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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경남도지시 양성봉 장로
    양성봉(梁聖奉, 1900-1963) 장로는 6.25 전쟁기 부산과 경남지방 행정관료였다. 1949년 12월 제4대 경남도지사로 임명된 그는 1953년 10월까지 3년 11개월 동안 경남도지사로 활동했다. 말하자면 양성봉은 6.25 전쟁기 피난수도 부산의 지도자였고 전쟁기 부산경남지방 행정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역할이 어떠했는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양성봉은 1900년 2월 8일 부산시 좌천동 224번지에서 양덕유(梁德有)와 한모악(韓母岳, 후일 한영일 韓永日, 혹은 남편의 성을 따라 양영일로 불리기도 함)의 10녀 1남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위로 누나 다섯(수혜, 한라)과 아래로 여동생 다섯(봉옥, 순옥)이 있었다. 양성봉의 부모는 부산진교회 초기 신자로 1901년 2월 10일 왕길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모태신앙인으로 출생한 양성봉은 부모를 따라 부산진교회에서 성장했으나 4살 때인 1904년 11월 30일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가 2년 뒤인 1906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후 부산진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한 후 부산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부산철도국 서무과에 취직하여 일하기도 했고, 울주군 서생면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부산으로 돌아 온 후에는 어을빈(Charles Irvin, 魚乙彬)의 제약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든 중 해방을 맞았고,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 발기 총회에 참여하고, 문화 외교부장을 맡았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1945년 10월 10일에는 부산부 총무과장(주사)으로 발탁되었다. 45일 만인 그해 11월 26일에는 부산시 부윤(府尹), 곧 부시장에 취임했다. 그의 영어 실력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46년 1월 24일에는 제1대 부산시장에 취임하여 미군정이 끝난 후인 1948년 11월 6일까지 2년 10개월간 재임했다. 시장 재임기에 중립국 감시단의 인도인 메논 단장과 중국의 유어만(劉御萬) 사무총장 등 20여명을 부산으로 초청하여 동래별장에서 극진하게 대접하는 등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유도하는 등의 업적으로 이승만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기독교 신자로서 성실하고 정직한 시정을 이끌었던 그는 1949년 6월 17 관선 제2대 강원도지사로 임명되어 5개월간 일하고 그해 11월 15일 물러났으나 12월에는 제4대 경남도지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6.25전쟁이 일어났다. 약 두 달이 지난 1950년 8월 18일부터 부산은 임시수도가 되는데 이때부터 휴전 협정 체결로 환도할 때까지 2년 10개월7일간 임시수도였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자 경남도지사인 양성봉 장로는 도지사 관사를 대통령 관저로 내어주고 자신은 부산 초량의 본가로 돌아와 대통령을 보위하였고, 그가 장로로 있던 초량교회는 피난민 구호에 앞장섰다. 이런 일로 초량교회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높였고, 1951년 4월 29일 주일에는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양성봉 지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고, 환도 직후인 1953년 10월에는 농림부장관에 취임하였다. 그런데, 전쟁기 양성봉 지사는 민생과 민심 수숩을 제일의 과제로 여기고 피난민 구호를 위해 크게 헌신했다고 한다. 전쟁 전 부산시 인구는 47만여 명이었는데, 개전 50여일이 지난 8월 10일에는 68만3천명으로, 1951년 2월 10일 실시된 부산시 인구는 89만명이었다. 피난민이 40만 명에 달했고, 부산에 포로수용소까지 설치되어 인구 포화상태였다.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 식량 전기 식수문제만이 아니라 공중위생 문제, 쓰레기 처리문제와 교통문제가 발생했다. 주택 상황이 심각했는데, 수용시설 외에도 1953년 7월 4일 현재 판자집이 28,619호에 달했는데, 영주동 산기슭에 1,000호, 영도대교 인근에 약 700호, 보수동에 약 600호, 송도에 약 300호, 국제시장에 약 1,200호였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양성봉 지사는 피난민 대책에 행정력을 집중했고, 생존의 문제가 시급했으므로 특히 구호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외원 기관의 협조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부인 문복숙과 누이 양한라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는 재임 중에도 검소하게 살고 청렴하고 결백한 도백이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그는 청계(淸溪)라는 아호처럼 계곡의 푸른 물처럼 살았는데, 이것은 자신이 교회 장로라는 자각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시정부가 환도한 후 1953년 10월 농림부 장관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고, 1954년 6월 장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정원과 온실을 갖춘 초량의 옛집에 살며 부산YMCA, 향토문화연구회, 부산로타리클럽 등에 관여하며 지내 던 중 1963년 6월 3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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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7
  • [교회학교를살린다] “코로나 이후, 기본으로 돌아가라”
