시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였다. 천금을 주고도 못 사는 귀중한 적시타 홈런을 친 것이다. 이후 학장직을 사임하고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故 오병세 박사는 교단 내 역사를 행정과 법리적으로 체계화시켜 전통을 유지해 오는 동안 경남노회 법통노회라 하는 故 송상석 목사와 자주 충돌하는 광경을 보았다. 고신 교단 내의 두 종류의 역사관이 있다고 할 정도로 경남노회 송상석 목사가 말하는 교단 역사의 줄기와 경북노회 주류를 이루는 오병세 목사의 역사의 흐름이 다소 다르다는 평가를 후세인들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오병세 목사는 학자이기 이전에 행정가이고 교단 정치가로 두루 겸비한 인물로 남고 있다. △말년에 충돌된 사건은? 박영훈 고신의료원장이 재직 당시 서구 송도 암남동 34번지 고려신학대학원의 자리를 복음병원이 사용함으로 인한 몫을 나눠갈 때 격렬히 반대에 나선 인사가 오 박사였다. 당시 고려신학대학원 원장으로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절충과 타협으로 천안으로 갈 때의 조건 사항이 너무 인간적인 냄새가 풍긴다고 서로 충돌한 사소한 일이 있었다. 타협 후 자녀를 수련의와 의사로 채용할 수 있도록 부탁한 사실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나 공적인 사건과 연계될 때 이미지가 상실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송도제일교회에 두 사람의 가족들이 출석했는데, 사모끼리 충돌하다가 오병세 목사 가족은 부평교회로 따로 갈라져 출석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박영훈 장로와 오병세 박사가 이 땅에서 지내면서 서로 화해하지 않고 먼저 하늘나라로 간 오병세 박사의 아쉬운 여운이 남는다는 것이 인간사에 있는 화해 자리가 없었다는 점은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지금 박영훈 장로도 87세로, 살아생전에 서로 만나 화해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고령으로 언제 하늘나라로 따라 갈 소풍날이 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주 안에서 서로 용서로 사랑의 화해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먼저 하늘나라로 소풍 떠난 오병세 박사와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서로 화해하며 포옹했으며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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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한국도 일본처럼 할 수 없을까?
    한국은 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일본은 손님이 버스를 기다리고 필자는 지난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까지 일본 선교지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일본에 갈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금번엔 더 절실히 느낀 것이 몇 가지 있다. 모두 길거리에서 느낀 것이다. 첫째, 일본에서는 길에서 불법주차 차량을 한대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주택가 차선이 없는 도로에서도 불법주차는 단 한대로 없었다. 한국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자기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떤 이는 차를 타고 어딜 가면서 ‘주차금지’라는 표시를 해놓고 가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자기집 앞에도 도로에는 절대 차를 세워두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는 어딜 가든지 통행에 지장을 받는 일이 전혀 없다. 일본은 어째서 그런가. 그 나라는 주택을 건축할 때에 주차 공간이 없으면 건축허가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가에 세워두는 불법주차가 있을 리가 없다. 중앙선이 없는 길에서도 불법주차가 한대도 없기 때문에 통행도 쉽게 할 수 있고 주행에 방해 받는 일이 전혀 없다. 출퇴근 시간에는 다소 정체가 있을 뿐이다. 일본에는 불법주차가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차량을 등록할 때에 주차공간이 있어야만 등록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는 차량이 그리 많아도 경적을 울리는 차량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필자가 10일간이나 이곳 저곳 다녔지만 한번도 경적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한국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한국과 일본이 크게 다른 것은 한국은 버스가 관광객을 기다리는데 일본은 관광객이 버스를 기다린다. 한국은 차로를 점령한채 20분 혹은 30분 손님을 기다린다. 그러나 일본은 손님들이 약속시간 전에 와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가 오면 즉시 타고(보통 90초 이내) 곧 떠난다. 특히 외국관광객이 많이 가는 면세점 앞에서는 출발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손님이 있으면 버스가 일단 출발하여 주위를 돌아 15분 정도 뒤에 다시 그 자리에 와서 늦게 온 손님을 태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면세점 앞에서는 정해진 정차시간을 초과하면 가차없이 단속에 걸리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관광버스가 도로변에 불법정차하여 10분을 넘기면 경고도 없이 바로 1만2000엔(한화 약 130,700원)의 범칙금과 벌점 2점을 부과한다. 그러므로 버스가 절대 도로변에 장시간 정차할 수 없다. 차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이 차를 기다리는 것과 뭐든 잘하는 것은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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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5
  • [목회자칼럼] 해외 한인 선교사 가족 수양회 인도 견문록見聞錄 (4)
