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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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조용기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사랑하는 조용기 목사님께서 지난 9.14일 오전7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 하셨습니다. 장례 예배는 9월 18일 오전8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한국교회장으로 치루면서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유가족 등 필수 인원(49명)만 참석했고,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한 교인 1000여 명은 교회 앞마당에서 각자 핸드폰으로 장례예배를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님은 "조용기 목사님은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세계적 목회자이자 부흥사이다. 큰 축복이자 자랑인데 (돌아가셔서)허전함과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위로와 천국의 소망이 유가족과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한다"고 하면서, "한국교회의 큰 별, 세계 선교의 밝은 빛이었던 모세 조용기 목사님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뒤를 이을 여호수아 이영훈 목사님이 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추모시를 낭독한 한교총 공동대표 소강석 목사님은 "세계 속에 한국 이름을 가장 많이 알린 애국자요, 국민일보 통해 진리의 등불을 밝힌 선지자"라며 애도했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이철 감독회장님은 조사에서 "영산 조용기 목사님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목사님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은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산업화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으로 절대 희망, 절대 긍정을 심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 그동안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목사님의 사랑과 가르침 잊지 않고 잘 계승해 나가겠습니다"고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조 목사님의 차남 조민제 국민일보 회장님도 유족을 대표해서 "가족 대표로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아버지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선교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본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천국의 축제를 기대하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 나갔으면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삶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가신 조용기 목사님의 하관식은 이날 오전 10시 파주 오산리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공원묘원에서 엄숙하게 마쳤습니다. 나의 스승 믿음의 아버지 조 목사님을 만나게 된 계기 사랑하는 조용기 목사님을 처음 대한 곳은 ‘순복음 뉴스’ 였습니다. 당시 모신문사 출판부에 근무할 때 과장급 되는 한분께서 젊은 조용기 목사님의 사진과 설교문이 있는 갓 나온 초창기 신문을 펼쳐 보이면서 “서대문 네거리에 순복음중앙교회라는 굉장한 교회와 천지를 진동하는 설교를 하는 굉장한 목사가 있다. 한번 읽어보고 가 보라”고 나를 권면했습니다. 마음에 그 말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단성사옆 동방속기학원에 동반 수석 졸업한 한 자매님의 전도로,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청년부흥성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수천여 명의 청년들과 성도들이 가득 성전을 메운 채, 몇 일 밤 뜨거운 성령님의 역사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곧 바로 다음 주일부터 본격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와 신유현장을 체험하였는데, 매주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병치료 받는 사람들이 수없이 간증을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난 매주 목사님 설교를 속기로 받아썼는데, 원래 속기사2급이 분당280자, 1급이 320자였는데 목사님의 설교는 분당440자여서 나는 물론 예배에 가끔 참여했던 유명 속기강사도 다 따라 적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교회 다닌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부터 전도를 해야 한다는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따라, 바로 교회뒤편에 있던 적십자병원에 전도를 나가서, 조용기 목사님이 그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면서 기도까지 해주었는데, 너무 쉽게 환자들이 눈물로 기도를 받고 결신까지 하는 모습을 경험했습니다. 그때가 1969년 여름이었는데, 그 후 밤새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하다가 완전참회의 거듭남을 체험하고, 변화된 세상에 살게 되었으며, 또 성령침례를 통해 다시 한번 뜨거워지고 방언기도의 능력까지 받았습니다. 1973년 조용기 목사님의 주례로 서대문교회에서 매일 밤 철야하며 기도제단을 쌓던 교사 출신자매와 결혼을 하고, 아예 교회가 있는 동네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이후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 배우고 깨우친 핵심적인 내용 가장 먼저 목사님께 매료되고 목사님의 인격을 더욱 신뢰하게 된 것은 목사님의 모든 설교 중 나타나는 ‘솔직 담백함’과 ‘절대긍정’이었습니다. 어릴 때, 고향교회 목사님은 설교 중 한 번도 자기 속사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신 적이 없었는데 조 목사님은 설교 도중 개인적인 모든 과거의 아픔과 가정사까지 솔직담백하게 펼쳐 보이시는 것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또한 목사님은 담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과 성령님만 의지하고 극한 난관을 당할 때도 ‘용기’라는 이름처럼 담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절대 긍정’이며 ‘적극적인 신앙’과 설교는 당시 방황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고, 헌신하게 만들었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가게 했습니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는 ‘노만 빈센트 필 박사’나, ‘로버트 슐러’ 같은 분들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메시지를 많이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삼서 2절의 ‘삼박자신앙’,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는 축복의 메시지가 강단에서 쉴 새 없이 증거 되면서 젊은이들이 변화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영성은 성령님을 가장 최고 자리에 모시는 '겸손의 영성’이셨습니다. 당시 서대문 교회 강단에는 7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가장 중앙 가운데 자리는 항상 비워 놓으셨습니다. 목사님은 여의도로 이사올 때까지 그 옆자리에 겸손히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늘 성령님께 이렇게 간구했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 가운데 자리는 거룩하신 성령님 자리입니다. 성령님이 당회장이 되셔서,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도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오니, 오셔서 주장하여 주시고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그럴 때 살아계신 성령님이 말씀과 권능으로 역사하심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스승 조용기 목사님은 큰 분이셨다. 조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크게 지으셨으며, 모진 고난을 통해 크게 훈련시키셨으며, 끝까지 성령님께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생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조용기 목사님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분의 설교를 들으며 그분의 사역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김장환 목사님은 “세계를 다니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조용기 목사(Dr.조)님은 잘 알더라!” 전광훈 목사님도 “예수님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조용기 목사님 같은 위대한 종이 더 이상 없으리라 생각한다. 조용기 목사님의 그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대한민국을 굳건히 세우자”고 하셨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그립습니다. 천국에서 편안히 쉬시고 훗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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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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