    최근 한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단어가 있다. 바로 ‘사흘’이었다. 8월 17일이 임시공휴일로 제정되면서 광복절 연휴로 총 사흘간을 쉬게 되자 이 사흘을 ‘4일’로 잘못 알았던 어떤 이의 항의성 댓글로 인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수많은 성인들이 사흘이 3일이고 순수 한글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현실이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또 어떤 댓글에는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외우느라 사흘을 초등학교 때부터 알아왔다는 내용도 있어서 참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편의에 의한 신조어의 범람과 한글 파괴 현상으로 인해 국어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묵다와 묶다, 낫다와 낳다를 틀리는 경우는 부지기수이다. 정말 기초적인 문법과 어휘가 부족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코로나 이후 학력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기사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아이들이 동영상과 게임을 시작하면 책을 멀리하게 된다는데, 요즘과 같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가정에서 자녀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기초 학력마저도 저하될까 매우 우려가 된다. 그런데 이 걱정과 우려는 비단 일반 국어만의 문제는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학교가 모이기 힘들어지면서 우리 다음세대들도 신앙에 있어서도 기초적인 부분들이 현저히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요즘 아이들, 특히 청소년기로 갈수록 성경에 대한 기초지식이 너무나 부족하다. 성경의 내용을 접할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필자의 경우에는 할머니께서 사주신 이름 모를 흑백 번역 성경 만화책 시리즈를 초등학교 입학 전에 수십 번 씩 읽고 또 읽어서 책장이 다 해어졌던 게 기억난다. 그때는 성경 만화가 희귀하기도 했고, 만화책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어린 시절 그렇게 성경 만화를 읽고 교회학교 공과와 여름성경학교를 참여하며 성경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접하였고, 중 고등학교 때에는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설교에 등장하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배우고 그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에는 친구들과 문학의 밤을 준비하거나 찬양대회, 성경암송대회 등등 다양한 신앙 활동에 치중하며 공동체의 관계성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부터 교회에서는 본격적으로 복음의 내용과 현실의 삶을 접목시키는 구체적인 성경공부에 참여하였고, 신학생으로서 학교에서 신학 전반의 내용들을 배우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교회 생활을 하고, 교회학교에 참여하면서 매주 성경을 접하고 성경의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었다. 성경의 지식이 점차 자라면서 삶에 적용되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적어도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구별할 줄 알고, 다윗과 솔로몬이 부자관계라는 정도는 알았는데, 과연 요즘 우리 아이들은 성경의 기본 내용과 흐름을 잘 알고 있는지 심히 걱정이 된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결코 그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말은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고, 어쩌면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다시 한 번 기본을 회복하는 일이다.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의 기본기,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이러한 기회는 다시없을 지도 모른다. 경제적 위기나 사회 문화적 위기보다 더 심각한 신앙의 위기가 우리를 불신앙과 세속화로 더욱 몰고 갈지도 모른다. 신앙의 부모, 신앙의 어른들이 대각성을 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는 심각한 침체기로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 교회에서의 모임이 어렵다면 교회는 다음세대들이 일상 속에서도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신앙의 장으로 부각되는 가정에서 부모들은 어린아이부터 청소년, 청년에 이르기까지 가정예배나 가정성경공부 등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신앙의 선배이자 부모로서 우리 어른들이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치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삶의 교육이 절실하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올 여름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기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다음세대들 마음에 남을 수 있도록 모든 신앙공동체가 힘을 다해 말씀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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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학교를 살린다
    2020-08-07
  • [성서연구] 몇 사람이 일어나
    예레미야는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야 왕 13년부터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눈물의 예언자라 불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활동했습니다. 우선 당시 유다는 거의 몰락해가고 있었습니다. 또 그가 전한 메시지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다는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전통적 강국인 애굽을 통해 바벨론을 견제하려는 외교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유다를 비롯한 열국을 심판하기 위해 택하신 채찍이니,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길이며, 그렇게 하면 반드시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을 대적하고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 애국의 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외쳤으니, 예레미야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게다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온갖 죄악을 일삼는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패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 26장 5-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접한 유다의 고관들은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아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예레미야가 죽어 마땅하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그들의 손에 있으니 좋을 대로 하라고 하면서, 다시 한번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앙에 