    34년 만에 다시 찾아 본 내 젊은 날 유학생 시절의 서독 수도 Bonn!어찌 잊을 수 있으랴? 얼마나 다시 와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바라보면 이루어진다. 마음에 간절히 소원하면 응답 받는다」 이런 믿음이 있었다. 살아오면서,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소원하던 것이 응답받은 많은 간증들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섬세하신 은혜가 그 때, 그 때 있었음을 우리는 깨달으면서 놀라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다. 꼭 가보았으면 하고 소원을 가지면 놀랍게도 그 지역에서 〈말씀 전파〉 초청을 해 오는 기적을 많이 경험하고 있다. 나에게는 조금 특이한 철학이 있다. 단순한 구경이나 여행 목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것을 사양하고 〈말씀(복음) 전파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 한하여 외국을 방문한다는 철학이다. 이 신조는 절대 불변의 법칙은 아니고 그냥 지난 세월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사랑과 은혜를 받아왔으므로 조금이나마 내 나름대로 예의와 분수를 지켜보고 싶어서 마음으로 작정해 본 철학 이다. 실제로 시편 37: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우리 부부가 머무는 숙소는 4층 구조의 작고 소박한 빌라인데 4층 한 층에 방 한 칸씩에 세 가구가 있다. 우리처럼 짧은 기간 머무는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한다. 독일 사람들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편리하고 또한 청결함이 돋보이는 〈민박 숙소〉 이다.세계화 시대 국제적으로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형태의 저렴한 숙소가 많이 준비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독의 수도였던 Bonn은 34년 전과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지막한 단독 주택들로 형성되어진 Bonn 시가지를 내 숙소(4층 빌라)에서도 잘 바라 볼 수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도로, 맑은 공기 그리고 하루 서너 차례 울려 퍼지는 교회 음악 종소리 역시 그대로였다. 유학생 시절, 하루 서너 번 정해진 시간이 되면 Bonn 시내의 모든 교회들에서 동시에 음악 종을 울려 주는데 나는 그 시간이 무척 좋았다. 유럽 교회의 종들은 우리나라처럼 종루에 한 개의 종이 댕그라니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종이 함께 달려 있다. 그 여러개의 종들이 이리 저리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음악처럼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음악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행복하였다.나는 번잡하고 요란해 보이는 첨단 문명의 도시 ? 예를 들면 뉴욕 ? 보다 이곳 Bonn처럼 아담하고 조용하고 낮은 주택(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도시를 좋아한다. 집집마다 크지 않지만 잘 가꾸고 있는 꽃밭이나 잔디밭이 있고 소박한 집들의 창문에는 어김없이 하이얀 색상의 커텐들이 드리워져 있다. 창틀에는 작은 화분들이 몇 개씩 놓여 있어서 집 주인보다 오히려 지나가는 이웃 주민들에게 기쁨과 미소를 선사한다. 이런 유럽풍의 도시가 내게는 편안하고 사랑스럽다.내가 공부하였던 Bonn 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니 독일의 옛 궁전을 대학 본부 건물로 쓰고 있던 그때 그대로였다. 마치 34년 전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특유의 고색창연한 대학 본부 건물은 검소하고 수수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면서도 세계 명문 대학으로서의 명성과 품격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이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 캠퍼스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마치 다들 외관 경쟁을 하는지 더 넓은 부지, 더 크고 화려한 교사 건축에 여념이 없다. 학생들 개개인의 실력 향상이나 깊이 있는 연구 개발(Research & Development)을 위한 투자는 많이 뒤 떨어지고 있는 줄로 안다. 오늘 우리나라의 이러한 폐단은 멀쩡한 관공서 건물들을 불필요하게 철거, 증축, 신축하는 일이라든지 멀쩡한 도로들을 놓아 두고 그 옆에 기름진 농토들을 마구 훼손해가면서 새로운 도로들을 무분별하게 많이 건설하고 있는 것 등 마치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정부가 밀고 나가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지금의 〈김해 공항〉을 좀 더 확장하여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공항 부지 선정 문제〉로 비화하여 “가덕도냐 밀양이냐?”를 놓고 영남지역은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 기존의 오랜 주거지역인 밀양에 광활한 〈신공항〉을 건설한다면 극심한 소음은 어떻게 할 것이며 우리나라처럼 제한된 국토에서 그 소중한 농토들이 대량 매몰되는 것과 비행기들이 고도를 낮춰 착륙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김해 쪽의 아름다운 산마루들이 대거 절단돼야 한다니 이런 무리수를 왜 밀고 나갈려고 할까?국제적인 물류의 환적 화물이 부산에 있고 세계적인 부산 신항만이 바로 가덕도에 위치하고 있다. 가덕도에 신공항을 건설하면 소음문제, 농지 대량훼손 문제, 자연환경 파괴문제, 항공기 이착륙 안전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 판단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민족 특유의 조급성과 단견성은 〈교회당 건축〉에서도 쉽사리 발견 된다. 멀쩡한 교회당을 너무 간단히 철거해 버리고 과도한 예산으로 신축을 한다든지 교육관이나 부속 건물들을 마치 교회들끼리 경쟁하시다시피 너무 쉽게 너무 과도하게 건축하는 현상 역시 심히 우려할 부분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신령한 부분을 강화하고,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사람 자체를 양육 훈련시키고,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품격과 신뢰도를 높이는 일에 우리의 기도와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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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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