대해 뜻을 돌이키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가 죽을 수도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온 나라가 여호야김 왕의 통치 아래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달려가고 있는 와중에도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거기 모인 고관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사견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했기 때문에 죽일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히스기야 시대의 미가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쳐서 심판과 멸망을 예언했지만, 히스기야 왕과 당시 백성들은 미가를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히스기야 왕이 두려워서 여호와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재앙을 돌이키신 일이 있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면 오히려 자신들의 생명을 스스로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가 예레미야가 선포한 것과 같은 내용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후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도와 백성들이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했습니다. 예레미야 26장에는 비록 악한 시대였지만, 그 안에도 올바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들은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판이 기울어가는 유다 왕국을 바로 잡을 수 없었습니다. 유다 왕국은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소소의 바른 사람들의 존재 가치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들은 결과에 무관하게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순복했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말했습니다. 유다 왕국은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멸망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교회와 대한민국 사회가 복잡하고 어지럽습니다.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 나라 전체를 바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바른말을 합시다. 바른 삶을 삽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시다. 결과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주관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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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9
  • [소강석칼럼] 위드 코로나 시대의 리더십
    코로나 팬데믹이 온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아니, 팬데믹은 엔데믹이 되어 대한민국 사회도 끊임없는 긴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의학계에서 호흡기 질환 바이러스는 여름이 되면 수그러들 것이라고 했는데, 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예외적으로 여름에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니, 다 잡았는가 싶었더니 몇몇 교회를 통해서 감염이 일어나면서 교회도 고위험군으로 확정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들이 철저하게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특히 식사하는 일에 조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몇몇 교회 문제로 교회 전체가 제재를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도 코로나19가 종식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이 ‘포스트 코로나’라는 언어를 많이 썼습니다. 포스트코로나라는 말은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가 아니라 ‘위드 코로나(with orona)’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당분간 코로나 백신이 나오고 완벽한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위드 코로나, 즉 코로나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할 상황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처음 시작했을 때 한국교회 지도부도 리더십의 방향성을 정하지 못했고 갈팡질팡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염병 확산의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저는 한국교회 대표 지도자는 아니지만 줄기차게 방역수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소수중심의 현장예배와 온라인예배를 병행할 것을 주장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배 회복 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역사에서는 만일이라는 가설이 있을 수 없지만, 신천지 집단감염과 게이클럽 감염만 아니었으면 오늘의 상황까지 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문제는 이단과 동성애에 있었던 것이죠. 어떻든 간에 코로나 백신과 완벽한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가 위드 코로나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포스트 코로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위드 코로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보다 코로나를 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답을 주시고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이걸 믿고 하나님의 답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위기 상황에서 퍼스트 리더가 되고 선제적 리더십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 역시 이번 코로나 위기 때도 선험적 리더십을 발휘하였고 우리 교회도 선도적 리더십을 발휘해 왔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다 한 마음을 품고 하나 되었기 때문에 이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위기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은데,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위기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교회적 리더십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처한 개개인의 삶의 현장에서도 퍼스트 리더십을 발휘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위기 때 리더가 나온다잖아요. 당신이 그 리더가 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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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9
  • [시사칼럼] 작은 자들을 위하여
    2월 24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는 캐서린 존슨이라는 여성이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면서 "존슨은 우리의 영웅일 뿐 아니라 그의 삶과 품위는 전 세계에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녀가 보여준 용기와 그녀가 없었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을 이정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미 정부는 그녀에게 2015년 최고의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으며, 그 일대기를 소개한 소설은 2016년 영화화되어 이듬해 유수의 상을 휩쓸었는데 일반 개봉에 앞서 당시 오바마 대통령도 참석한 가운데 백악관에서 특별시사회까지 열었던 그 제목이「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입니다. 천재적인 수학자였지만 평범한 계산원으로 묻힐 뻔 했던 한 여성이 소련과의 우주개발경쟁에서 우주선의 정확한 궤도와 이착륙지점을 계산해내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비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흑인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이중적인 차별과 그로 인한 분노와 아픔을 800m 떨어진 <유색 여성 전용 화장실> 같은 상징적인 장치로 깊은 여운 속에 담았습니다. 캐서린 존슨 한 사람 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뿌리 깊은 인종 차별은 차치하고라도,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능력과 소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얼마나 많은 '히든 피겨스'가 있었을까요? 아니,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해 차별은 차치하고 성적 추행과 같은 피해에 시달리면서도 침묵을 강요당했던 얼마나 많은 '히든 피겨스'가 존재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다고 하는 우리 사회를 바라봅시다. 얼마 전 최대지방자치단체장의 극단적인 선택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에 상당히 훌륭한 시정을 펼쳤던 인물이었던지라 놀라움이 컸고, 자신의 여비서와 관련된 성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초래된 비극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 컸습니다. 이번에는 가해자의 사망으로 끝이 났지만, 그러나 그 동안 성적 피해자가 2차 가해에 시달리거나 심지어는 목숨을 잃은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억울하게 숨진 여배우 J 사건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고, '별장 성접대 사건' 가해자들은 풀려나온 반면 피해 여성들이 보상이나 위로를 받았다는 얘기가 없질 않습니까? 자크 라캉은 여성을 '전체가 아닌(Not-All)' 존재라 불렀습니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배제된 타자(他者)라는 뜻이며, 물질중심적이고 소비지향적인 욕망의 구조 속에서 때로는 성적 환상으로만 대접 받는 현실을 고발하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소수자(social minorities)'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절대적인 숫자가 부담스럽다면 성경적인 표현대로 "작은 자(elakiston, minimis, 마 25:40, 45)"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까지도 배려하는 말씀과 행위를 보이셨건만, 그러나 우리는 명백하게 통전적(holistic)이어야 할 하나님 나라조차도 남성 위주로 형성된(King of God) 그런 신학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사시 디아즈(Isasi Diaz)는 '킹덤' 대신 '킨덤'이라는 표현을 제시했고(Kin-dom of God, Mujerista Theology, 2004), 피오렌자(Fiorenza) 같은 이들은 '왕국(Kingdom)' 대신 '바실레이아'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Discipleship of Equals, 1993). 세상의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바라봅시다(마 7:3-5). '그루밍(grooming) 성범죄'가 교회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동물이 털을 쓰다듬는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 말은 친분이나 보호 관계를 이용해서 저지르는 성범죄, 즉 최근의 'N번방' 등에서 거론되는 표현이라 교회에서 등장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극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교회만큼은 여성을 향한 비하나 모욕적인 표현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청정지역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사회 전 분야에서 이른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깨져가는 등 여성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비해 신학과 목회 현장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고 나아질 기미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계 행사에서 여성도를 아직도 '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커피는 당연히 여성이 타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말입니다. 십자가 작은 핏방울이 교회의 밑거름이라는 사실을 유념하고, 여성을 비롯한 작은 자들을 위한 교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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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9
  • [은혜의말씀] 영적권세를 사용하라(마 12:28-30)
    우리는 삼차원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아선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권세가 있음을 깊이 통찰하고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영적 권세를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영적권세는 무엇이 있을까요? 1. 죄를 사하는 권세입니다. 이 세상은 죄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먼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못났고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했던 우리, 냄새나는 누더기 옷을 입은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이렇게 큰 용서받은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용서하고 받아주신 하나님 앞에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엔, 나도, 타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 즉, 죄를 사하는 권세를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20:23) 2.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성도에겐 또 축복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축복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12:3) 세상 사람처럼, 너무 쉽게 남을 저주하며 살면 안 됩니다. 도리어 축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꾸 축복의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도시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잠11:11) 3. 강한 자를 결박하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영원히 좋은 것으로 주시고 계시지만, 사탄은 육체에 속한 인간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마귀의 권세에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고 계십니다. (요10:1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권세를 완전히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십자가의 권세를 가지고 강한 자 곧, 마귀사탄의 세력을 결박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강한 자를 결박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10:1, 10:5-15) 4. 말로 명령하는 권세. 하나님께서는 말로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말씀으로 후대에 전하도록 하셨으며,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언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불과 3년 반 동안에 수많은 말씀과 기적과 이사와 행적을 남기셨습니다. 요 21장 25절의 사도 요한이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님이 행하신 권세와 능력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백성들은 말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명령함으로써, 영적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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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8
  • [의학칼럼] 시력교정술
    ■근시란 무엇인가요? 근시는 눈의 기능이 떨어져 가까운 물체는 뚜렷하게 잘 보이지만, 멀리 있는 물체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근시를 가진 눈을 근시안 이라고 합니다. ■근시의 원인? 물체의 상이 망막 앞쪽에 생기기 때문인데 안구가 정상적인 안구보다 길거나, 각막 표면의 곡률이 너무 커서 광선이 각막을 지나면서 너무 많이 꺾이거나, 수정체가 충분히 펴지지 않아 광선이 수정체를 지나면서 너무 많이 꺾이면 근시가 나타나게 되며 오목렌즈로 교정을 할 수 있습니다. ■ 원시는 무엇인가요? 근시와는 반대로 먼 물체는 뚜렷하게 잘 보이지만, 가까이 있는 물체는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현상을 말합니다. 원시의 원인은 물체의 상이 망막 뒤쪽에 생기기 때문이며, 안구가 정상적인 안구보다 납작하거나, 각막 표면의 곡률이 충분히 크지 않아서 광선이 각막을 지나면서 덜 꺾이거나, 가까이 있는 물체를 보려할 때 수정체가 충분히 압축되지 않아 광선이 수정체를 지나면서 덜 꺾여서 그러한 상황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경우 볼록렌즈로 교정이 가능합니다. ■ 난시란? 난시란 눈에 들어간 및이 각막에서 굴절되면서 한 점에서 초점을 맺지 못하고, 두 점 또는 그 이상의 초점을 갖는 눈의 굴절이상을 말합니다. 원시나 근시에서는 초점이 망막표면에 맞지 않아서 상이 흐리게 보이는 것과는 달리, 원거리의 한 점에서 나오는 빛이 각막과 수정체를 통과한 후에 어느 한 점에 상을 맺지 못하므로, 상이 흐려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난시를 가지고 있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정도가 심할 경우 시력에 영향을 주게 되므로 안경,렌즈, 굴절교정수술 등으로 교정이 가능합니다. ■ 시력교정술이란? 시력교정술의 종류? 시력교정술은 쉽게 말해 안경이나 콘택트렌즈의 의존성을 줄이거나 없애고, 눈의 굴절 상태를 개선하는데 사용되는 안과적 수술을 모두 가리킵니다. 흔히들 아는 라식,라섹, 스마일수술을 포함해 각막수술, 백내장수술 등 다양한 방식의 수술 모두 시력교정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라식,라섹 차이점? 라식과 라섹 수술 모두 각막 실질 부위에 미리 목표한 양의 레이저를 조사항 굴절이상을 교정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각막 실질에 레이저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실질 부위를 겉으로 드러내야 하는데, 실질 부위를 노출시키는 방법이 두 수술이 가장 큰 차이점이 되겠습니다. 라식은 각막 상피를 포함하여 각막의 실질 일부까지 정해진 두께로 잘라서 각막 절편을 만드는 반면, 라섹은 실질을 포함하지 않고 각막 상피만 벗겨낸 후에 드러나는 각막의 실질에 레이저를 조사하게 됩니다. ■ 어떤 수술이 더 안전한가요? 어떠한 수술이 더 위험하거나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각각 수술의 특징과 장단점이 있으므로 의료진과 충분한 상담을 한 뒤 적합한 수술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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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28
  • [서임중칼럼] 코로나19가 그렇게 무서운가?
    나는 늙어가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필요한 곳이 있는지 말씀 대언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신다. 친구들이 나에게 붙여준 작금의 닉네임이 ‘서삿갓’, ‘바울사도’다. 아마도 전국을 다니며 말씀사역을 하는 나의 일상을 빗댄 것이리라. 그러나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김삿갓의 삶은 ‘죽장에 삿갓 쓰고 술 한잔과 방랑 삼천리’한 것이고, 나는 ‘복음의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목적 있는 삼천리’이기에 그렇고, 바울은 ‘이름만 읊조려도 무릎이 꺾어지는 위대한 복음전도’가 그 삶이었기에 나 같은 미말의 목사가 바울사도의 이름 곁에 붙여지는 것 자체가 황송하고 어불성설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작금의 나의 일상은 일 년 내내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떠도는 내용은 다르지만 상황은 김삿갓처럼, 바울 사도처럼이기에 동역자들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지난 3월부터 코로나19의 정부 방역대책에 교회도 앞장 서 협력하면서 주일예배도 온라인예배로 드리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시적 상황에 사람들의 불안과 걱정은 그야말로 ‘온 세계 코로나19 멘붕(mental collapsing) 상태’의 지속이다. 한마디로 카오스 현상이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상황인지력과 예지력을 가져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두려움에 함몰되는 영적생활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어야 한다. 상황인지력이란, 코로나19 시대에 소위 ‘믿습니다’를 앞세워 정부 방역 대책에 불응하는 신앙관이 아니라 WHO와 질병관리본부의 방역대책에 순응하며 자기관리, 집단관리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예지력이란, 성경적 관점에서 질병의 발생 원인과 대응, 그에 따른 영적 반응을 이름이다. 질병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병에 대한 이해와 극복하는 자세를 통해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한 차원 더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잠언 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인간생활에서 마음관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더욱 깊이 교훈하는 말씀이다. 전국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듣는 모든 목회자의 공통된 아픔이 예배출석과 헌금이 줄어드는 상황에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답답한 속내의 솔직한 목회내용을 점검해 보면 ‘교회 출석이 가능한데도 코로나19를 앞세워 예배 출석을 안 한다. 따라서 교회 전반적인 교육 행정 선교가 멈추는 듯한 상황’이다. 그럴 때마다 조언해 주는 것은 목회자부터 코로나19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야함을 강조한다. WHO는 코로나19가 우리의 삶에서 쉬 멀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견한다. 수많은 사람이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고 있고 바이러스는 변종으로 더욱 우리의 생활을 위축시키며 불안하게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수단은 손 씻기,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하기 뿐이다. 이미 이것이 오늘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습관도 영적으로 자연스럽게 더욱 승화되어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한 영적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죽음은 두려워하면서 영원한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니다. 가시적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면서 죄의 무서운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 4:8절에서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권고하셨다. 코로나19 때문에 손 씻기가 일상이 되듯 손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고보서 1:26절에서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했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일상화하면서 자기 입에 재갈을 씌우지 못하면 헛된 신앙이다. 사도행전 15: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고 했다. 요한1서 5:21절에서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고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잘 지키면서 죄악된 것들에서 거리를 두지 않는 생활을 하면 코로나19로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죽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대하 7:13~14절에서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무릎을 꿇어야 한다. WHO를 중심으로 온 세계가 코로나19 백신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백신이 개발되면 또 다른 질병이 발생한다. 하나님은 근원적인 백신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1서 1:7).”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4).” 코로나19가 그렇게도 무서운가? 영혼을 죽이는 죄의 바이러스가 더 무서운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백신을 널리 전파하는 복음 전파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여호와 라파’를 노래하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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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성서연구] 주 예수를 믿으라
    코로나19는 익숙하던 많은 것을 빼앗았습니다. 예배당에서 모이지 못하니 예배당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구역, 남녀선교회, 교회학교, 소그룹 등이 중단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초대교회 당시와 흡사합니다. 초대교회도 예배당, 남녀선교회, 노회, 총회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초대교회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해 왔는데, 지금이야말로 초대교회를 배울 최적의 기회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초대교회의 신앙을 깨닫는다면, 코로나19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본문은 초대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온전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밤중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했는데, 그 밤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벗겨졌습니다.(행 16:25-26)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마음으로 굴복한 간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었고,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했습니다.(행 16:31) 이 대답은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데서 출발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교회란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님 안에서 사랑과 기도로 연결된 공동체입니다. 초대교회 선배들은 예배당도, 교회 조직도 없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기도했고, 전도했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힘썼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려고 순교까지 했습니다. 이게 초대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했지만, 강력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거기 사람을 배치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조직에 들어가 일을 많이 하면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거기 붙어있는 군더더기가 더 중요해지는 왜곡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더 극심합니다. 목사를 소개할 때도 몇 대째 믿는 가정 출신인지, 학벌은 어땠는지, 신학교 성적은 어땠는지, 그 후 어느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했는지를 장황하게 소개할 뿐, 얼마나 주님을 간절히 믿고 사랑하는지,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지 등은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세요>는 말 대신 <교회에 다니세요>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런 이들이 세속적 사고로 교회 일을 하니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는 비극이 생깁니다. 기억합시다. 기독교 신앙은 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당에 자주 모이지 못해도, 아니 전혀 모이지 못해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본질보다는 조직과 제도에 매였던 것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더 집중할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 사이에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진정한 신앙을 훈련할 기회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 생태계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주변으로 밀려날 것이며, 지금까지 흐릿해졌던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또렷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성도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메시지를 다시 새길 기회입니다. 코로나19 시대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정말 초대교회를 닮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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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통일칼럼] 독재자들의 평화협정
    ‘뮌헨의 교훈’(Lesson of Munich)이라는 국제정치학 용어가 있다. 독재자들은 평화협정 체결을 침략전술의 하나로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대화주의자 영국 체임벌린수상은, 체코를 침공한 히틀러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히틀러는 즉시 응답했고,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체임벌린 영국총리 등 4개국 대표는 독일 뮌헨에 서 역사적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1938년 9월30일, 체임벌린 총리는 협정문을 흔들면서 “앞으로 유럽에서 전쟁은 없다. 우리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체임벌린은 대화를 통해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6개월 후인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전역을,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뮌헨평화협정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1973년 월맹(북베트남)은 미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1월27일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됬다. 그러나 1974년에 미군이 철수하자 월맹은 곧바로 남베트남을 침공했고, 1975년 4월30일에 대통령궁 철문을 탱크로 밀고 들어가 남베트남을 공산화했다. 파리평화협정 후 벌어진 일이다. 파리평화협정 체결 당시 미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월맹군의 말을 믿고 평화협정체결 한 것을 가장 뼈져리게 후회한다고 훗날 술회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1950년 6.25 남침하면서 세 단계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첫 번째 단계가 38선 인근에 병력을 우선적으로 집결시키는 것, 두 번째단계가 6월7일, 평화통일호소문 발표와 동시에 남북한 총선거 제안이다. 광복 5주년을 기념하여 8월5일부터 8일까지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최고입법기관회의를 구성하고, 8월15일에 서울에서 첫 회의를 갖자고 했다. 세 번째 단계로, 이것을 의논하느라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남한을 기습공격을 한다는 전략이다. 김일성은 평화통일을 호소한 뒤에 무력으로 남한을 침략한 것이다. 그 역시 독재자들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처칠은 전체주의 독재자들과 물질제공 협상이나, 굴복 혹은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했다. 역사는 이를 증명했다. 최근, 미국 트럼프대통령은 김정은과 평화를 위한 대화에 응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김정은도 속내로는 체제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전제로 미국과 정전협정 혹은 평화협정을 맺고 싶어한다. 우리정부도 최근 북한 대화론자들을 국정원장, 통일부장관과, 국가안보실장 등으로 지명하면서 북한과 평화(정전)협정을 위한 대화를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아직도 김일성의 유훈을 헌법상 그들의 국가이념으로 받들고 있는 김일성주의 독재국가이다. 뮌헨의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와 교회지도자들도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일이 누구를 위한 통일이어야 하는가를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정부의 동향을 주시해야만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도, 복음전도의 자유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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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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